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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를 읽으면서 비교해본 십자군 전쟁사 - 1권




 꽤 간헐적으로 지지부진하게 연재 중이긴 하지만 저도 이 블로그에서 십자군 전쟁사를 연재중입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6 차 십자군이 끝나고 이제 7차 십자군 이후는 마무리 단계로 보입니다. 그런데 작년에 아시다 시피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가 출시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시오노 나나미 선생이 이런걸 쓰시는지 몰랐는데 주로 서양 고대 - 중세사를 전문으로 써오신 걸 생각하면 의외라고 할 순 없어 보입니다. 


 시오노 나나미 역시 역사 전공자는 아니지만 수십년간 역사 관련 저술을 해오면서 답사도 많이 다녀보고 문헌을 많이 공부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지식과 필력을 가진 분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서술한 책들을 거의 빠지지 않고 읽은 것 같은데 다소 편파적으로 글을 쓰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계속 들긴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인 이야기에서는 로마인은 대개 선의 세력이고 그에 반대하는 세력은 악의 세력 비슷하게 그려지는 점. 이점은 베네치아 이야기를 담은 바다의 도시 이야기에서 더 심하게 나타납니다) 


 아무튼 십자군 이야기를 쓴다고 하니 저도 궁금증이 일어 책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권을 읽고 난 후 소감을 적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시오노 나나미가 십자군 관련 기술을 할 때 난감하다고 말한 점은 저도 동감합니다. 즉 십자군 전쟁에는 3자 입장에서 글을 기술한 경우가 없이 대개 십자군측과 무슬림측 기술 2가지가 존재합니다. 그런데 사실 전쟁사라는 게 대부분 그런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2차 대전사 기록은 보통 연합군 기록과 추축국 기록입니다. 다만 이들 기록은 매우 상세하게 작성되기 때문에 나중에 분석하기 힘들진 않습니다. 십자군 전쟁을 기록한 역사가들은 객관성도 다소 떨어지지만 상세함이 다소 모자란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튼 문헌들이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보니 동일한 사건을 기술함에 있어서도 결국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게 되는 점이 문제 입니다. 저는 주로 이런 점을 중심으로 소개를 해볼까 합니다.



 1. 외스타슈 3세는 장남인가 삼남인가 ? 


 십자군 이야기에는 볼로뉴 백작 외스티슈 2 세의 장남은 죽었고 살아남은 가장 연장자는 차남 고드프루아 드 부용, 삼남이 외스티슈 3세, 4남이 보두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쓴 십자군 전쟁사에서는 외스티슈 3세가 장남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을까요  ? 

 일단 앞서 이야기 한데로 시오노 나나미는 수십년간 역사 저술만 해온 분이고 꽤 많은 문헌을 검토해서 적기 때문에 편파성이라는 논란은 차치하고 사실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크게 어긋나게 글을 쓰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일어난 일을 어떻게 주관적으로 해석하냐의 차이겠죠.  


 따라서 이분이 외스타슈 3세가 삼남이라고 기술한 점으로 봐서는 진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문헌들을 검색해 봤습니다. 


 일단 외스타슈 2세 (Eustace II) 는 정복왕 윌리엄과 함께 헤이스팅스 전투에 참가했던 인물로 1057 년 자신의 영지에 가까운 하 로렌 (lower Lorraine) 의 공작 고드프루아 3세의 딸 이다 (Ida of Lorraine) 과 결혼합니다. 그녀에게는 3 아들이 존재했는데, 외스타슈 3세, 고드프루아 드 부용, 보두앵의 볼로뉴 3 형제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녀는 대략 1040 년 생으로 추정되며 결혼한 나이는 17 세로 당시엔 그 정도가 흔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시작됩니다. 중세시절 영아 사망율이 높다보니 사실 어느 정도 자라기 전까지는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중세의 주요인물들 조차 생년 월일이 정확히 기록이 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 수입니다. 더구나 형이나 동생이라는 표현 보단 형제 (Brother) 라는 표현이 더 흔해 누가 먼저 태어났는지 기록되는 정도는 사실 왕족 정도고 귀족까지 그런 호사를 누리기 힘들던 시절입니다. 


 일단 가장 확실한 생몰년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가장 기록이 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인 고드푸르아 두 부용 입니다. 그는 차남이라고 하며 1060 생인데 결혼한 시기를 생각하면 그 즈음 둘째를 얻었다는 건 타당해 보입니다. 


 모든 기록에서 막내로 기록된 보두앵은 1058 년 설이 있지만 그러면 보두앵이 첫째가 되니 그건 좀 어려워 보이고 1060 년대 초반 설이 타당해 보입니다. 문제는 외스타슈입니다. 제 생각엔 외스타슈가 (살아남은 자녀중 ) 장남으로 보이는데 일단 외스타슈라는 이름을 아버지가 물려주고 자신의 영지까지 상속하게 한점을 생각하면 장남이라는 추정이 그럴 듯 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일부 기록에는 1058 년생이라고 되어 있어 이런 추정을 더 가능하게 합니다. (아래 링크) 하지만 좀 더 찾아보면 정확한 탄생 년도에 대한 기록은 다 엇갈리거나 추정입니다. 



 제가 알기론 외스타슈가 장남으로 영지를 상속하고 차남 고드프루아는 마침 후계자가 없는 로렌 공작가로 보내 그곳의 영지를 상속하게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게 사실 가장 자연스럽겠죠. 하지만 사실은 장남이 있었는데 일찍 죽어 삼남인 외스타슈가 이를 계승했다면 어떨까요 ? 물론 어떤 기록에도 그렇다는 내용은 찾지를 못했습니다. 


 어느쪽이 맞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딱히 외스타슈가 삼남이었다는 기록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냥 이부분은 수정하지 않고 두었습니다. 뭐 이런 부분은 중세 시절 정확하게 탄생 년도와 생일을 기록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2. 1차 십자군 병력의 수는 얼마 ? 


 사실 앞에서 언급한 내용은 그렇게 크게 문제 삼을 정도의 내용은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언급하는 내용은 그보단 더 중요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1차 십자군의 병력에 대한 언급입니다. 일단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에서 로렌 공작 고드프루아의 병력은 보병 3만에 기병 1만 이라고 언급된 것으로 나옵니다. 물론 이건 너무 많기 때문제 실제 병력은 이 절반 수준이라고 시오노 나나미는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2만이라고 해도 사실 중세영주가 모으기엔 꽤 많은 병력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보다 한참 후에 아쟁쿠르 전투 (Battle of Agincourt) 때 헨리 5세가 동원한 병력이 대략 6000 - 9000 명 정도이고 크레시 전투에서 에드워드 3세가 동원한 병력이 대략 9000 - 15000 명 정도였던 점을 감안해 보면 하 로렌 공작 (여기에 볼로뉴 백작군을 합쳐 생각해도) 혼자 동원하기는 좀 많아 보이는 병력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에 로렌의 모든 병력이 아니라 로렌을 방어할 병력도 남기고 출정해야 합니다. (참고로 하 로렌은 현재의 벨기에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죠. 지금의 프랑스 로렌은 상 로렌에 해당됩니다.)


 툴루즈 백작 레몽이 모은 병력도 꽤 된 건 사실이지만 5만이 넘었을까 하는 데는 솔직히 의문이 있습니다. 그가 남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인건 사실이고 또 영지외에서도 십자군에 참가하고 싶은 이들이 몰려들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 큰 병력을 이끈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이 정도 병력이면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총병력에 맞먹는 숫자이며 고대 로마 제국 시절이었다면 보조부대를 합쳐도 5-6 개 군단 병력을 넘어서는 수준입니다. 더구나 그 역시 일부 병력은 툴루즈 수비를 위해 남겨야 합니다.


 참고로 툴루즈가 얼마나 되는 크기인지 알기위해서 이전 알비주아 십자군 관련 포스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http://blog.naver.com/jjy0501/100143221999 )  


 하지만 가장 의문을 제기할 만한 숫자는 바로 보에몽이 모집한 군대입니다. 보에몽은 아풀리아 계승전쟁에서 사실상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이탈리아 남부에 작은 영지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 시칠리아는 숙부의 손에 있었습니다. 나머지 이탈리아 남부의 영지는 배다른 동생 로게르의 차지였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보병 2만에 기병 1만을 모집했다는 건 그 절반으로 줄여서 생각해도 이해가 선뜻 되지 않는 수준의 병력 입니다. 특히 당시 기병이라면 기사인데 그 수가 5천이면 정말 엄청난 숫자입니다. 더구나 그 역시 본거지인 타란토를 잃지 않기 위해 모든 병력을 다 이끌고 참전하긴 어려웠을 것입니다. 


 아마 이런 내용들을 합쳐보면 연대기 작가들에 과장법에 의해 10 만 이상이라는 십자군 병력은 실제의 1/3 정도 규모로 낮추어 생각하는게 맞을 듯 합니다. 이미 레몽, 고드프루아, 보에몽의 병력 기술만 12 만 인데 이 걸 반으로 잡는다 쳐도 6만이나 되는 대 병력입니다. 여기에 노르망디의 로버트, 플랑드르 백작, 위그 백작, 블루아 백작 군을 더 합치면 반으로 줄여도 10만에 근접하는 숫자가 될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이와 같은 기술을 한 이유는 전투 병력외 기타 부대 인원까지 합쳐서 말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분명 십자군 이야기 내에서는 완전무장한 병력 2만 이란 식으로 표현을 하기 때문에 다소 혼란스럽습니다. 제 생각엔 1차 십자군 총 병력이 3만 5천 정도였다는 기술이 타당해 보입니다. 



 3. 탕크레드는 악당인가 영웅인가 ? 


 사실 기술하는 방법에 따라 인물의 평가에 대한 차이는 극과 극을 달릴 수 있지만 제가 서술한 십자군 전쟁사와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에서 거의 반대로 평가되는 인물은 탕크레드 (탕크레디) 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시오노 나나미의 서술 방식도 문제가 있다곤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욕심이 많고 믿을 수 없는 인물인 부분도 있지만 용맹한 전사인 점은 확실했기 때문입니다. 또 과도한 욕심으로 그의 숙부인 보에몽과 갈등을 일으켰으며 주변 영주들과 항상 말썽을 일으킨 부분도 사실 다른 중세 영주에서도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당시엔 정복자가 영웅이 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을 꼭 나쁘게 볼 건 아니죠. 더구나 나름 북부 지역에서 주변 세력과 항상 분쟁을 일으킨 덕분에 오히려 보두앵 1세 입장에서는 북쪽 지역 방위를 염려할 필요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4. 결론


 사실 시오노 나나미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를 저술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자의적인 해석이나 객관적이지 못한  기술이 많다는 점이 비판의 근거가 되곤 합니다. 십자군 이야기도 어느 정도는 십자군 측 시각에서 쓰여진 부분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십자군이 무참하게 인명을 학살한 마라트 알 누만, 안티오크, 예루살렘에 대한 서술은 비교적 짧은 편이고 십자군 주요 영주 들의 탐욕과 반목에 대해서는 기술이 적은 편입니다. 


 다만 전체적인 분량이 3권 정도로 길지 않기 때문에 기술이 짧은 부분들이 있는 건 어쩔 수 없어 보입니다. 전반적으로 1권은 십자군측 중심 기록이고 (십자군 이야기이니 당연한 일일 수도 있지만) 무슬림 측 기록은 별로 없다시피 한점은 아쉽지만 역시 분량상 어쩔 수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다소 십자군 관점에서 쓰여졌다는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십자군 이야기 자체는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읽을 만한 책이라고 봅니다. 다만 일부 세부적인 부분에 있어 서로 엊갈리는 기록들이 있어 결국 십자군 전쟁사와 십자군 이야기가 서로 좀 다른 부분들이 존재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봅니다.


 (덧: 하지만 제가 쓴 십자군 전쟁사 역시 오류의 가능성이 항상 있다는 건 처음 연재 시작시 부터 한 이야기 입니다. 역사 전공이 아닌 건 말할 것도 없고 전문 작가도 아닌데다 사실 생각날 때 마다 드문드문 연재를 하는 방식이라 항상 오류의 가능성이 상존합니다. 이 점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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