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1260 년 아인 잘루트 전투를 전후로 한 시기에 사실 십자군 국가들의 남은 잔존 세력 - 시돈에서 아크레에 이르는 수백 km 정도되는 해안가의 작은 띠처럼 생긴 영토와 트리폴리 백작령, 안티오크 공작령, 그리고 키프로스 왕국 - 은 이 지역 역사에서 주도적인 역활을 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두 강대국인 몽골과 맘루크 왕조 사이에 끼어 지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이미 유럽에서 십자군에 대한 열정이 상당 부분 식은 상태에서 이들 잔존 세력이 그나마 수십년 정도 근근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주변 무슬림 국가들이나 혹은 몽골 세력에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는 정도 세력이었고 이들 해안도시들이 서방과의 무역 창구로써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실력자 바이바르스는 결국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체의 지배를 원했으므로 이들 십자군 잔존 세력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그 이후 두차례의 십자군 운동 (만약 5,6 차를 나눈다면 이들이 8차와 9차가 되나 분류에 따라서는 5,6 차를 합치고 이들을 7차와 8차로 부르기도 한다)이 일어나기는 하지만 결국 역사를 뒤집는 결과를 가져오진 못했다.
셀주크 투르크 제국 이후 극도의 분열상을 보이던 서남 아시아 및 북아프리카의 정세가 결국 맘루크 왕조와 몽골 제국이라는 양대 세력으로 재편되었기에 지역에 토착화나 혹은 의미 있는 크기의 왕국 유지에 성공하지 못했던 십자군 왕국은 어쨌든 몰락할 처지였다.
2. 몽골의 재침공
몽골 제국의 서남 아시아 정벌은 사실 수차례에 걸쳐 반복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최초는 물론 칭기즈칸이 살아있을 때 일어났던 일로써 무슬림 홀로코스트라고도 불린 끔찍한 대량 학살이 일어난 1219 - 1222 년 사이의 일이었다. 이후 몽골의 재침입으로 1231 년에 화레즘 제국이 멸망했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다. 이로써 대략 파키스탄/아프가니스탄/이란 등의 일부가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나 아직 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중심으로 아바스 왕조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몽골 제국의 4대 황제인 몽케 칸 (헌종) 이 1251 년 즉위하자 그는 쿠빌라이에게는 남송 정벌을 훌라구 (Hulagu) 에게는 서남아시아 정벌을 재차 명했다. 지금의 이라크에서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지역이 훌라구가 노렸던 지역이었다.
훌라구는 징기즈칸의 손자로 톨루이 (Tolui) 의 아들이었다. (그의 형들이 아리크부카, 몽케 칸, 쿠빌라이 칸이었다 ) 툴루이는 징기즈칸의 막내아들이었는데 본래 몽골의 풍습에서는 막내 아들이 가문을 잇는 것이 관습이었으나 툴루이는 형들에 야심에 가려 제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대에 이르러 몽케가 바투의 지원을 받아 칸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몽골의 풍습에 의하면 칸의 지위는 세습제가 아니라 나름 민주적인 방식으로 쿠릴타이라는 부족 회의에서 선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징기즈칸의 위업이 워낙 대단하다 보니 사실상 그의 아들들에 의해서 세습이 되고 쿠릴타이는 추인만 하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하지만 이 경우에 대체 장자 세습인지 아니면 몽골 전통 대로 막내 세습인지가 확실치가 않아 매번 왕위 계승 때마다 전쟁이 일어나거나 준 전시 상황의 대립 상태에서 칸이 누군지 결정되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점차 제국은 분열의 길을 걷게 된다.
(훌라구와 그의 아내인 도쿠즈 카툰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아무튼 훌라구는 몽케 칸의 명령을 받고 대병력을 동원해 서남 아시아를 재차 침공했다. 1255 년 출정한 훌라구는 현재의 이란의 나머지 지역을 몽골의 지배하에 편입하고 서서히 서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의 칼날이 먼저 향한 것은 바그다드도 예루살렘도 카이로도 아닌 아사신파였다.
3. 아사신 파의 최후
아사신, 하시시, 혹은 영어식으로 어쌔신이라고도 발음되는 이 이슬람교의 독특한 분파는 후세에 알려진 명성처럼 당시에도 암살로 유명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미 이전의 십자군 전쟁사에서 많이 다뤘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아무튼 이들이 결정적으로 몰락한 이유는 건드려선 안될 상대 - 즉 몽골 제국 - 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아사신파는 늘 하던 대로 몽골의 칸을 암살하기 위해 암살자들을 보냈으나 이는 결국 몽케 칸의 분노만 일깨웠을 뿐이었다. 이에 몽케 칸은 우선 훌라구에게 그들의 본거지가 있는 이란의 알라무트 (Alamut) 를 점령하고 아사신 파는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일 것을 명했다. 당연히 이런 종류의 명령에 친숙한 훌라구와 그의 몽골 군대는 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다.
1256 년 12월 15일 훌라구의 군대는 알라무트의 요새를 포위하고 무시무시한 공격을 퍼부은 끝에 이들을 전멸시켰다. 이때 아사신 파의 마지막 지도자 루큰 알 딘 쿠르샤 (Rukn al - Din Khurshah) 도 훌라구에 의해 처형당했다.
(알라무트의 포위전. 이 요새의 점령 후 아사신 파는 이전 같은 힘을 유지할 수 없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아사신 파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까지 가지를 뻗고 있었으므로 이 정도로 완전히 와해되진 않았다. 사실 1275 년에도 아사신 파의 잔당들이 알라무트 요새를 수개월간 다시 탈환했던 역사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 이 때 사실상 아사신 파의 주력이 파괴되어 더 이상 이전같은 위력은 되찾지 못했다.
후세에 시리아 분파의 아사신 파의 잔당들은 맘루크 조의 바이바르스에 의해 1273 년 흡수되기도 했는데 맘루크 조에서 이들 아사신들을 일종의 킬러로 고용했던 것 같다. 다만 이후 역사에서 이들의 역활에 대해서는 베일 속에 가려져 있으며 그들이 정확히 언제 사라졌는지는 알지 못한다.
아무튼 아사신 파의 최후는 그래도 이후에 벌어질 바그다드의 최후에 비하면 그래도 덜 끔찍한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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