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late

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교해본 십자군 전쟁사 - 2 권




 최근에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가 3권까지 완간이 되어서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저도 허접하게나마 십자군 역사를 연재 중이라 제법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죠. 간단히 비교를 해보면 이렇습니다. 


 1. 십자군 성채와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 


 일단 2권에서 가장 괜찮게 읽은 부분은 십자군 성채 및 이를 방어하는 핵심이었던 기사단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름 상세한 설명이 곁들여져 있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 2차 십자군의 병력은 ? 


 2 차 십자군의 병력 규모를 추산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들이 다마스쿠스를 공략할 시점에서 약 5만 정도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다만 이는 루이 7세와 콘라드 3세가 출발 당시 가진 병력 보다 많고 - 아무리 예루살렘 왕국 자체 병력이 있다고 해도 그 숫자는 많지 않았을 것임 - 사실 중간에 손실된 병력도 많기 때문에 아마도 이보단 적은 편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1차 십자군과 비교해서 크게 열세였을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왜냐면 1차 십자군도 안티오크 공방전 이후에는 병력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죠. 


 시오노 나나미는 2차 십자군의 병력이 기병 4050명과 보명 6000 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산했습니다. 정확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독일과 프랑스 군주가 이끌 수 있는 병력과 예루살렘 왕국이 내놓을 수 있는 병력이 제후들의 연합인 1차 십자군을 크게 넘어서는 수준이 아니었던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적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건 사실입니다.


 이 부분 내용이 1권과 다른 건, 1권에서는 일개 백작이나 공작도 수만명의 병력을 편성이 가능한데 2차 십자군 이후로는 이들을 대표하는 군주들이든 제후든 간에 이보다 현저히 작은 병력을 이끌고 십자군에 참가한다는 점입니다. (예외는 프리드리히 1세 바바로사) 사실 중세 제후 중에서 거의 국가급의 영토를 지닌 영주라고 해도 1만 이상의 병력을 편성한다는 (실 전투병력으로 계산했을 때)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3. 십자군의 이집트 침공 및 시리아의 침공 부분 오류 


 십자군 이야기를 읽으면서 갑자기 설명이 건너뛰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내용은 1163 년 부터 1169 년 사이 아말릭 1세 (이  책에서는 아모리 1세) 에 의해 여러차례에 걸쳐 행해진 이집트 원정입니다. 이를 막기 위한 누레딘의 노력이 바로 시르쿠에 의한 이집트 원정이었는데 그 조카인 살라딘은 1차 원정 때 부터 쭉 숙부 옆을 지켰고 사실상 군대의 반을 지휘하는 부사령관 역활까지 올라갔기에 시르쿠 사후에 어렵지 않게 그 지위를 승계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이전에 쓴 포스트들을 참조 http://blog.naver.com/jjy0501/100102876231  ) 


 하지만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에는 이 내용이 완전히 누락된 정도가 아니라 잘못 설명되어 있는 부분도 있는데 마치 1168 년에서야 누레딘이 이집트 내의 정변을 노리고 군대를 파견할 결심을 했고 1169 년에야 시르쿠와 살라딘이 처음 이집트를 침공한 것처럼 적고 있습니다. (2권 242 에서 244 페이지 / 이것이 명백히 잘못된 내용이라는 점은 이전에 제가 쓴 내용을 참고하면 됩니다. 


 아니라면 위키 백과를 참조해도 됩니다. 




 살라딘은 1164 년 처음 시르쿠의 부관 자격으로 이집트 원정군에 소속되었으며 당시 나이는 26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5년간 군사적 경험과 더불어 함께 동고 동락한 군대의 지지를 모을 수 있었기에 살라딘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집트에서 실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본래 누레딘의 부하였던 병사들이 살라딘을 지지하진 않았겠죠. 


 앞서 군대의 규모 문제는 문헌마다 혹은 역사가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지만 이 부분은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오류 같습니다. 문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거든요. 


 4. 마누엘 1세는 예루살렘 왕국을 외면했을까 ? 


 2권 138 페이지 하단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풀크 국왕 부터 아말릭 1세) 들이 비잔티움 제국과 협력한 것은 만약의 경우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으나 비잔티움 제국은 그런 생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은 부분적으로는 맞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100% 사실이라곤 하기 어려운게 실제로는 지원했기 때문입니다. 1163 년의 알 부카이아 전투와 1164 년의 하림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스 칼라마노스 지휘하에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사실 이 장군은 하림 전투에서 누레딘의 포로가 되었지만)  ( http://blog.naver.com/jjy0501/100103163674  참조) 


 그리고 더 결정적인 것은 재앙으로 끝난 1169 년의 다미에타 상륙 작전이 사실 비잔티움 함대의 지원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  http://blog.naver.com/jjy0501/100103514272 참조) 물론 마누엘 1세는 여기저기 전쟁을 수행하느라 대부분은 십자군을 도울 수는 없었으며 더구나 1176 년 미리오케팔론 전투 이후 입은 엄청난 손실 때문에 이후에는 더 도울 수 없었다는 설명이 맞을 듯 합니다. 


 제가 십자군 전쟁사에서 설명했듯이 예루살렘 왕국이 몰락하는 경우 그 다음은 어렵사리 다시 획득한 안티오크를 포함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가 그대로 누레딘과 단독으로 마주하게 되므로 이런 일은 피해야했고 따라서 비잔티움 제국은 기회가 된다면 실제로 십자군을 돕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십자군 군주들도 이런 전후 사정은 알고 있었기에 협력했던 것이지 무조건 비잔티움 제국이 도와주리라는 기대만으로 협력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공동 방위 전선을 펼친 것은 장기 왕조와 누레딘이라는 공통의 적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5. 십자군 사이사이에는 병력 지원이 없었을까 ? 


 2권 155 - 156 페이지 사이에는 1118 년에서 1148 년 사이 30 년 그리고 3차 십자군 까지 약 40 년 정도 중간에 새로운 병력이 대규모 투입된 후 곧 돌아가버려 십자군 국가들이 심각한 병력 부족에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말은 정확히 사실입니다. 


 다만 이렇게만 하면 다소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부분이 중간 중간에 성지 순례를 겸한 마이너 십자군이 상당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 십자군 전쟁사에서도 이들을 잠시 일부만 소개한 바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아예 설명을 전부 생략하다 시피 해버렸기 때문에 십자군이 수십년에 한번만 오는 것으로 오해할 우려가 다소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마 제 연재 포스트를 보신 분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뭐 이렇게 이야기 하면 비판만 하는 듯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그럭저럭 균형 잡혔다고 생각됩니다. 또 기사단 이야기나 성채 이야기는 나름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사실 제가 쓰는 십자군 전쟁사도 그렇지만 방대한 내용을 적다보면 오류가 없을 래야 없을 수가 없는 게 정상입니다. 전반적인 내용은 나쁘지 않고 국내에 다른 읽을 만한 십자군 서적이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필독서까진 아니더라도 읽어볼 수는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다음에 3권 내용 비교를 해보겠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