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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6차 십자군 이후의 정세 (2)





 2.  프리드리히 2세와 제국의 분열


 1229 년 예루살렘 왕위에 오른 직후 (정확히 말하면 그는 아들 콘라드의 섭정 자격이었지만 어차피 콘라드가 갓난아기에 불과했으므로 이 점이 문제되진 않았다)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서둘러 유럽으로 귀국했다. 흔하게 예상할 수 있는 일이듯이 황제가 부재한 틈을 타 유럽에서는 교황과 반 황제 세력들이 힘을 합쳐 황제를 몰아내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 경우 황제가 성지를 회복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미 황제는 파문당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도 결국 예루살렘을 어쨌든 수복했기 때문에 황제가 명분상 유리한 고지에 있었다. 


 황제가 예루살렘에 있던 동안 이탈리아의 대리 섭정은 스폴레토의 라이날도 (Rainald of Spoleto) 였다. 1229 년 교황의 군대가 스폴레토 공작령 및 마르케 (Marche) 를 공격해 들어왔다. 그런데 어떻게 교황의 군대라는게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 사정을 설명하면 이렇다. 


 사랑하던 딸 욜랑드가 죽은 후 전 예루살렘 국왕 장 드 브리엔은 실의에 빠져 있었다. 그는 황제가 딸을 이용만하고 이제는 본래 자신의 것이던 왕위도 강탈해 갔다고 개탄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교황 그레고리우스 9 세가 접근한 것이다. 즉시 장 드 브리엔은 황제에 반대는 세력을 규합해 병력을 모았다. 그리고 1229 년 황제가 없는 틈을 노려 궐기한 것이다. 


 장 드 브리엔의 군대는 2차 대전 당시 격전지로 유명한 몬테카지노 (Monte Cassino) 에서 제국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지만 이를 돌파하고 이탈리아 남부의 아풀리아 (Apulia) 로 향했다. 과거 로베르 기스카르의 근거지였던 아풀리아는 이미 황제의 본거지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 프리드리히 2세가 브린디시에 상륙했다. 


 1229 년 6월에 브린디시에 상륙한 황제는 다시 역습을 가해 빼앗긴 영토를 대부분 수복했으며 북진을 시도해 교황령에 도달했다. 여기서 황제는 교황령을 우회한 후 대부분의 반란 분자들을 격파했다. 이렇게 되자 고립 무원이 된 교황은 휴전할 수 밖에 없었다. 1230 년에 산 게르마노 협정 (Treaty of San Germano) 가 맺어지고 교황은 다시 파문을 철회했다. 물론 프리드리히 2세도 정통 기독교 신앙으로 복귀하겠다고 서약했다. 




 (중세 독일,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다운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의 초상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그러나 매우 불행하게도 황제의 시련은 이제부터였다. 오랜 세월 황제가 이탈리아에 나가 있던 것은 결국 독일에 대한 호엔 슈타우펜 왕조의 장악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실 이탈리아에 근거지를 마련한 것은 황제에게는 여러가지 이점도 있기는 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렇게 교황이 반기를 들었을 때 군대로 신속하게 로마까지 압박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전 황제들은 알프스 산맥을 넘어와야 했기에 교황을 제압하기 위해 긴 원정길에 나서야 했고 그러다보면 성공적으로 교황을 제압하기란 프리드리히 1세 바바로사 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손자이자 이탈리아에 근거지를 마련한 프리드리히 2세에게도 매우 큰 약점이 생겨났으니 바로 독일의 반 독립적인 제후들에 대한 황제의 영향력이 더 약화되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들 하인리히를 독일 왕에 봉하고 독일을 통치하게 했지만 또한 아들의 권한이 커지는 것을 막으면서 제후들이 서로를 견제하기를 바랬는지 제후들이 독립적인 힘을 키우는 것을 방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므로써 자신이 독일에 없는 동안 누구도 자신에게 반기를 들만한 힘을 키우는 것을 방지한 것이다. 


 이 상황을 참지 못하게 된 것은 미래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아들 하인리히였다. 그의 가장 큰 불만은 아버지 프리드리히 2세가 제후들의 권한과 특권을 너무 크게 인정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하인리히는 자신의 왕국에서조차 자신의 권위가 서지 않는다고 느꼈다. 제후들이 너무 커지면 결국 나중에 그가 황제가 되었을 때 자신의 권력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교황과의 평화 협정이후 황제는 마지막으로 북 이탈리아의 롬바리디 (Lombardy) 지역에서 황제의 권위를 세우는 작업에 들어가 있었다. 남 이탈리아는 완전히 제국령이 되었으므로 이제 북이탈리아만 통일하면 북독일에서 시칠리아까지 관통하는 제국이 완성될 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도시국가들을 포함한 이탈리아 북부 지대에 황제의 권위를 다시 확립하는 것이 제국 건설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 모든 것이 무너지고 만다. 그것은 바로 아들 하인리히가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와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반란은 서양 중세 역사에서 아주 드문 경우는 아니었다.  하인리히는 아버지의 독일 정책에 반기를 들었는데 혼자서는 반란에 성공하기 힘들었으므로 누군가 협력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황제에게 반기를 들 가장 유력한 후보인 교황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1234 년 다시 황제는 그레고리우스 9세에게 파문을 당한다. (이후에도 수차례 파문과 번복이 계속된다)


 사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는 명확하다. 하인리히가 좀 더 미래를 내다보았다면 일단 아버지에게 협력해서 제국에 반대되는 세력을 모두 소탕한 후 제위를 물려받아 독일을 자신의 뜻대로 이끌어 나가면 되는 일어었다. 그러나 아직 젊은 하인리히는 그렇게 오래 기다릴 인내심이 부족했던 것 같다. 


 더 치명적인 실수는 반란에 동참할 세력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었다. 일단 북 이탈리아의 반 독립적인 도시 국가들인 밀라노, 볼로냐 등은 연합을 맺어 황제에 반기를 들었는데 이들이야 당장에 제국의 직접 지배를 당하지 않으려는 동기가 있었지만 독일의 제후들은 당연히 아버지 쪽을 지지했다. 결국 하인리히 주변에는 그의 가신들, 즉 미니스테리알렌 밖에는 없었다. 


 1235 년 프리드리히 2세는 어렵지 않게 하인리히를 사로잡고 독일에서의 반란을 분쇄했다. 이후 일어난 일은 한편의 비극이었다. 하인리히는 프라하에 감금당하고 눈이 뽑히는 형벌을 당했다. 그 후 다른 감옥으로 이송될 때 하인리히는 절벽에서 떨어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일로 인해 프리드리히 2세는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제의 권위와 제국의 힘마저 무의미하게 소모되고 말았다. 만약 하인리히가 좀 더 신중한 성격이었다면 결국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작은 욕심이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영원이 날려버렸을 뿐 아니라 제국의 분열까지 가속시켰다.   


 이후 황제는 롬바르디 도시 동맹의 반란을 분쇄하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를 허수아비로 만드는데는 성공했지만 1241 년 교황좌에 오른 인노켄티우스 4세가 교황과 황제의 지루한 전쟁을 계속 이끌었다. 그는 1245 년 프랑스 리옹으로 도망친 후 여기서 공의회를 열고 수없이 파문당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게는 파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황제에서 폐위 - 이는 물론 왕을 황제로 올릴 수 있는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 주장에 따른 것이다 - 함을 선언했다. 


 이후 황제는 말년에 각지의 롬바르디와 다른 지역의 반란을 제압하는데 시간을 소모하다 1250 년 서거했다. 그 뒤를 이은 콘라드 4세가 1254 년 확실한 후사없이 사망하자 제국은 이후 대공위 시대라는 황제가 없는 대혼란 시대를 겪게 된다. 


 사실 십자군 전쟁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이야기긴 하지만 프리드리히 2세의 쓸쓸한 몰락은 위대한 인물이라도 모든 여건이 도와주지 못하면 성공하지 못할 수 있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이야기다. 아무튼 독일이 대 혼란기에 빠져듬에 따라 이후 십자군 원정의 주력은 다시 프랑스로 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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