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리드리히 2세의 성장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하인리히 6세의 어린 아들 프리드리히 2세는 불과 3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게 된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이전 포스팅들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 http://blog.naver.com/jjy0501/100131894892 http://blog.naver.com/jjy0501/100132239294 )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교황권을 위협하던 하인리히 6세가 1197년 죽고 나자 남은 것은 세살 바기 어린아이인 프리드리히와 어머니 콘스탄차 뿐이었다. 이 상황은 마침 교황좌에 오른 야심가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콘스탄차도 결국 인노켄티우스 3세와 손을 잡고 그를 섭정으로 임명한 후 다음해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새 교황에게는 더 할 수 없이 좋은 기회가 열린 셈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의 탄생, 문제는 어머니도 곧 아버지 뒤를 따라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사실 늑대냐 이리냐의 차이일 수 있지만 태후인 콘스탄차가 생각하기에 아들 프리드리히 2세의 제위에 더 위협적인 인물은 교황보단 하인리히 6세의 동생인 슈바벤 공작 필립 이었다. 적어도 교황은 신성로마 제국 황제 자리를 탐내지는 않겠지만 필립공은 무엇보다 그것을 탐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1198 년 시칠리아 왕위에 오르긴 하지만 독일 왕위 및 신성로마 제국 제위에 오르지 못했다. 교황은 의도적으로 한사람이 독일과 시칠리아를 장악하는 일을 막으려고 했는데 그랬다가는 남북으로 샌드위치 처럼 사이에 끼어서 꽤 곤란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에 독일 왕위는 필립공과 벨프가의 라이벌 오토 (하인리히 사자공의 아들) 사이에서 10 년 이상 다툼을 벌이는 상태가 되고 어린 프리드리히는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 팔레르모에서 부모없이 교황의 감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이 때 교황이 보낸 성직자가 바로 첸시오로 나중의 교황 호노리오 3세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 시기 프리드리히 2세를 눈에 가시처럼 본 쪽은 숙부인 필립이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오히려 자신이 섭정하는 프리드리히 2세가 없으면 곤란한 쪽이었다. 섭정으로 누리는 권력과 간섭이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반면 섭정 자격으로 사사건건 독일 황제 선출에 관여해서 훼방을 놓으려는 교황이 못마땅한 필립공은 독일 왕으로 선출 된 후 스스로가 섭정권을 주장하며 나폴리로 침공했다.
1200 년 제노바 함대의 도움으로 남부 이탈리아에 침공한 필립의 군대로 인해 어린 프리드리히 2세는 위기에 처하지만 어머니 시절 부터 시칠리아에 딱아둔 기반과 빌헬름 ( William of Capparone) 의 능력을 바탕으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빌헬름이란 독일인은 시칠리아의 섭정이었는데 1206 년에 발터 (Walter of Palearia) 로 교체된다.
아무튼 이렇게 위태 위태한 유년 시절을 보낸 프리드리히 2세는 세상에 대해 매우 염세적이면서도 현실적인 감각을 키우게 된다. 이와 같은 균형 잡힌 현실 감각은 나중에 십자군 전쟁에서도 나타나 된다.
프리드리히 2세의 유년 시절에 대해 또 다른 기록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바로 그가 엄청난 천재였다는 기록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라틴어를 비롯 적어도 6개 국어를 할 줄 알았는데 이는 당시 남부 이탈리아 자체가 워낙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되어 있기에 매우 유용한 재능이었다. 또한 뛰어난 지능으로 온갖 학문을 익히는 것도 모자라 승마, 창술 등 체력도 출중해 그야 말로 타고난 천재였다.
특히 그가 자란 팔레르모는 여러 인종과 다양한 정치, 종교 세력이 교차하는 지점인 바 어렸을 때 부터 프리히드리 2세는 중세인이라면 가지기 힘든 덕목인 다양성과 다른 문화를 존중할 줄 아는 지혜를 키우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십자군 원정에서도 나타나게 된다.
2. 황제로 가는 길
1208 년에 프리드리히에게 중요한 변화가 생긴다. 그것은 바로 그의 자리를 호시 탐탐 노리던 숙부인 필립이 암살당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독일 왕위가 바로 프리드리히 2세에게 돌아오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을 두려워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필립의 라이벌인 벨프가의 오토에게 황제 관을 씌워준 것이다. (1209년)
교황의 의도는 물론 남 이탈리아에서 북독일에 이르는 단일 제국이 탄생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인노켄티우스 3세는 교령집인 '황제에 오르는 왕' 을 발표해 제후들이 선출한 왕을 황제로 올리는 일이 교황의 책무임을 선언했다. 아무튼 이렇게 오토 4세가 벨프가의 일원으로 제위에 오르자 호엔 슈타우펜가의 지지 세력들은 제위 찬탈이라면서 강력하게 반발했다.
(손을 맞잡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오토 4세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사실 상황은 이전보다 프리드리히 2세에게 유리해졌다. 이제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섭정을 거부할 시기가 다가온데다 숙부인 필립 2세가 죽어 친 호엔 슈타우펜 지지 세력이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 했던 것이다. 한편 이렇게 되자 신성 로마 제국은 오랜 반목을 해온 벨프가 세력과 호엔 슈타우펜 왕조 지지 세력이 갈려서 심각한 내분에 휩싸이게 된다.
오토 4세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할 방법으로 결국 교황과 프리드리히 2세를 모두 처리하기 위해 이탈리아 침공을 진행했다. 강력한 황제가 등장하는 일을 어떻게든 막으려는 게 교황의 의도라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의 독일 황제들이 그러했듯 로마를 장악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를 허수아비 교황을 선출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 같았다.
오토 4세가 이탈리아를 침범하자 의도치 않게 허를 찔린 셈이 된 교황은 또 다시 오토 4세를 파문했다. 한편 오토 4세가 파문당하자 기회를 엿보던 친 호엔 슈타우펜 파 귀족들은 프리드리히 2세를 새로운 독일왕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교황의 진정한 의도는 황제권을 분열시켜 교권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둘 간의 대립은 불가피했다.
1212 년 프리드리히 2세는 마인츠에서 독일 왕으로 대관식을 가졌다. 그러나 아직 독일내에서는 남부 지역만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 했으며 북부 독일 지역은 파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오토 4세를 지지했다. 결국 전쟁을 통해서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는데 이 전쟁은 뜻밖에도 프리드리히 2세와 오토 4세 사이의 전쟁이 아니라 프랑스 영토에서 발생한 필립 2세 (필리프 2세) 와 영국, 플랑드르, 오토 4세의 연합군 사이의 전투였던 부빈 전투 (Battle of Bouvines) 였다.
1214 년의 부빈 전투는 프랑스의 카폐왕조와 이에 반대하는 연합군인 영국의 실지왕 존, 플랑드르 백작, 그리고 오토 4세 (그는 존왕의 조카였다) 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로써 프랑스는 자국 영토내 막대한 영국왕의 영지를 몰수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듭해 존왕은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 에 서명하게 된다. 오토 4세는 이 패배 이후 급속히 몰락했고 1218 년 사망한 후에는 더 이상 벨프가는 예전같이 강력한 적수는 될 수 없었다.
더욱이 1216 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죽고 이보다 덜 현실주의적 교황인 호노리오 3세가 즉위하자 신성 로마 제국을 재건하려는 프리드리히 2세의 노력에도 점차 서광이 빛추기 시작했다. 그러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죽기 전에 실패한 4차 십자군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성지를 향한 새로운 십자군 운동을 주장했다. (당시엔 알비주아 십자군도 거의 해결된 것으로 보였으므로 새로운 십자군을 모집할 시기 같았다)
그 뒤를 이은 호노리오 3세는 카타리파의 새로운 반란 보다는 십자군에 더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프르드리히 2세는 사실 독일왕으로 즉위하기 전에 인노켄티우스 3세에게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로 약속한 바가 있다. 그리고 1215년에도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교황의 지지를 받아가며 다시 독일왕에 선출된 바가 있다. 이 단계에서는 교황도 그냥 기정 사실을 인정해 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는 독일에 프리드리히 2세에 맞설 유력 군주가 없었다.
아무튼 프리드리히 2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신성로마 제국 재건이었지 저 멀리 있는 예루살렘 회복 (사실 성공 가능성도 희박해 보였다) 이 아니었다. 이런 배경에서 프리드리히 2세의 소극적 참여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사실 그는 5차 보단 6차 십자군에서 더 중요하다. 그러나 아예 병력을 전혀 보내지 않으면 대놓고 약속을 어기는 셈이되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2세는 그 대신 성지로 갈 병력을 바바리아 공작 루드비히 1세 (Duke Louis I of Bavaria ) 에게 지휘하도록 명령했다. 한편 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와 호노리오 3세) 는 프리드리히 2세 말고도 일단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소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인 덕분에 다른 유력한 군주들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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