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1249 년 후반기의 상황
뜻하지 않게 아주 간단하게 1249 년 6월에 다미에타를 함락시킨 십자군은 5 차 십자군으로부터 적어도 한가지는 배웠다. 그것은 나일강이 범람할 때는 삼각주 안쪽으로 진군하면 안되다는 사실이었다. 따라서 루이 9세와 그의 십자군은 여기서 거의 5-6 개월 정도 발이 묶인 채로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사실 나중을 생각해 보면 이는 루이 9세와 7 차 십자군의 파멸을 단지 조금 뒤로 연기시켰을 뿐이었지만 당시로써는 적절한 판단이었다.
이 판단은 또 다른 의외의 상황을 만나 한동안은 더 적절한 판단으로 보였다. 그것은 이집트의 불안한 정권 교체 문제였다. 이미 십자군 전쟁사를 통해서 이집트의 중세사를 얼핏 살펴본 분들이라면 당시 이집트의 권력 승계 방식이 선출제도 세습제도 아닌 점령제라는 점을 간파했을 것이다. 즉 세습제라고 해도 사실상 반정도는 자체 무력으로 계승하는 방식이었고 대개 그런 방식으로 몇 대 이상 계승이 되는 경우도 별로 없었기에 전 통치자가 사망하면 이집트 내부는 심각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곤 했다.
당시에도 이점은 마찬가지 였는데 물론 당시 이집트는 아이유브 왕조의 지배하에 있기는 했지만 알 카밀 이후로는 사실상 무력을 통해 점령해도 상당수 술탄들은 몇년 못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앗 살라흐 역시 단명한 선대 술탄을 몰아내고 1240 년에 무력으로 술탄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대로인데 그의 경우에는 그래도 9 년이라는 당시로써는 비교적 긴 시간 술탄자리에 있었으나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어 1249 년 후반에는 상태가 꽤 위중해졌다. (참고로 그는 1205년 생으로 알려져 있어 당시 40 대 중반이었을 것이지만 질병에 걸리면 거의 자력으로 회복하는 경우를 빼고는 치료 가능성이 없던 시절이기도 했다)
결국 1249 년 11월 22일 알 만수라 (Al Mansurah) 에서 앗 살리흐가 사망하자 이집트의 정치 상황이 매우 불안정해졌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아들로 투란샤 ( al-Malik al-Muazzam Ghayath al-Din Turanshah ) 가 있었으나 안정적인 권력 승계가 가능할지는 오직 신만이 아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시리아 방면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집트의 방어를 담당한 장군은 파흐르 앗 딘 (Fakhr ad Din Yussuf ) 였는데 이 경우 일반적으로 이집트가 하극상이 만연된 상황만 아니었다면 투란샤의 순조로운 왕위 계승이 예상될 수 있지만 문제는 당시가 이집트가 쿠데타나 혹은 하극상이 일반화된 시대였다는 점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나일강이 물이 빠질 때쯤 이 소식을 들은 루이 9 세와 십자군 수뇌부는 지금이 하늘이 내린 기회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모든 협상의 가능성을 접어두고 이집트 자체를 접수하기 위해 카이로로의 진격을 시작했다.
11. 알 만수라 전투 ( Battle of Al Mansurah 1250 )
십자군의 일차 목표는 카이로로 가는 길에 이집트가 건설한 요새도시인 알 만수라 였다. 이 도시는 비교적 새로 건설된 신도시로 1219 년 알 아딜 1세의 지시로 건설된 도시였다. 7 차 십자군을 제외하면 이 도시는 욤키프르 전쟁 (4차 중동전쟁, 1973년) 당시에 이스라엘 군과 이집트 군의 공중전의 무대가 된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아무튼 알 아딜이 이 도시를 건설한 목적은 다미에타에서 카이로로 바로 적군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수도 카이로의 방어를 강화시킬 목적이었다.
알 만수라는 카이로에서 동북쪽으로 120 km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으며 다미에타항이 있는 나일강의 지류 쪽에 건설되어 있는데 아무튼 다미에타에서 카이로로 가려면 이 요새 도시를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도시까지 가는데도 여러 차례 수로를 지나야 했으므로 그렇게 일이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실제로 6개월 정도 십자군이 다미에타에 틀어 밖혀 있었던 동안 이집트가 권력 투쟁에만 골몰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미에타 함락 이후 이집트에는 국가 비상령이 선포되었으며 (al-Nafir al-Am النفير العام ) 이로 인해 이집트 군 역시 충분히 대비할 준비를 마쳤던 것이다. 그들은 지형에 익숙했으므로 현지 지형에 어두운 십자군을 상대로 매우 효과적인 게릴라 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 방식은 5차 십자군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효과적임이 판명되어 십자군의 진격을 크게 늦추는 데 성공했다.
적지 않은 십자군이 죽거나 포로가 되어 카이로로 압송되었으므로 루이 9 세는 명령을 내려 전체 군대가 완전히 도하하기 전 전위 부대가 앞서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이 조치는 특히 알 만수르 앞에 있는 아쉬뭄 운하 (Canal of Ashmum, 오늘날엔 Albahr Alsaghir 로 알려짐) 를 도하할 때 중요했다. 이 운하는 비교적 큰 운하로써 십자군이 이 운하를 도하할 무렵에는 사실 해가 넘어가 1250 년 2월이 된 시점이었다. 루이 9세가 우려했던 일은 운하를 도하하는 도중 군대가 양분되어 각개 격파 되는 것이었는데 이 불길한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일단 십자군의 전위 부대를 담당한 것은 이런 명령에는 적합하지 않은 루이 9세의 성미 급한 동생인 로베르 1세 ( 아르투아의 로베르 Robert I of Artois, count of Artois ) 와 성전 기사단, 그리고 영국에서 십자군을 이끌고 합류한 솔즈베리의 윌리엄 ( William of Salisbury ) 였다.
로베르 1세는 야간에 도하에 성공한 즉시 적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기습 공격을 주장했다. 다른 지휘관들이 이를 말리자 로베르 1세는 이들을 비겁자로 몰아갔으므로 마침내 그런 류의 비난을 참지 못하는 기사들은 여기에 마지못해 동조하고 말았다.
그들은 알 만수라에서 3 km 정도 떨어진 지데일라 (Gideila) 에 있는 이집트군 기지를 공격해 매우 성공적인 기습 공격을 달성했다. 이 당시 기습으로 에미르이자 사령관인 파흐르 앗 딘이 사망했으므로 사실 이 기습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셈이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도 작은 성공이 더 큰 실패를 위한 첫걸음인 경우는 적지 않다. 이 때 역시 그런 경우였는데 이제 로베르 1세는 더 의기 양양해서 바로 알 만수라 요새를 점령할 것을 주장했다. 기습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역시 다른 지휘관들은 반대했으나 왕의 동생인 로베르가 계속 주장했으므로 여기에 따를 수 밖에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에 1250 년 2월 11일 아침에 십자군의 기습 공격이 이루어졌다. 십자군의 생각으로는 아마도 지휘관을 잃은 이집트 군이 혼란에 빠졌기를 기대했겠지만 사실 이들이 한 일은 이집트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준것이 었다. 아직 투란샤가 카이로로 당도하기전 에미르 파흐르 앗 딘이 죽자 이 때 바로 처음으로 백인 노예 병사로 흔히 알려진 맘루크 (Mamluk) 가 역사상 처음으로 이집트의 최고 사령관 자리에 올랐던 것이다.
그들은 파리스 앗 딘 아크타이 (Faris Ad - Din Aktai) 와 바이바르스 알 분두크다리 ( al-Malik al-Zahir Rukn al-Din Baibars al-Bunduqdari ) 였는데 바로 이 전투에서 바이바르스가 그 명성을 크게 떨치는 계기가 된다. 바이바르스는 즉석에서 십자군들을 궤멸시킬 함정을 생각해 냈는데 자신들이 우세하다는 십자군들의 믿음을 이용해서 이들을 파멸로 이끄는 방식이었다.
십자군이 2월 11일 아침 만수라 요새에 당도했을 때 그들은 문이 그대로 열린채로 요새가 버려진 것을 확인했다. 사실 대단히 수상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돌격하는 십자군 기사들의 머리 속에서는 다미에타에서 그랬던 것처럼 손쉬운 승리가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이들이 도시 안으로 들어오자 문이 잠기고 숨어있던 이집트 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벌어진 일은 거의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도시의 주민들까지 지붕에서 던질 수 있는 모든 것과 돌을 던지며 공격했으므로 생소한 도시 안에 갖힌 십자군은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지휘관 급인 로베르 1세 및 솔즈베리의 윌리엄은 물론 이 와중에 전사했다. 이 당시 투입된 성전 기사단은 5명을 제외하고 모두 전멸하고 말았다. 십자군의 엄청난 참패였다.
(알 만수라 전투를 그린 14 세기 중세 삽화. 그림으로만 보면 루이 9세가 대패한 것 처럼 보이진 않는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루이 9세는 이 참극을 들은 후 알 만수라 요새를 공격해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긴 했지만 앞으로의 일이 막막했을 것이었다. 사실 이 정도 상황이 되었다면 여기서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퇴각하는 것이 바람직했으나 뛰어난 군주였던 루이 9 세 마저도 여기서는 상황을 크게 오판해서 결국 재앙으로 한발 더 깊숙히 빠져들었다.
즉 루이 9세는 아직도 투란샤가 실각하고 이집트가 내분에 빠지는 상황을 기대하면서 그 자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력한 라이벌이 될 수 도 있던 파흐르 앗 딘 유수프는 이미 십자군이 제거한 상태였고 나중에 왕위를 노릴 다른 라이벌들은 아직 그 대항마가 될 수 없었다. 덕분에 투란샤는 큰 무리없이 왕위 계승이 가능한 상태였고 즉위 첫 과제로 일단 십자군 부터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투란샤는 1250 년 2월 27일 마침내 알 만수라에 도착했고 이집트 전체의 술탄으로 인정받음과 동시에 침략자인 프랑크인들을 이집트 땅에서 몰아낼 일련의 작전에 착수했다. 따라서 2월 11일 아직 퇴각할 기회가 있었을 때 퇴각하지 않은 판단은 루이 9세가 한 가장 큰 실수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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