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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알비주아 십자군 4






 7. 2차 전쟁의 발발


 1213 년의 뮤레 전투는 사실 카타리파 대 십자군의 전투가 아니라 서로 카톨릭 세력임을 자부하는 아라곤 왕국과 프랑스 십자군의 전투였다는 점에서는 의외이지만 남북 프랑스 세력의 대립과 왕권 강화라는 역사적 측면에서 보면 납득이 가능한 알비주아 십자군 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였다. 


 사실상 이 전투후 툴루즈 백작과 같은 남부 토착 세력을 몰아낸 북부 프랑스 세력은 다시 프랑스 왕실 - 특히 필립 2세 - 의 간섭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랑그도크에서 가장 노른자위 땅인 툴루즈 백작령을 가지고 아웅다웅 하던 도중 중 원래 주인인 레몽 6 세는 같은 이름의 아들인 레몽 (나중에 레몽 7세) 와 함께 다시 툴루즈로 귀환했다. 1216 년 4월의 일이었다. (서유럽에서는 이렇게 부자간에 이름이 같은 경우가 드물지 않은데 이로 인해 기술하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을 헷갈리게 하는 문제가 있다. ) 


 그야 말로 반역의 레몽 부자의 귀환이었는데 이는 툴루즈는 물론 랑그도크 지방 전역에서 큰 환영을 받았다. 많은 토착 귀족들은 자신들을 밀어낸 북부 프랑스 기사와 귀족에 대해서 반감을 품었고 부득이 하게 잠시 개종한 카타리파 역시 모반의 기회를 노리기는 마찬가지 였다. 여기에 저항의 상징인 레몽 부자가 귀국하자 반역은 마른 벌판에 불길이 퍼지듯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카타리 파의 상징은 노란 십자가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지   저자 Image created by R Neil Marshman 15 June 2006   )


 반란군은 프랑스 남부의 도시인 보케르 (Beaucaire) 에서 처음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다. 1216 년 5월에 이 도시를 포위한 반군은 3개월에 걸친 공성전 끝에 도시를 함락할 수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 지역 도시와 성들은 꽤 요새화 되어 있어 함락시키는 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한 경우들이 많았다. 


 당시 이 소식을 듣고 시몽 드 몽포르는 급거 보케르 성을 구원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결국 반군에 격퇴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209 년과는 달리 거의 허를 찔린 상태로 십자군이 이미 해산된 다음이었기 때문에 몽포르 혼자 거느린 군대만으로는 한계가 이었다. 1216 년 당시의 전세는 이렇게 반군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이 때 보케르 전투에서 시몽 드 몽포르를 패퇴시킨 건 약관 19세의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아들 레몽이었다. 후일 레몽 7 세가 되는 그는 아라곤 왕국의 알폰소 2세 (카톨릭 왕 페도로 2세의 전왕) 의 딸과 결혼해 아라곤 왕국에 배경이 있었다. 그는 마르세이유 방면으로 상륙해 보케르를 8월 24일 함락시키면서 그 명성을 처음 알리기 시작했다. 




 (레몽 7 세의 중세 삽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몽포르는 툴루즈에서 반란의 확산을 막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역시 그해 말 다시 루르드 (Lourdes) 에서 반군에 다시 패배하면서 고배를 마시게 된다. 사실 시몽드 몽포르는 1215 년 나르본 공작 겸 툴루즈 백작이 되면서 한창 잘나갔던 시기에서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1160 년 생이니 당시 56 세의 프랑스의 가장 유력한 영주였던 그가 19세의 청년에게 패배한 셈이었다) 필립 2세에게 툴루즈를 마지 못해 양도하기로 결정한 1216 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사실상 이미 툴루즈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젊은 레몽이 툴루즈를 향해 진군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에 다시 시몽 드 몽포르는 굴욕적으로 툴루즈에서 후퇴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다음해인 1217 년 9월에 툴루즈는 완전히 레몽 의 손안에 떨어지게 된다. 시몽 드 몽포르는 그해 다시 툴루즈를 포위하려 했지만 충분한 병력이 없어 결국 중단하고 말았다. 확고한 정통파 신앙을 가지고 이단 (주로 카타리파) 를 산채로 불태우던 시몽 드 몽포르가 없어지자 다시 남부에는 이단 종파들이 양지로 나오게 되었다. 이들은 툴루즈 성문을 활짝 열고 레몽 부자를 맞이했기 때문에 레몽은 싸우지도 않고 성을 되찾았다.  


 그럼 왜 이시기에 다시 바로 알비주아 십자군이 1209 년 처럼 대거 소집되지 않았을까 ? 그것은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번째 이유는 바로 교황권의 절정을 이룩했다는 평가를 받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1216 년 7월 16일 승하한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이틀 후 콘클라베 (conclave, 잠그는 방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교황을 선출하는 비밀회의) 에서는 연로한 첸치오 사벨리 (Cencio Savelli) 가 새교황 호노리오 3세 (Honorius III) 로 선출되었다. 


 한창 보케르 전투가 한창일 때 즉위한 호노리오 3세는 이단 척결에도 꽤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당시엔 온통 5차 십자군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툴루즈에서 발생한 사소한 반란은 성도 예루살렘 회복을 위한 십자군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호노리오 3 세가 다시 카타리파 이단 척결에 관심을 가지는 건 훨씬 후에 일이다. 


 두번째로 더 중요한 일은 바로 알비주아 십자군의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시몽 드 몽포르가 교황과 프랑스 국왕 필립 2세로 부터 아무 지원도 없이 툴루즈 공격에 나섰다가 전사한 것이었다. 이로써 알비주아 십자군은 한동안 구심점을 잃게 된다. 




 8. 툴루즈 공방전



 1216 년에서 1217 년사이의 굴욕을 갚기 위해 절치 부심하던 시몽 드 몽포르는 1218 년 봄 새로운 툴루즈 본성 공격을 계획했다. 1218년에는 다시 어느 정도 병력을 모은 알비주아 십자군이 다시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뭉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비주아 십자군이 툴루즈를 포위했을 때 시몽 드 몽포르는 실망스런 사실을 발견했다. 


 몽포르가 이성을 떠난 1217 년에 본래 견고한 툴루즈 성을 훗날 쉽게 공략하기 위해 성벽을 일부 파괴시킬 것을 지시했으나 그가 재차 공격을 시도할 때 쯤 성벽이 모두 무사히 건재한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툴루즈의 백성들이 그의 명령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이 견고한 요새가 건재하다면 공성전은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몽포르는 다시 한번 힘든 싸움을 직감했을 것이다.  


 여기에 이미 수많은 카타리파를 산채로 불태워 증오의 대상이 된 시몽 드 몽포르가 다시 툴루즈를 점령하는 일을 막기 위해 툴루즈의 카타리파와 토착 귀족들은 남녀 노소 할 것 없이 알비주아 십자군과 목숨을 받쳐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차피 진다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게 뻔했으므로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각오가 이 처절한 전쟁을 수십년간 더 끌고간 원동력이 되었다. 


 일단 성주위를 포위한 알비주아 십자군은 수많은 투석기를 설치하고 고양이라고 부르는 이동식 방어장치를 이용해서 성벽을 공략하려 들었다. 이와 같은 시도가 이어질 때 마다 성벽에서는 투석기를 이용해 원거리의 적에 대응 사격을 하고 성벽 아래로 돌을 떨어뜨렸다.


 1218 년 6월 25일, 초여름에 성을 공략하던 중 시몽 드 몽포르는 투석기에서 날라온 돌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기록에 의하면 툴루즈 성에서는 여자와 아이들까지 동원되어 투석기로 돌을 발사했다고 되어 있는데 시몽 드 몽포르도 여기에 맞아 숨졌다고 한다. 당시 일단 이단이라고 하면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죽이던 시몽 드 몽포르 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다.


 개종을 하지 않고 버티던 카타리파 입장에서는 여자든 아이든 간에 성이 함락되고 포로로 잡히는 순간 고통스럽게 화형대에 매달릴 것이었기 때문에 죽기 살기로 투석기든 손이든 잡히는 대로 돌을 집어 던졌고 이것이 반란에 성공한 첫번째 이유였다. 



 (투석기에 날아온 돌에 맞아 쓰러지는 시몽 드 몽포르 Francois Guizot (1787-1874), The History of France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Year 1789, London : S. Low, Marston, Searle & Rivington, 1883, p. 515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알비주아 십자군의 가장 중요한 지도자가 쓰러지자 결국 한동안 알비주아 십자군은 구심점을 잃어 버렸다. 하지만 십자군 자체가 완전히 중단되지는 않았다. 일단 시몽 드 몽포르의 세 아들 중 맏이였던 아모리 ( Amaury VI de Montfort) 가 이전 같은 추진력은 없었지만 아버지의 지위를 이어받아 알비주아 십자군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이단 척결 보다는 남쪽의 영토에 더 관심이 많은 필립 2세 역시 이 과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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