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알 카밀
알 카밀 ( al-Malik al-Kamel Naser al-Din Abu al-Ma'ali Muhammed 1180 - 1238) 은 알 아딜의 아들 중 하나로 1218 년 당시에는 38 세였다. 이 정도 나이라면 당시 기준으로 한창 때 이므로 그가 만약에 다른 전제 왕정 국가에서 처럼 유일한 후계자였다면 그다지 힘들지 않게 권력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쿠르드 족 왕조인 아이유브 왕조는 기존에 있던 투르크 인들과 비슷한 계승 방식을 선택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자 계승이든 아니든 간에 한사람이 모든 영토를 물려 받는 게 아니라 각 영지를 자식과 형제들에게 분할하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자식들이 사이좋게 영토를 분할하기 보다는 서로 가진 것을 빼앗기 위해 반복해서 싸움을 되풀이 하게 만들었으므로 주기적으로 중세 이슬람 제국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와 같은 폐단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제국 역시 형제끼리 피튀기는 혈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잔인성에 대해서 만큼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는데 다만 내전이 줄어든 만큼 왕족 및 그와 연관된 소수의 사람만이 희생되었다는 데서 위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알 카밀 역시 그의 아버지 알 아딜이 겪은 것과 동일한 문제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 아딜이 73 세에 죽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형제들은 문제되지 않았지만 대신 알 카밀의 형제들이 문제되기 시작한 것이다. 알 카밀은 이집트에 그 세력 기반이 있었는데 살라딘 시절부터 아이유브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다마스쿠스는 그의 형제 알 무아잠 ( Al-Mu'azzam 'Isa Sharaf ad-Din ) 이 다스리고 있었다.
따라서 그 다음 일어날 일은 다마스쿠스의 시리아 세력과 이집트의 알 카밀 세력간에 내전이 발생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시기가 참으로 미묘하게도 5차 십자군이 다미에타 항을 공격하는 시점이었다. 따라서 알 카밀은 고민한 끝에 우선은 이집트와 자신이 통치하는 지역의 방위를 튼튼하게 하는데 우선 촛점을 마췄다.
(프리드리히 2세와 알 카밀. 왼쪽이 프리드리히 2세이고 오른쪽이 알 카밀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하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만 흘러갈 순 없었다. 그가 다미에타의 방위에 힘쓰는 사이 카이로에 정변이 일어나 그의 동생을 술탄으로 옹립하려는 정변이 일어났고 그 결과 알 카밀은 병력을 카이로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 정변을 막은 후에도 다마스쿠스의 알 무아잠은 건재했다. (1219년)
따라서 십자군과 다른 술탄들, 그리고 이집트 내부의 정적들에 둘러싸인 채로 위험한 소모전을 치루기 보다는 알 카밀은 큰 것을 양보하는게 낮겠다는 판단을 했다. 즉 성도 예루살렘을 십자군에 양도하는 조건으로 평화 조약을 맺기로 한 것이다.
십자군의 명분이 성지 탈환이었으므로 이런 조건을 내건다면 사실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5차 십자군이 성지와 주변 지역을 탈환하는 선에서 1219 년 끝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일은 훨씬 복잡하게 진행된다.
13. 펠라기우스
아무래도 5차 십자군에서 신은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5차 십자군이 성지 탈환 하나만을 목적으로 했다면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저런 이유와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그렇게 일이 쉽게 해결될 순 없었다.
이야기를 다시 알 아딜 사망 직후인 1218 년 하반기로 돌리면 당시 알 카밀은 다미에타를 열심히 방어하고 있었다. 십자군은 여러 겹으로 요새화된 다미에타의 외각지역과 해안가의 교두보만을 점령했을 뿐이었다. 좁은 해안가의 교두보에 갖힌 십자군의 모습은 마치 1169 년 당시 다미에타 포위나 아니면 3차 십자군에서의 아크레 포위를 보는 듯 했다.
하지만 십자군에게는 애석하게도 교황은 이런 십자군을 돕기 위해 5차 십자군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린다. 그것은 광신적인 추기경 펠라기우스 (Pelagius) 를 십자군의 종교적인 지도자로 파견한 것이다. 이 인물은 1213 년 콘스탄티노플로 파견되어 동서 교회의 통합을 추진하는 중대한 과업을 담당했지만 결과적으로 동방 정교회를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두터운 신임 때문인지 이번에는 5차 십자군을 지휘하는 임무를 띄고 다미에타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성무 이상으로 세속에 관심이 많았으며 무엇보다 오만하고 독단적이었다. 이런 인물에게 막강한 권한을 부여해 그렇지 않아도 지휘권이 통일되지 않은 5차 십자군에 보낸 것은 결과적으로 재앙이었다.
펠라기우스는 다미에타에 당도하자 마자 예루살렘 국왕 장드 브리엔 보다 자신의 지위가 더 높다고 하여 그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지휘권에 일일이 간섭하므로써 십자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이끌어 갔다.
이와 같이 펠라기우스의 등장이 인재 (人災) 였다면 1218 년 10월 이후로 발생한 폭풍과 홍수, 그리고 전염병은 그야말로 천재(天災) 였다. 이 사건은 마치 아크레 포위전의 재판과도 같았는데 엄청난 폭풍과 홍수가 지나간후 전염병이 크게 유행해서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거둬갔다.
1219 년에 이르러 이 전쟁을 계속해야 겠다고 믿은 광신적인 추기경 펠라기우스는 다미에타 공세를 명령했다. 적지 않은 십자군이 전염병으로 죽었지만 다행히 (?) 이 전염병이 다미에타의 수비군에도 악영향을 미쳤으므로 지금이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다미에타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진 시점에서 사실 알 카밀은 앞서 말한 궁정 음모를 처리하기 위해 카이로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라의 은총이었는지 결국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완전히 점령하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반대로 알 카밀 역시 십자군을 완전히 몰아낼 수 없었다.
1219 년의 여름이 찾아오고 다미에타 포위전이 1년이 되가자 알 카밀은 이 의미없는 소모전을 끝내고 일단 자신이 가진것을 온전히 지키고 싶은 심정이 간절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평화 협상 (단 예루살렘 성벽의 일부는 파괴시킬 작정이었다) 을 맺으려고 했다. 어쩌면 그렇게 해서 십자군의 시선을 다마스쿠스의 알 무아잠 쪽으로 돌리려는 의도도 있었는지 몰랐다.
이와 같은 소식이 십자군 진지에 당도했을 때 이를 강경하게 거절한 것은 바로 펠라기우스 였다. 그는 이집트를 모두 점령하고 말겠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펠라기우스가 생각하기에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은 (당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이 무슬림에게도 중요한 도시라는 사실을 추기경 역시 알고 있었다) 그 만큼 알 카밀이 궁지에 몰려있기 때문이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지금이 공격의 호기라는게 펠라기우스의 생각이었다.
더구나 결국 5차 십자군에서는 결국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펠라기우스는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대군을 이끌고 자신들은 지원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오만한 태도로 예루살렘을 반환하겠다는 평화 협상 제의마저 거절한 것이었다. 그의 상상속에서는 이미 이집트와 이스라엘 까지 정복이 끝난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된 다미에타의 십자군 가운데는 이탈하는 부대가 속출했다. 이들중 상당수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왔는데 추기경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거기 있을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이미 다미에타 하나만을 점령하는데도 엄청난 피해를 입었는데 과연 이집트 정복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일 지도 알 수 없었다.
우선 홀란드 (네덜란드) 의 빌헬름 1세 (William I of Holland) 가 펠라기우스가 평화 협상을 거부한 것을 듣자 마자 먼저 짐을 싸서 고향으로 떠났다. 오스트리아 공작 역시 이 의미없는 소모전에 더 이상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오스트리아를 향해 귀국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십자군이 붕괴되지 않은 것은 장 드 브리엔의 뛰어난 지도력과 3대 기사단 (성전, 구호, 튜튼) 이 십자군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끝까지 피를 보겠다는 추기경의 고집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위한 노력은 1219 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다미에타에 당도한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Saint Francis of Assisi) 에 의해 다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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