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십자군 전쟁사 - 6차 십자군 이후의 정세 (1)






 1. 프리드리히 2세 귀국과 롬바드 전쟁 


 프리드리히 2세는 예루살렘 역사상 보기 드문 무혈 입성을 이뤄낸 이후 아크레를 통해 다시 이탈리아로 귀국했다. 일단 교황 그레고리우스 9 세가 반 황제 세력과 결탁해 이탈리아내 황제의 근거지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을 서두를 필요가 생겼다. 


 하지만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잔존 세력들은 황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일단 너무 빨리 세상을 하직한 욜랑드를 이용해 최대한 권력만 쟁취하려는 황제의 의도가 많은 십자군 및 현지 유럽인들에게 좋지 못한 인상을 주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이교도와의 싸움이 아니라 다만 예루살렘의 왕좌일 뿐이라는 사실이 명확했다. 더구나 키프로스의 사례처럼 무리하게 영토를 장악하려는 시도 역시 현재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따라서 황제가 아크레를 떠날때 연대기 작가인 노바라의 필립 (Philip of Novara) 의 기록했듯이 현지인들이 황제를 향해 증오와 저주를 퍼부었다는 것은 당시 여론을 솔직히 반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현지 십자군이 기대한 건 황제가 대규모 병력으로 무슬림 세력을 격파하고 다시 예루살렘 왕국을 수복하는 일이었겠지만 사실 현지 십자군 세력과 기사단의 도움 없이는 황제가 멀리 떨어진 우트르메르에 그렇게 많은 병력을 투입해서 이와 같은 일을 성취하긴 힘들었다. 


 물론 황제의 생각은 현지인들과 달랐다. 황제가 성지에 온 이유는 이교와의 전쟁이 아니라 속주 하나를 더 추가하려고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황제가 파견한 총독이 이 지역을 다스려야 하는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 지역의 영주들은 쉽게 그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일단 제국과 멀리 떨어진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 지역 영주들이 상당 수준 토착화되어 지역 주민들도 자신의 도시나 영지의 영주에게만 충성하는 태도가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갑자기 등장한 황제가 내가 이 지역의 통치자라고 주장해도 사실 백성들이나 영주들에겐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야기 였다. 따라서 이 지역을 실제 제국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서는 결국엔 무력으로 이 지역을 정복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만약 프리드리히 2세가 다른 곳에 병력을 파견하지 않고 오직 이 지역에만 무력을 투사할 수 있었다면 성공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불행히 황제의 주 전장은 우트르메르가 아닌 이탈리아와 독일이었다. 여기서 황제는 교황 및 반 황제 세력과 끊임없는 전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었으므로 솔직히 프리드리히 2세의 계획은 결국 성공할 수 없었다. 


 이 점은 결과론적인 이야기고 아무튼 유럽에서의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른 시점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이 지역에 병력과 총독을 파견했다. 1231 년 이 지역에 파견된 리카르도 필란제리 (Riccardo Filangieri) 는  이탈리아 귀족 출신의 유능한 장군으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시칠리아 왕국의 제국 원수 ( imperialis marescalcus = imperial marshal) 로 임명된 후  6 차 십자군에서는 황제를 수행하기도 했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처음부터 황제가 중요하지 않은 키프러스와 우트르메르 지역에 투입할 병력이 얼마 안된다는 사실 때문에 결정되어져 있었다. 한정된 병력으로 현지인들의 끊임없는 지원을 받는 장 디블랭의 반황제군을 끝까지 제압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반란군을 격파해도 그들은 다시 어디선가 나타났다. 


 솔직히 아프리카 전역의 롬멜처럼 사실 유능한 장군이라도 지원 없이는 끝없는 물량의 적을 상대하긴 힘든 법이지만 - 그럼에도 롬멜 장군은 놀랄만한 전과를 세웠다. 그 사실이 독일의 대부분의 물량이 동부전선으로 향해야 한다는 사실을 바꿀수는 없었지만 - 불행히 필란제리는 그 정도로 유능한 장군도 아니었기에 롬바드 전쟁 (War of the Lombards) 으로 알려진 전쟁은 그에게나 황제에게나 모두 악몽으로 끝난 전쟁이었다. 


 롬바드라는 단어는 우트르메르에서 황제파를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황제의 명을 받고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러스 왕국을 접수하러 온 외지인들을 일컫는 단어였다. 이들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이었기 때문에 이 전쟁은 롬바드 전쟁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유럽에서 기벨린파와 구엘프파간의 전쟁도 롬바르디가 주 전장이었다) 


 아무튼 황제가 총독과 군대를 보낸다는 소식이 현지에 도달하자 누구보다 먼저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키프로스의 섭정이자 베이루트의 영주였던 장 디블랭 (John of Ibelin) 이었다. 그는 즉시 군대를 소집했는데 아무래도 황제가 보낸 병력보다는 소수였지만 현지인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었다. 


 필란제리는 우선 키프로서의 소년 왕 앙리 1세를 찾아가 기존의 섭정인 장 디블랭을 몰아낼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앙리 1세가 그다지 내켜하지 않았으므로 일단 장 디블랭의 근거지를 공격하고 십자군 왕국에서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할 목적으로 우트르메르로 상륙했다. 


 이 전쟁에서 그 강력한 군사력으로 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3대 기사단 중 성전 기사단은 장 디블랭을 중심으로한 현재 귀족들을 지지한 반면 튜튼 기사단과 구호기사단은 필란제리를 지지했다. 왕실 공의회 (Haute Cour) 와 예루살렘 순회 법정 (Assizes of Jerusalem - 중세 귀족들의 법률 기구 )  에서는 황제의 대리로써 그의 권리를 인정했지만 대신 필란제리의 실제적인 권력 행사는 제한했다. 


 필란제리는 현재의 적대적인 영주와 백성들을 상대하기 위해 유력한 영주라고 할 수 있는 안티오크 공작겸 트리폴리 백작인 보에몽 5 세와 동맹을 맺고 자신의 사령부를 티레에 세웠다. 또 예루살렘 및 황제에게 양도된 도시들의 권리를 확보했다. 


 반면  장 디블랭을 대표로하는 현지의 반 황제 영주들과 백성들은 베이루트, 아르수프, 카이사레아, 아크레를 장악했으며 1232 년에는 장 디블랭이 아크레의 시장으로 뽑히기도 했다. 당시 아크레에 사실상의 예루살렘 왕국 임시 정부가 있었기 때문에 장 디블랭의 세력도 무시할 순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전부터 예루살렘 왕국을 비롯한 레반트 지역에 꽤 큰 이권을 행사해온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도 피사는 필란제리를 지지하고 제노바는 장 디블랭을 지지하는 등 예루살렘 왕국 자체가 황제파와 반 황제파로 나뉘어 내전상태에 빠졌다. 다행히 무슬림 세력역시 서로 싸우는데 바쁘지 않아더라면 꽤 위험한 상황이었다. 


 필란제리는 일단 적의 근거지를 먼저 공격하기 위해 베이루트를 포위했다. 베이루트 시는 결국 항복했는데 사실 이 사건은 전쟁의 끝이라기 보단 본격적인 내전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장 디블랭의 지지자들은 왕국 전체에 퍼져있었기 때문이었다. 외지인들을 보내 이 지역을 장악하려는 황제의 의도는 현지 영주와 백성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고 있었고 베이루트 보다는 이것이 장 디블랭의 든든한 기반이었다. 


 이듭해인 1232 년 롬바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첫번째 전투가 카잘 임베트 (Casal Imbert) 라는 십자군 성채에서 벌어졌다. 이 전투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지만 장 디블랭의 대패였다. 따라서 이에 고무된 필란제리는 키프로스 섬을 장악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주력을 키프로스로 보냈다. 


 이에 장 디블랭 역시 키프로스로 상륙했는데 사실 장 디블랭이 이끄는 군대는 필란제리가 이끄는 병력에 비해 매우 소수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승산이 있었던 것은 장 디블랭과 그의 병사들이 현지 지형에 익숙한 것은 물론 새로운 지배자로 강압적인 통치를 하는 필란제리와 황제의 관리들에게 큰 분노를 느끼고 있던 현지 주민과 지방 귀족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롬바르 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가 키프로스에서 벌어졌는데 이는 아그리디 전투 (Battle of Agridi) 였다. 필린제리는 기병 2000 정도를 가지고 있었고 장 디블랭은 233 기의 기병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보병은 불명) 전체 병력면에서도 기병 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약간 못한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232 년 6월 15일의 아그리디 전투는 병력상으로 보면 필린제리의 압승으로 끝났어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제국군의 기마 돌격은 효과적인 창병 방어 및 현지의 울퉁불퉁한 지형을 최대한 잘 활용한 장 디블랭의 군대에 의해 아무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그러는 사이 장의 아들인 발리앙 (Balian of Beirut) 가 제국군 진지뒤에서 소수의 병력을 가지고 불쑥 나타나자 동요한 제국군은 결국 퇴각해 버렸다. 장 디블랭으로써는 믿기지 않는 승리였고 필란제리와 황제로써는 아주 치욕스런 패배였다. 


 이 전쟁 이후에도 다툼과 알력은 계속되지만 사실상 롬바르 전쟁은 (1228 - 1243 년까지 보긴 하지만 실제 전투는 1231 - 1232 년에 주로 발생했다)  이 때 황제의 패배로 끝난거나 다름 없었다. 이후에 호엔슈타우펜 왕조는 예루살렘 왕국과 키프로스에 대해서 제한적인 권력만을 행사하게 된다. 유럽의 사정으로 추가적인 병력을 대거 파병하긴 힘들었기에 결국 여기까지가 한계였던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생대에 박쥐가 등장하면서 플로팔랑곱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enage-girl-years-reconstruct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