5. 파문
1227 년 프리드리히 2세는 대략 4만 정도의 병력을 소집해서 이탈리아의 브린디시 항에서 아크레로 항해할 예정이었다. 사실 프리드리히는 더 이상 연기할 명분도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이번엔 진짜 성지로 갈 참이었다. 하지만 불행히 이번엔 역병이 그의 앞을 막았다. 황제는 선제 하인리히 6세 (그는 남부 이탈리아에서 역병으로 죽었다) 의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군대를 돌리고 일단 몸을 회복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러나 이미 거듭된 십자군 원정 거부의 전력이 이었으므로 다소 외골수이던 교황 그레고리우스는 곧 바로 황제를 파문했다. (9월 29일) 훗날 전해지는 야사에 의하면 교황이 황제를 그렇게 빨리 파문했던 것은 프리히드리가 병중에 "모세, 그리스도, 무함마드는 세계 3대 사기꾼이다" 라고 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세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무리 역사가 부르크하르트가 '왕좌에 앉은 최초의 근대인' 이라고 불렀던 프리드리히 2세라곤 해도 당시 시대상을 고려하면 그렇게 무모한 말을 함부로 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종교관을 보면 그렇게 말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납득이 될 것 같은 이야기긴 했다.
아무튼 황제는 병을 다스리는 대로 십자군 원정을 진행하려 했으나 이번에는 교황이 반대하고 나섰다. 파문을 당한 와중에 십자군을 이끄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황제는 자신의 제국에 충분한 지지세력을 확보해 교황과의 싸움에서 충분히 우위에 설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으므로 결국 이를 무시하고 십자군 원정을 진행했다.
이에 분개한 교황은 프리드리히 2세의 독일과 시칠리아의 왕위를 박탈하고 군대를 모아 프리드리히 2세의 군대를 공격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프리드리히 2세는 과거 인노켄티우스 3세에 볼모로 잡혀있던 소년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는 즉시 자신의 지지 세력 및 주요 군주와 영주들에게 서신을 보내 이와 같은 교황의 조치에 매우 놀랐으며 이로 인해 십자군 원정의 열기가 식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을 형성했다.
일단 황제는 성지로 향하면서 동시에 교황에 대한 전쟁도 준비하고 있었다. 교황 역시 전쟁을 고려하고 있었으나 이미 강력한 세력을 구축한 프리드리히 2세이기에 이 일은 심지어 황제가 파문당한 상태에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이들의 전쟁은 좀 더 시간이 흐른 후에 본격화되었다. 교황이 황제가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러 간 사이 그 뒤통수를 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가 되면 교황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성지 탈환이 아니라 황제를 타도하는 것이었다.
황제는 파문 때문에 의기 소침할 인물은 전혀 아니었지만 1228 년에는 파문보다 더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의 두번째 아내이자 아직 10대 소녀인 욜랑드가 나중에 콘라드 2세가 되는 아들을 낳고선 그해 4월에 죽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제 아직 유아인 어린 아들만이 예루살렘 왕국에 대한 프리드리히 2세의 권리를 입증해줄 유일한 근거였다. 당시가 유아 사망율이 높은 시절임을 감안하면 꽤 불안한 권력 기반이었으나 이 아이는 결국 성인까지 커서 왕관을 물려 받게 된다.
(황후 욜랑드의 죽음 William of Tyre's Historia and Continuation, 13C manuscript from Acre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아내가 남긴 어린 아기를 위해서라도 예루살렘의 왕관은 황제에게 중요했다. 이제 성지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함은 물론이고 그리스도교 세계의 세속적인 수장으로써 권위를 높이기 위해 예루살렘 탈환이 황제의 새로운 당면과제가 되었다.
6. 키프로스
하지만 1228 년 6월 28 일 이탈리아를 출발한 황제는 바로 성지를 향하지는 않았다. 그전에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곳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로 키프로스 왕국인데 앞서 키프로스 왕국이 비잔티움 제국의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 충성을 바쳤다는 것은 이야기 한 바가 있다.
그러나 거리상 사실 키프로스 왕국은 황제의 간섭을 전혀 받지 않고 지냈다. 1228 년 당시 키프로스 왕국도 세월이 흘러 4대 국왕인 앙리 1세 (Henry I of Cyprus) 가 즉위한 상태였다. 앙리 1세는 1살 때인 1218 년 즉위해서 당시엔 11세였다. 따라서 당시에 키프로스 왕국은 섭정인 장 디블랭 (John of Ibelin) 이 통치하고 있었다.
장 디블랭은 베이루트의 영주 (old Lord of Beirut) 이면서 우트르메트르의 남아있는 유력 귀족 가문인 디블랭 가문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는 아크레의 섭정으로도 활약한 바 있으며 몽페랏의 마리를 섬겼다. 이후 그녀가 장 드 브리엔과 결혼 이후에는 장 왕을 섬기기도 했다. 평소 그는 강직하고 원칙을 따르는 인물로 알려져 섭정의 위치에서 영지를 다시 본래 소유자에게 넘기는 일에 최적의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장 디블랭의 섭정 시대의 최대 고비가 된 사건은 물론 다른 야심을 품은 황제가 1228 년 7월 21일 키프로스에 상륙한 것이었다. 황제가 굳이 이 섬에 상륙한 이유에 대해서 장 디블랭은 물론 다른 키프로스인들도 황제가 이 섬을 가로채기 위해서라고 믿었다. 아직 어린 왕과 나이든 섭정이 통치하는 영토는 확실히 황제에게도 탐나는 영토였을 것이다.
과연 황제는 그와 다른 유력 귀족들을 회의장으로 불러 낸 후 감금하고 키프로스는 물론 베이루트 까지 양도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장 디블랭도 배짱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버텼는데다 황제 역시 이를 무력으로 관철하기엔 병력이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한발 물러서서 최종적으로는 십자군 원정에 동행하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결국 프리드리히 2세가 키프로스에 대한 야심을 거두지 않았는데다 장 디블랭도 그냥 물러설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미래에 이를 둘러싼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필연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사실 그의 대 우트르메르 정책은 이런 점들을 보면 합격이라고 보긴 힘들다. 이일로 인해 현지의 영주와 귀족들은 프리드리히 2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앞서 설명했듯이 안티오크 공국 및 트리폴리 백작령의 영주인 보에몽 4세는 적당한 선에서 발을 빼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프리드리히 2세가 크게 승리하는 날 자신들의 영지도 위태로울 수 있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형식상이라도 교황의 직접적인 명령을 받는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은 황제에 협력을 거부하고 있었다. 사실 무슬림과의 전쟁을 위해서는 현지 사정과 무슬림들의 전술에 익숙한 기사단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황제는 이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기에 1228 년 9월 시리아에 도달한 황제는 무슬림들을 힘으로 굴복시킬 충분한 무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황제에게 충성한 것은 이전부터 황제에게 많은 도움을 받은 튜튼 기사단 뿐이었다.
7. 협상
1229 년 초가 되자 프리드리히 2세는 사면초가에 빠졌다. 현지 귀족과 기사단의 도움을 받기도 힘든 상태에서 그가 없는 틈을 타서 교황을 지지하는 군대가 그의 영토를 노리는게 확실했다. 그런 만큼 우트르메르에서 시간을 오래 끄는 것은 매우 불리했다. 허나 그냥 아무 소득 없이 후퇴하는 것도 명분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사실 예루살렘 수복은 명분 이상의 의미가 있었는데 일단 성지를 탈환한다면 교황과의 싸움에서도 우위에 설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황제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도 주장하고 싶어 했으므로 (일단 형식상은 섭정의 모습이었지만) 이 도시를 꼭 탈환코자 했다.
그런데 황제에게 다행한 것은 당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여러지역을 장악한 아이유브 왕조의 술탄 알 카밀 (Al Kamil) 이 전쟁보다는 협상을 더 선호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아이유브 왕조는 위대한 초대 술탄 살라딘 이후 그의 동생인 알 아딜 까지는 대략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룰 수 있었으나 알 아딜 사후에는 여러 아들들이 제국의 영토들을 나눠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의례 그러하듯이 남의 떡이 더 커보이게 마련이므로 이들 간에는 전쟁과 다툼이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중에서 이집트와 팔레스타인 일부를 장악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한 알 카밀은 특히 동생인 다마스쿠스의 알 무아잠 ( Al-Mu'azzam 'Isa Sharaf ad-Din )이 큰 근심거리였다. 알 무아잠은 1227 년 사망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안 나시르 (An-Nasir Dawud) 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이 때 알 카밀은 안 나시르를 공격해 셀수 없이 주인이 바뀌는 도시인 예루살렘과 나블루스를 점령했다. (사실 예루살렘은 무슬림 지배자들에게도 중요한 도시여서 수시로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안 나시르는 알 카밀의 또 다른 형제이자 자신의 삼촌인 알 아슈라프 (Al - Ashraf) 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오히려 알 아슈라프는 알 카밀과 손잡고 안 나시르의 영토를 분할해 버렸다. 이렇게 알 아슈라프는 다마스쿠스와 시리아를, 알 카밀은 팔레스타인을 일부 접수하게 되었다. 불쌍한 조카 안 나시르는 결국 울트라주르뎅의 케락의 에미르 자리에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영토를 확보한 알 카밀에게 이번에는 서방에서 나타난 프리드리히 2세가 예루살렘 만이라도 돌려줄 수 있겠냐면서 협상을 시도해온 것이다. 이것만 해도 의외의 주장이지만 알 카밀은 프리드리히 2세가 매우 독특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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