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알비주아 십자군의 초반 전세 (1209 - 1212 년)
일단 베지에 학살 이후 오히려 십자군의 활동은 편해졌다. 이 극악 무도한 행동을 보고 겁먹은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지 않거나 그냥 항복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일은 첫번째로 베지에 이후 목표로 설정한 카르카손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1209 년 8월 1일 카르카손에 도착했는데 카르카손의 수비를 강화한 레몽 자작과 시민 모두가 적극적인 저항의지가 없었으므로 유리한 조건에서 항복을 고려했다.
(요새화된 카르카손 성채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Jondu11 )
사실 카르카손 자체는 베지에와는 달리 잘 요새화된 도시로 십자군도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식수를 구하기 힘들다는 큰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십자군은 8월 7 일 이 도시의 식수원을 차단했다. 이후 도시가 항복한 것은 8월 15일이었다. 물론 이렇게 빨리 항복한 이유는 무리하게 저항하다 베지에 같은 운명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이 카르카손에서는 대량 학살은 없었다. 영주인 레몽 자작도 포로 신세가 되긴 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십자군은 이 도시에서 모든 카타리파를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그들을 알몸인 채로 성문 밖으로 나가게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카르카손에서 카타리파 추방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시몽 드 몽포르는 이 도시를 새로운 거점으로 삼아 주변의 도시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베지에 같은 운명이 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싸우지 않고 항복했으므로 알비, 카스텔노다리, 카스트르, 리무 등 주변 도시들이 쉽게 손에 들어왔다. 그해 가을은 싸우지도 않고 가을걷이 하는 식으로 도시들을 점령했으므로 이 때 상황만 보면 십자군 원정이 조기에 마무리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알비주아 십자군은 예상외로 질질 시간을 끌게 된다. 그 이후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십자군의 새로운 목표는 프랑스 남부의 라스뚜르 (Lastours) 와 카바레 (Cabaret) 주변부였다. 이 시기에 랑그도크 지방 영주들은 레몽 자작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절치 부심 십자군에 대항할 채비를 했다. 이 십자군이 아무래도 단순히 이단만 척결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영지와 전리품 같은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이는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 영주와 귀족들은 그 자신이 카타리파였다.
1209 년 12월 카바레의 영주 피에르 (Pierre - Roger de Cabaret) 은 성공적으로 십자군의 공격을 격퇴했지만 그 이듭해 십자군이 병력을 새롭게 보충해 공격에 나섰으므로 십자군이 다시 승기를 잡았다. 1210 년 봄 브람 (Bram) 이 함락되고 잘 요새화된 도시인 미네르브 (Minerve) 역시 1210 년 7월 22일 함락되었다. 이 도시는 오랜 공성전 끝에 거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미네르브 함락 직후 카타리파에게는 개종을 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매우 신앙심이 강한 140 명을 제외하곤 개종을 택해 화형장에서 불태워지는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슬슬 시대적 배경이 화형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에 적합한 상황으로 무르익어 가는데 결국 이 필연적인 결과로 이 전쟁이 종료될 때쯤 이단 심문관 (Inquisitor) 라는 직책이 등장하게 된다.
우리가 서양 중세 시대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는 기사, 농노, 영주, 그리고 성일 것이다. 당시 워낙 전란이 잦다 보니 중세시대의 성채들은 꽤 견고한 요새들로 건설되어 있어 잘 요새화된 성채들을 함락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이점은 랑그도크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알비주아 십자군은 1210 년의 나머지 시간을 테르메스 (Termes) 의 요새를 공략하는데 바쳐야했다. 이 요새는 12월에 되서야 함락되었다.
1211 년, 알비주아 십자군 3년차에 아르노 아말릭과 시몽 드 몽포르는 랑크도크의 유력 영주인 툴루즈 백작 레몽 6세를 비롯한 주요 영주들을 고립시키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카바레의 피에르는 그해 봄 항복했다. 그리고 여름까지 주요 도시들이 함락되면서 역시 수백명의 카타리파 이단들이 화형대에 매달려 불태워졌다. 이렇게 시작된 화형장의 불길은 향후 500 년은 더 타오를 예정이었다.
1211 년 6월경 알비주아 십자군은 가장 강력한 이단의 근거지 중 하나인 툴루즈를 향해 진군했다. 그러나 과거 1 차 십자군의 유력 영주였던 레몽 4세의 근거지 답게 툴루즈는 방비가 매우 튼튼했다. 여기에 보급과 병력이 부족해졌기 때문에 시몽 드 몽포르는 별수 없이 병력을 물릴 수 밖에 없었다.
1211 년 후반기에는 레몽 6 세가 다시 카스텔노다리 (Castelnaudary) 등의 지역을 접수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이 반격은 그해 가을 라스뚜르에서 중단되었다. 하지만 반격은 여기까지 였다. 그 다음해인 1212 년 병력을 다시 추스린 알비주아 십자군은 적의 본거지 툴루즈를 공격해 대부분을 접수했다. 결국 전쟁 4년차에 십자군은 일단 이단을 다 척결하지는 못했지만 남부 랑크도크 지역을 대부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6. 아라곤 왕국의 개입과 1차 전쟁의 종식
사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레몽 6 세 본인은 당시엔 카타리파 탄압에 적극 반대하는 입장도 아닌데 시몽 드 몽포르와 계속 대립하게 되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전쟁의 양상이 단순히 이단 탄압보다는 남부 지방 세력과 북부 세력 및 국왕 세력과의 전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런 양상의 변화는 제사보단 잿밥에 관심이 많은 세력이 끼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이미 설명한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양상이었다.
당시 랑그도크 지방의 일부는 앞서 언급했듯이 아라곤 왕령이었다. 아리곤 왕국의 수장은 페도로 2세 (Peter II of Aragon) 으로 레콩지스타를 이끌던 걸출한 인물중 하나였다. 그는 아라곤 국왕 및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1212 년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Las Navas de Tolosa) 전투에서 아랍세력을 결정적으로 격파해 이교도와의 전쟁에서 가장 인상적인 승리를 거둔 업적으로 카톨릭 왕 (Peter II the Catholic) 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그런데 그가 라스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서 돌아와 보니 자신의 영토와 바로 이웃한 툴루즈 백작령이 대부분 시몽 드 몽포르에게 점령당한 후였다. 이와 같은 상황이 달가울 리 없는 페도로 2세는 그 자신이 카톨릭 왕이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교황과 프랑스 국왕의 명령으로 이단을 척결 중이던 시몽 드 몽포르의 군대에 도전장을 내밀기로 결정한다.
일단 레몽 6세가 페도로 2세의 사촌이자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단 척결을 핑게로 프랑스의 유력 귀족인 시몽 드 몽포르와 필립 2세가 남부 프랑스 영토를 야금야금 집어먹다보면 자신의 영토도 안전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1212 년 겨울 피레네 산맥을 건넌 페도로 2세는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끈 알비주아 십자군과 일전을 벌이기 위해 남프랑스의 뮤레 (Muret) 에 도착했다. 물론 시몽 드 몽포르도 전쟁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1213 년에는 꽤 기묘한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한쪽은 교황의 요청에 의해 불경한 이단을 척결하기 위해 만든 카톨릭의 군대였고 다른 한쪽은 이교도 아랍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앞장서는 카톨릭의 영웅, 카톨릭 왕 페도로 2세의 군대였다.
과연 신이나 교황 모두 누구편을 들기도 애매해 보이는 이 승부에서 승리한 것은 시몽 드 몽포르였다. 1213 년 9월 12일 뮤레 전투 (Battle of Muret) 는 병력 면에서는 아라곤 왕국군이 꽤 우세했으나 이날 벌어진 기마 돌격에서 적은 수라도 잘 무장된 북 프랑스 기사들이 거의 압도적 (당시 기병 전력으로만 870 대 4000 정도로 아라곤 연합이 우세) 인 아리곤 - 남부 프랑스 기병대를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마치 영화 같은 양군 간의 기마 돌격으로 승패가 갈린 뮤레 전투 중세 기록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당시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끈 기사들은 중갑으로 무장되어 있고 기량면에서 적을 압도할 수 있었다. 당시 페도로 2세의 사촌인 레몽 6 세는 적군을 아군쪽으로 유인해 활과 창으로 공격하자고 제안했으나 페도로 2세는 자신이 우세하다는 확신에 너무 차있었는지 이를 명예롭지 못하고 기사답지 못하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왕이 직접 이끌고 나갔던 아라곤 병력은 정확히 페도로 2세가 이끄는 대열을 공격해오는 십자군 기사들의 기마 돌격에 격파당했다. 페도르 2세는 하필 말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후퇴하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했으며 이후 아라곤 연합군은 지리멸렬하게 패배했다.
다시 한번 전쟁에서는 이기는 것이 정의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일화였다. 또 경적필패 (輕敵必敗 적을 가볍게 보면 반드시 패배한다 ) 라는 고사 성어와도 잘 맞는 이야기였다. 아무튼 이 전투의 승리로 결과적으로 남부 프랑스 지역에 대한 북프랑스 및 카페 왕조의 지배력 강화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었다.
1214 년에는 레몽 6세 자신이 영국으로 망명했으므로 이제 전쟁은 거의 종식된 것이나 다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제사가 끝나면 잿밥에 더 눈이 가듯이, 이 상황에서는 툴루즈 백작령을 비롯한 전리품에 대한 권리를 누가 주장할 것인지를 가지고 새롭게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 대해서 일단 시몽 드 몽포르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고 1215년에는 툴루즈를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1216년에 이르러 눈물을 머금고 필립 2세 (혹은 필리프 2세, 사실 필리프 2세가 더 흔한 번역 명칭) 에게 양도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할 수 있지만 사실 중세 초기 프랑스는 과거 프랑크 제국의 파편으로 그 힘이 매우 미약해 현대적 의미의 프랑스와는 비교할 수 없이 왜소한 왕국이었다. 샤를 마뉴 대제 이후 잦은 왕국들의 이합 집산으로 말미암아 카페 왕조의 힘은 극히 미약해 파리를 중심으로 한 북부 및 중부 프랑스 일대만이 실제적인 권력 행사가 가능한 지역이었다. 실로 프랑스의 중세 - 근대 역사는 여러 다양한 세력이 강력한 프랑스 왕권에 통합되는 역사로 그 결과가 현재의 프랑스인 셈이다.
1216년 이제까지 카페왕조의 힘이 거의 닿지 않던 남프랑스 랑그도크에 왕령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카페 왕조 중흥의 군주 필립 2세였다. 그러나 프랑스 역사에서 흔히 그러하듯 순순히 각 지방들이 왕의 명령에 복종하려 들지 않았다. 훗날 프랑스 절대 왕정도 사실 이들을 제압한 오랜 역사 끝에 탄생한 것이란 점을 생각하면 랑그도크의 독립 세력을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도 여기에 필요한 과정이었다. 그리고 마침 그 편리한 구실로 알비주아 십자군이 등장했기 때문에 의외로 금방 끝날 것 같은 알비주아 십자군은 더 시간을 끌기에 이른다. 그 첫번째 이유는 레몽 6세가 다시 반란을 계획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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