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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1250 년 이후의 정세 2





 3. 이집트의 혼란


 이집트의 새로운 술탄인 아이박은 단지 시리아의 아이유브조 술탄들에게만 도전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극상으로 권력을 잡은 만큼 필연적으로 권력 획득을 노린 새로운 반란이 있어날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반란이 1253 년 탈레브 (Hism ad-Din Thalab) 에 의해서 상중 이집트에서 발생하는데 이 반란을 진압한 것은 바이바르스와 가까운 맘루크 지휘관인 아크타이 (Aktai) 였다. 


 다행히 반란은 성공적으로 진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새로운 위협이 생겨나는데 그는 바로 에미르 아크타이였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맘루크 사이에서 힘을 모은 아크타이는 아이박 입장에서 이제 반란군보다 더 위험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이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아이박은 쿠투즈 ( Saif ad-Din Qutuz  ) 를 비롯한 몇몇 맘루크와 더불어 음모를 짰다. 즉 아크타이를 성채로 초대해 암살했던 것이다. 음모가 성공하자 아직 신중하지 못했던 술탄 아이박은 미래의 화근을 놓치는 실수를 범한다. 즉 자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한 아크타이 파 맘루크인 바이바르스 및 칼라운 (Qalawun al-Alfi) 이 재빨리 다마스쿠스 까지 도망친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가장 위협이라고 생각한 아크타이 일파를 처리하고 나자 아이박은 훨씬 안전해짐을 느꼈을 것이다. 아무튼 반대파를 숙청하고 아크타이의 영토를 차지하고 나자 이제 아이박은 분명이 이집트 전체의 단독 지배자가 된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 1255 년에는 다시 이집트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과 함께 안 나시르의 병력이 이집트로 처들어왔는데 여기엔 그전에 도망친 바이바르스와 칼라운이 함께였다. 하지만 결국 아이박은 이번에도 위기를 극복했다. 다만 어떻게든 위기는 극복했지만 사실 당시의 이집트의 정정이 매우 불안정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불안정한 정치 상황에도 불구하고 만약 아이박이 오래 살아서 자신의 자식에서 성공적으로 왕위를 이양했다면 새 왕조의 개척자가 될 수도 있었고 그러면 아이박 (Aybak) 왕조가 탄생했을지도 모르지만 운이 없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1257 년에 결국 암살당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의 뒤를 이은 11세의 아들은 그냥 새로운 실력자 쿠투즈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세이프 앗딘 쿠투즈 (Saif ad-Din Qutuz, 혹은 Kutuz 라고 하는 경우도 있음) 의 출생 배경에 대해서는 다른 맘루크들 처럼 극히 적은 내용만이 알려져 있으나 그마저도 여러가지 이야기가 존재한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몽골인에 의해 잡혀 노예로 팔렸다가 다시 이집트 노예 상인을 통해 이집트로 왔으며 결국 아이박에게 팔렸다는 것이다.


 아무튼 1253 년부터 아이박의 심복으로 2인자 자리에 오른 쿠투즈는 아이박이 일찍 죽으므로써 그의 자리를 계승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역시 주변에서 숫한 도전에 직면했으나 이를 이겨내고 자신의 권력 - 비록 길지는 않았지만 - 을 확립했다. 이 인물은 무엇보다 아인 잘루트 전투 (Battle of Ain Jalut) 에서 중요하게 언급될 것이다. 이 전투에는 사실 십자군이 전혀 참전하지 않았지만 십자군의 운명을 결정지은 결정적인 전투이기도 했다. 



4. 우트르메르의 혼란 


 1254년 이후엔 한동안 십자군과 주변 무슬림 술탄들과의 평화가 찾아왔다. 이는 부분적으로 루이 9세가 마지막에 이룬 협상의 결과이기도 했고 이집트와 시리아의 전쟁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이와 같은 기독교 - 이슬람교 사이의 평화 모드는 서로간에 앙숙으로 지내는 기독교 세력간에 내전을 벌일 절호의 기회였다.


 1250 년대 우트르메르의 크게 축소된 기독교 세력에서 전쟁이 발생한 것은 흔히 그러하듯 경제적인 문제였다. 갈등의 주요 대상은 바로 베네치아와 제노바였는데 이 두 해상 국가는 모두 이탈리아어를 쓰고 기독교를 믿었으나 다른 언어를 쓰고 다른 종교를 믿는 경우보다 더 사이가 나빴다. 왜냐하면 이권에서 첨예하게 대립했기 때문이었다. 


 이 두 도시 모두 동방 무역이 아주 중요했는데 그러기에 그 관문이 되는 아크레와 티레 같은 항구도시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되어 이 이탈리아 도시 상인들이 이곳에서 서로 세력 다툼을 벌인 것은 이상할 것은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결국 지중해 무역 패권을 노리던 제노바와 베네치아는 전쟁을 벌이게 되므로 우트르메르의 도시들도 이 전화에 휩싸였다. 1256 년에서 1270 년 사이 지중해에서 발생한 제노바와 베네치아 사이의 전쟁을 성 사바스 전쟁 (War of Saint Sabas) 이라고 부르며 여기에는 기사단들과 우트르메르의 도시들도 연관되었다. 


 우선 아크레에서 베네치아와 제노바 상인간의 무력 충돌이 벌어진 이후에 티레에서는 영주인 필립 몽포르 (Philip of Monfort) 가 제노바를 도와 베네치아 세력을 티레에서 몰아냈지만 이는 선택을 잘못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은 결국 베네치아의 승리로 끝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함대를 이끌고 돌아온 베네치아 함대에 의해서 1256 년 티레의 영주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 전쟁에서 티레와 구호 기사단은 제노바를 지원하고 성전 기사단과 자파는 베니스를 지원했다. 1257 년 베네치아의 제독인 로렌조 티에폴로 (Lorenzo Tiepolo) 는 아크레 항의 쇠사슬을 끊고 제노바 함대를 격파한 후 아크레를 장악하기 위해 격렬한 상륙전을 벌였다. 제노바의 발리스타와 석궁수들의 공격은 성공적이어서 이 전쟁은 교착상태에 빠지고 베네치아가 우세하긴 한데 아크레는 점령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이전 3차 십자군 때 처럼 아크레는 확실히 방어에 유리한 요새였다. 


 이 시기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은 사실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콘라드 4세의 아들 콘라딘 (Conradin) 이 왕위를 계승해야 했으나 이미 대공위 시대에 빠진 독일에서는 그의 왕위를 대부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역시 예루살렘에 간 적이 없었으므로 명목상 존재하는 왕이었다. (그는 예루살렘 국왕으로는 콘라드 3세 이다 )


 불운한 왕이었던 콘라딘은 독일왕의 지위는 세습하지 못하고 시칠리아왕 및 예루살렘 국왕, 그리고 슈바벤 공작의 지위만 세습했다. 1252 년 생인 그는 태어난지 2년만에 아버지인 콘라드 4세를 잃었으므로 신성로마제국은 사실상 황제가 없는 거나 다를 바 없던 (그리고 사실 실제로도 없던 것과 같은) 대공위 시대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불운한 삶을 살다가 16세인 1268 년에 적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콘라딘의 처형. 14세기 삽화    public domain) 


 사정이 이런데다 사실상 왕국의 남은 작은 파편 마저도 제노바와 베네치아의 전쟁통에 갈라진 상태였으므로 누군가 섭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 자리를 맡겠다고 나선 것은 키프로스 왕국의 위그 2세 (Hugh II of Cyprus) 의 어머니인 플레장스 (Plaisance of Cyprus) 였다. 만약 콘라딘이 없으면 다음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 계승 서열은 위그 2세였으므로 아들을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사실 이전 섭정이 그녀의 남편인 앙리 1세였다) 


 이 시기부터 콘라드 3세 (콘라딘) 은 그냥 명목상의 군주이고 심지어는 섭정조차 자신의 왕국에 큰 영향력이 없었다. 본래도 강력한 중앙 집권적 국가는 아니긴 했지만 강력한 국왕도 없다보니 - 사실상 국왕이 부재한 상황이 프리드리히 2 세 시대 이후 지속되었다 - 각 영주들이 개별 통치하는 현상이 더 굳어져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은 해체된 것과 같았다. 실제적으로 콘라드 3세 이후에 예루살렘 국왕은 그냥 키프로스 국왕의 겸직 명칭이었고, 예루살렘 왕국은 아크레 왕국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팔레스타인의 일부 해안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은 베네치아가 우세한 상황으로 전개되기는 했지만 손실도 없지는 않았다. 그것은 1259 년 제노바 인들의 도움을 받은 미카일 팔라이올로구스 (Michael Paleologus) 가 다시 비잔티움 제국을 수복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일시적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추방당했다. 다만 베네치아가 장악한 지중해의 섬들은 그대로 장악했고 새로 수복된 비잔티움 제국은 너무나 허약해서 이 제국이 200 년이나 더 지속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사의 초반과 중반부와는 달리 이제 비잔티움 제국은 더 중요하게 다룰 이유가 없으므로 아마 더 이상 언급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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