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아이유브 왕조의 혼란, 그리고 징기즈칸
이전에 설명했듯이 아이유브 왕조의 초대 술탄인 살라딘 사후에 아이유브 제국은 그의 형제와 아들들 사이에서 산산이 분해되었다. 이 혼란상을 수습한 것은 그의 유능한 동생 알 아딜이었다. 하지만 이 쿠르드족 왕조는 투르크족과 비슷하게 1인 세습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알 아딜이 죽을 무렵 제국은 다시 혼란상에 빠지고 말았다. 그나마 이를 가까스로 수습하고 이집트와 시리아 (정확히 말하면 시리아를 완전히 손에 넣지는 못했지만) 를 그럭저럭 마지막으로 동시에 통치한 술탄인 알 카밀 (알 아딜의 아들이고 살라딘의 조카) 이 1238 년에 죽자 아이유브 왕조는 쇠락의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시리아와 이집트는 혼돈의 시기였다. 그 중 이집트는 알 카밀의 아들 알 아딜 2세 (Al-Adil II 1238 - 1240 년 사이 제위) 가 다스렸으나 그는 형제인 알 살리흐 아이유브에 의해 2년만에 물러나게 된다. 본래 알 살리흐 아이유브 ( Al-Malik as-Salih Najm al-Din Ayyub ) 는 다마스쿠스에서 시리아를 둘러싼 권력 투쟁을 벌이다 축출당했지만 대신 이집트의 술탄 자리를 어떻게든 장악했던 것이다.
솔직히 이러한 교환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었는데 1230 년대 말 부터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의 정세는 한마디로 난장판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된 이유는 두가지였다. 일단 일차적으로는 당시에 이 일대를 통일할 만큼 강력한 군주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더 넓게 본다면 동쪽에서 불어닥칠 태풍 때문이었다. 이 태풍은 테무진으로 알려진 몽골의 한 군주로 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1206 년 부터 불려진 칭호인 징기즈칸으로 더 잘알려져 있다.
사실 징기즈칸 (1162 - 1227년) 은 이미 세상을 떠난 시점이긴 했지만 그가 만든 몽골 제국이란 태풍은 서서히 서진하고 있었다. 징기즈칸이 살아있을 때 이미 그의 군대는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동 지방을 향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호라즘 (Khwarezm) 제국은 멸망하고 만다.
본래 호라즘 제국은 셀주크제국의 속주에서 시작했다. 1077 년에 셀주크 제국의 동쪽 일부가 이전 셀주크 술탄의 노예였던 아누쉬 티긴 가르차이 (Anush Tigin Gharchai) 에게 넘어간다. 이후 1141 년 셀주크 술탄인 아메드 산자르 (Ahmed Sanjar) 가 흔히 서요라고 알려진 카라 키탄 (Kara-khitan Khanate, Western Liao) 에게 카트완 전투 (Battle of Qatwan) 전투에서 크게 패해서 세력이 급속히 줄어들자 아누쉬 티긴의 손자 알라 앗딘 앗지즈 (Ala ad-Din Atsiz) 는 재빨리 셀주크 술탄에 대한 충성을 거두고 서요측에 가담한다.
이후 호라즘 샤 (Khwarezm Shah) 라고 알려진 호라즘 제국은 서서히 셀주크제국의 남은 부분을 장악해 들어가 지금의 이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 이르지는 지역을 장악한 제국을 건설했다. 1194 년에는 대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토그릴 3세 (Toghril III) 가 호라즘 제국에 의해 패배하고 셀주크 제국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후 이 지역은 호라즘 제국의 차지가 되었는데 호라즘 제국의 전성기에는 360 만 제곱 킬로미터의 거대한 지역을 다스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갑자기 등장한 징기즈칸에 의해 정복당하고 말게 된다.
(몽골 제국 등장 직전의 유라시아. 호라즘 제국은 Khwarezmian Shahdom의 초록색 부분이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Premongol.png )
몽골 제국의 호라즘 정벌은 피로 물든 역사였다. 1200 년에서 1220 년까지 호라즘을 통치한 무함마드 2세 ( Ala ad-Din Muhammad II ) 는 징기즈칸을 과소평가 한 댓가를 매우 톡톡히 치르는데 1219 년 징기즈칸이 자신의 사신을 죽인데 대한 분풀이를 술탄은 물론 그의 백성들에게 했기 때문이다. 이 때 몽골군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당시 상황에 대해서 무슬림 홀로코스트 (Muslim Holocaust) 라고 부른 이도 있었다. 카스피해 외딴 섬으로 도망간 술탄 역시 생명을 부지하진 못했다.
그의 아들 잘랄 앗딘 (Jala ad-Din Mingburnu) 은 징기즈칸이 물러간 후 이라크에서 이란에 이르는 영토를 다시 수복하긴 했지만 징기즈칸 사후에도 몽골 제국은 포기를 모르고 다시 몰려왔으므로 화레즘 제국은 1231 년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그 이후 실직자 상태가 된 적지 않은 수의 화레즘 용병들이 서쪽으로 몰려왔으므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정세는 더 불안해 졌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불어닥칠 몽골 제국의 공세에 비하면 결국 태풍전에 미풍에 불과했다. 이 불안한 정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든 것은 7 차 십자군에 앞선 또다른 소규모 십자군이었다.
3. 티발 1세
1239 년은 프리드리히 2세와 알 카밀이 맺은 10년간의 평화 협상이 끝나는 시점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적어도 이 협상의 약속을 지킬 알 카밀은 더 이상 없었고 프리드리히 2세 역시 더 이상 우트르메르의 상황에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럭저럭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던 팔레스타인 지역은 다시 서방에서 현지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는 모험적 영주의 십자군 참여로 흔들리게 된다. 그의 이름은 티발 1세 (Theobald I of Navarre, Count of Champagne) 였다.
티발 1세는 샹파뉴 백작 태발 3세와 나바르의 공주 블랑슈와의 사이의 아들로 지금은 스페인 땅인 나바르의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을 겸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십자군 원정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 된 것은 교황의 선동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 사실 그렇지 않은 십자군은 거의 없었다 - 사실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마도 이 프랑스 귀족은 자신이 뭔가 십자군에 기여한 바가 있었다는 것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싶지 않았을까 ?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티발 1세는 십자군을 조직했다. 그러나 나바르는 독립왕국치곤 조그마한 소국이었고 샹퍄뉴 백작령 자체는 괜찮은 영지였지만 국왕급의 병력을 동원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여차여차해서 티발 1세는 프랑스와 영국에서 십자군에 참가하기 희망하는 귀족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예루살렘이 황제 손에 있고 황제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을 대거 모집하기엔 명분이 안서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국왕 정도가 나서서 강력 추진하지 않고서는 일이 진행될 수 없었다. 그래서 결국 몇몇 귀족만이 여기에 참가했다.
프랑스에서는 영국 의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시몽드 몽포르의 형제인 아모리 6세 (Amaury VI of Montfort, 이전 알비주아 십자군에서 설명한 시몽 드 몽포르의 형) 만이 참전의사를 밝힌 유력 영주였다. 그외에는 고만고만한 영주들이 몇몇 참가했는데 그 중 최악은 앙리 드 바르 (Henry II, Count of Bar) 라는 인물이었다.
아무튼 이 1239 년의 십자군에는 티발 1세를 비롯한 정확한 수는 알수 없지만 아무튼 대군은 아닌 십자군이 참가했다. 그러나 이들의 등장은 시작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한편의 블랙 코메디었다. 7 차 십자군이 본격 시작하기에 앞서 잠시 이들의 이야기를 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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