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6차 십자군에 대해서 설명하기에 앞서 남아있는 십자군 잔존 국가들의 상황과 프리드리히 2세에 대해 먼저 간략히 설명하겠습니다. 이전과 같이 편의상 경어는 생략합니다. 남은 십자군에 대해서는 속도를 내서 기술합니다. (주의 : 서적에 따라서는 5,6 차를 합쳐 그냥 5차로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서로 별도로 분류합니다)
1. 우트르메르 (Outremer) 북부의 13 세기 초 상황
우트르메르에 잔존 십자군 왕국인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기술한 대로다. 그렇다면 살라딘의 팔레스타인 정복 이후 남은 트리폴리 백작령과 안티오크 공작령에 대해서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 트리폴리 백국의 경우 마지막 뛰어난 지도자 였던 레몽 3세가 하틴의 전투 이후 사망하고 새로운 백작으로 레몽 4세가 즉위했다. 그는 안티오크의 보에몽 3세의 아들이기도 했다.
사실 레몽 3세는 남자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대자 (godson : 기독교에서 세례식때 입회하여 가르침을 주기로 한 남자아이) 인 안티오크의 레몽을 후계자로 양자 대신 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레몽 4세는 2년 후인 1189 년 다시 안티오크로 귀국했고 대신 둘째인 보에몽 4세가 트리폴리 백작으로 올랐다.
(1135 년 당시 우트르메르의 상황. 트리폴리 백국은 지금의 레바논 일부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Near_East_1135.svg )
그런데 이 시기 3 차 십자군 이외에도 이들 북부 십자군 국가들에게 꽤 큰 변화가 있었다. 우선 북쪽에서 아르메니아 인들의 왕국인 실리시아 아르메니아가 일어났다. 위치상 안티오크 공국과 가까웠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와 안티오크 공국은 꽤 복잡한 관계가 되었다. 우선 보에몽 3세의 장남인 레몽 4세는 아르메니아의 루벤 3세의 딸인 앨리스와 결혼해서 그 사이에 레몽 루펜 (Raymond - Roupen of Antioch) 를 두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의 루벤 3세 (Ruben III) 가 1187 년 죽게되자 그 왕위 (엄밀히 말하면 레오 2세가 칭왕하기 전이므로 아르메니아의 군주 자리였다) 를 두고 격렬한 대립이 일어나게 된다. 물론 아르메니아 왕위는 물론 트리폴리 백작위와 연관이 깊은 안티오크 공작가는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처음에는 안티오크 공작가가 유리한 것으로 보였지만 최종적인 승자는 바로 루벤 왕조의 레오 2세였다.
아르메니아를 넘보고 있던 야심가 보에몽 3세는 레오 2세가 반드시 넘어야 할 상대였다. 레오 2세는 1194 년 바그라스 (Bagras) 를 공격했는데 (이 성은 안티오크 공작령 북부에 있는데 살라딘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본래 이 성의 소유주였던 보에몽 3세와 성전 기사단은 이 성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레오 2세는 성을 돌려줄 것 처럼 위장해 보에몽 3세를 협상장으로 끌어낸후 사로잡았다.
결국 보에몽 3세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이 때 협상을 주도했던 건 새로 예루살렘 국왕이 된 앙리 1세 (상퍄뉴 백작으로는 앙리 2세) 였다. 이후 1199 년에 레오 2세는 스스로 아르메니아 국왕 레오 1세로 즉위한다.
한편 보에몽 3세가 1201 년 죽게 되자 장남 레몽 4세의 아들 (레몽 4세는 1199 년 사망) 레몽 루펜과 보에몽 3세의 둘째 아들 보에몽 4세 사이의 대립이 발생하게 된다. 보에몽 4세는 내전에서 승리해서 안티오크와 트리폴리 양쪽을 지배했는데 레몽 루펜은 그의 재위 기간 안티오크 공작령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특히 외가 쪽인 아르메니아의 레오 1세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현실적으로는 보에몽 4세는 1205 년에서 1208 년, 그리고 1216 년에서 1219 년 사이 레몽 루펜에게 안티오크 공작위를 양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219 년 그가 죽고 난 후에는 보에몽 4세가 남은 유일한 지배가 되었다. 이후 이 안티오크 - 트리폴리의 북부 십자군 국가는 몽골의 침입 전까지 하나의 국가로 존재하게 된다. 그들의 왕조는 보에몽 7 세와 그의 누이인 루시아에서 끝나게 된다.
(안티오크 공작령 계승도. 마지막에 보에몽 4세 이후에는 트리폴리 백작령을 합치게 된다. )
따라서 5-6 차 십자군 무렵에는 북부 십자군 국가는 보에몽 4세의 치세였다. 남쪽의 예루살렘 왕국이 크게 축소된 바람에 이제 이 남북 십자군 국가는 오히려 북쪽이 좀 더 큰 규모였으나 어느쪽이든 독자적으로 생존하기는 작은 국가였다. 따라서 3대 기사단과 유럽에서 부정기적으로 오는 십자군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2. 프리드리히 2세와 욜랑드
한편 장 드 브리엔은 70 에 달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5차 십자군의 뼈아픈 패배에도 그는 계속 건재했던 것이다. 이전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들이 단명한 것을 생각하면 그는 꽤 장수한 국왕이었다.
장 드 브리엔은 새로운 지원을 약속받고 아직은 어리지만 딸 욜랑드에게 든든한 배필감을 일찍부터 찾아 주겠다는 생각으로 유럽으로 귀국했다. 여기서 장은 튜튼 기사단장 헤르만 폰 살차로부터 흥미로운 제안을 받는다. 욜랑드 (1212 - 1228) 가 당시 10대 초반에 불과하지만 유럽에서 가장 잘나가는 돌싱과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요즘말로는 돌아온 싱글이지만 사실대로 말해 홀아비가 된 인물은 바로 프리드리히 2세 였다. 프리드리히 2세는 1194 년 생이므로 1220 년대에는 30 대 전후였다. 요즘 같으면 바로 감옥행이겠지만 당시에는 정치적 이유에서 꽤 나이차이가 나는 결혼도 적지 않았다. 일단 장 드 브리엔이 그런 경우였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나이도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자리는 딸의 미래를 생각할 때 매우 좋은 자리라고 생각되었기에 장 드 브리엔은 헤르만 폰 살차를 통해 자리를 주선했다. 당시 튜튼 기사 단장은 황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훗날 프러시아로 알려질 발틱해 근방의 영토 정복 사업을 벌였기 때문에 황제와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황제는 혼쾌히 이를 승락하고 (전 아내인 아라곤의 콩스탄스는 1222 년 사망. 그 사이 아들이 하인리히 7세이지만 사실 황제로 즉위는 못했다) 1225 년에 13살에 불과한 욜랑드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식이 끝나자 황제의 진정한 의도가 드러났다. 황제는 예루살렘 왕국을 자신의 속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는 자동으로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자리에 올랐으며 이미 늙고 기력 없는 장 드 브리엔은 과거의 인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실 프리드리히 2세의 이와 같은 행보는 그가 꿈꾸던 로마 제국의 재건 사업과도 관련이 깊었다. 이미 한번 소개했지만 프리드리히 2세와 더불어 그가 생각한 신성 로마 제국이란 어떤 것이었는지를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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