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엔드레 2세의 항해
엔드레 2 는 꽤 많은 병력을 지휘한 것 치고는 비교적 신속하게 병력을 큰 무리없이 이동시켰다. 베네치아 덕에 해로를 통해 큰 트러블 없이 군대가 성지까지 도달할 수 있었는데 과거 성지까지 가는 것만도 만만치 않은 문제 였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진보였다.
그것이 가능해 진 것은 물론 4차 십자군 이후로 베네치아가 그토록 원했던 아드리아 해에서 동지중해에 이르는 안전한 해상로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이는 4차 십자군의 전리품으로 크레타를 비롯 에게해의 여러 섬과 항구를 장악한 데다 다른 경쟁 도시 국가인 피사나 제노바의 힘을 베네치아가 압도한 데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5-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대 판도. 4차 십자군 직후인 13 세기 초에는 이미 동지중해를 장악한 해상 국가가 되어 있었다. CC-BY-SA-3.0,2.5,2.0,1.0; Released under the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Original uploader was -kayac- at it.wikipedia )
엔드레 2세와 그의 군대가 베네치아 함대에 승선한 것은 1217 년 8월 23일 스팔라토 (Spalato - 중부 달마티아 지역의 도시로 현재의 크로이티아 해안도시) 에서 였다고 한다. 그후 매우 신속한 항해를 통해 10월 9일에는 키프로스 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엔드레 2 세와 그의 대병력은 과거 3차 십자군 최대의 격전지였던 아크레 항으로 도달했다.
아크레 항에는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올라 있던 브리엔의 장 (장 드 브리엔, John of Brienne) 과 안티오크 공국의 보에몽 4세가 그들을 기다렸다. 여기서 잠시 설명을 위해 시간을 다시 앞으로 돌려서 5차 십자군 직전까지 우트르메르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자.
5. 앙리 1세의 통치
3차 십자군이 종료된 1192 년의 평화 협상 이후 결과적으로 십자군 국가에 남은 것은 그 크기가 축소된 트리폴리 백국과 안티오크 공국, 그리고 해안가의 도시들을 포함하는 예루살렘 왕국의 잔재들 뿐이었다. 사실 예루살렘 왕국과 에데사 백국을 비롯한 다른 십자군 국가들이 건재하던 시기에도 주변의 다수의 무슬림 국가들에 비해 십자군 국가들은 열세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이 주변부가 대부분 함락된 이후에는 사실 유럽에서의 원조가 아니었더라면 이들 십자군 국가들의 잔존 세력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1190 년대 당시 우트르메르의 상황. 지도에서는 키프로스가 비잔티움 제국의 일부로 나오긴 하지만 이 시기에는 사실 키프로스 왕국이 독립한 상황이었다.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특히 이 시기 예루살렘 왕국은 리처드 1세 시기 확보한 해안가의 좁은 교두보에 지나지 않았다. 현대의 이스라엘 및 레바논 해안선 수백 km 에 걸친 이 띠모양의 왕국의 수도는 3차 십자군에서 특히 난공불락이자 금성탕지의 요새임을 입증해 보인 아크레였다. 기타 자파, 아르수프, 카이세리아, 티레, 시돈, 베이루트 등이 이 왕국에 속한 도시였다.
오락 가락 하던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3차 십자군이 끝날 무렵 샹파뉴의 앙리 (예루살렘 왕국 국왕으로는 앙리 1세이고 샹파뉴 백작으로는 앙리 2세) 에게 돌아가있었다. 그는 신규 부동산을 구매해 새로운 키프로스 왕국의 태조가 된 전 예루살렘 왕국 국왕인 뤼지냥의 기와 자연스럽게 대립했다. 왜냐하면 기는 본래 예루살렘 왕국의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십자군 전쟁사에서 살라딘 편을 참조)
이와 같은 대립은 1194 년 기가 죽으면서 해결되었다. 이 인물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인물로 한 나라의 태조가 되었던 인물이었다. 후사없이 죽은 기의 뒤를 이은 것은 아말릭 1세 (Amalric I) 로 사실 그는 기의 형이었다. 본래 그는 앙리 1세와 갈등 관계에 있었으나 신속하게 화해한 후 키프로스 섬이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비잔티움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당대의 가장 강력한 군주였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의 가신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동생보단 형이 더 뛰어나서 이와 같은 기민한 외교적 조치 및 민심 안정 조치로 아말릭 1세는 300년 키프로스 왕국의 기반을 다졌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우리식으로 말하면 태종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이렇게 되서 1190 년대에는 키프로스 왕국, 예루살렘 왕국과 트리폴리 백국, 안티오크 공국등이 그럭저럭 살아남아 이슬람 국가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았다. 이들이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아이유브 제국의 상황과도 연관이 있었다.
전설적인 살라딘이 죽고 난 후 그의 영토는 형제와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다. 수도인 다마스쿠스는 아들인 알 아흐달 (Al-Afdal ibn Salah ad-din ) 이 물려받았고 이집트는 차남인 알 아지즈 (Al-Malik Al-Aziz Osman bin Salahadin Yusuf ) 가 그리고 알레포는 아즈 자히르 (Az-Zahir Ghazi ) 에게 상속되었다. 살라딘은 금욕저인 인물이라는 현대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소 다르게 당대의 다른 무슬림 군주들 처럼 여러 아내를 거느려 아들이 무려 17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자식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자식들에게 재산 분배하듯이 왕국을 분배한 건 잘못이었다. 이로 인해 형제들끼리 서로 싸움과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 시기 아이유브 제국을 서서히 장악한 인물은 바로 살라딘의 유능한 동생인 알 아딜 ( al-Malik al-Adil Sayf al-Din Abu-Bakr ibn Ayyub 1145 - 1218) 이었다. 3차 십자군에서도 등장한 알 아딜은 사실 형인 살라딘에 이어 아이유브 제국을 지배한 2대 술탄이었다.
그는 최초 다마스쿠스 총독으로 주변부를 지배했으며 알 아흐달이 1196 년 죽은 이후 시리아를 알 아지즈가 1198 년 죽은 후에는 이집트까지 넘보게 되면서 1200 년에서 1218 년 죽을 때 까지 대략 20 년 정도 이집트와 시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살라딘은 아들은 많았지만 사실 동생인 알 아딜이 가장 유능했던 셈이다.
알 아딜은 현명한 지배자로 지금 해안선에 겨우 붙어 있는 십자군 국가들을 밀어 내려고 들면 다시 유럽에서 새로운 십자군이 조직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3차 십자군에서 십자군과 많은 협상을 해본 그 답게 그는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즉 해안선의 십자군 국가들을 괜히 자극하지 않고 이를 오히려 대 서방 무역 창구로 삼아 서방과의 괜찮은 수익이 남는 우호 관계를 수립했던 것이다. 앙리 1세도 괜히 승리가 보이지 않는 전쟁을 피해려 했으므로 덕분에 한동안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는 1197 년이 되자 깨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6세가 남쪽으로 원정을 떠나면서 성지까지 원정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황제가 남 이탈리아의 반란을 정리하는 동안 다른 독일 군대가 성지에 도달하여 무슬림 들에 대한 군사 공격에 나섰는데 이는 오히려 앙리 1세의 걱정만 키울 뿐이었다. 왜냐하면 고생해 이룩한 우호 관계가 깨질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우려는 곧 현실이 되었다. 알 아딜은 병력을 소집 자파를 공략하기 위해 군대를 출정시켰다. 이에 앙리 1세 역시 군대를 모아 자파를 구원하려 했지만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를 성사시킬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앙리 1세가 사고로 인해 발코니 쪽으로 떨어지면서 추락사 한 것이었다. 31세의 젊은 왕치곤 너무 허무한 죽음이 아닐 수 없었다.
6. 아말릭 1세의 통치
1197 년 뜻하지 않은 왕이 죽음으로 예루살렘 왕국은 다시 위기에 처했다. 벌써 3 번재 미망인이 된 팔자가 꽤 센 여자인 이자벨라 왕비는 (첫번째 남편은 험프리 4세, 두번째는 몽페랏의 콘라드, 세번재는 앙리 1세. 이 중에서 험프리 4세와는 이혼하고 나머지는 남편이 일찍 죽은 경우) 다시 왕국의 존속을 위해 4번째 남편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 청했다. 아마 본인은 더 이상 그러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재혼은 하기 싫어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때 마침 (?) 키프로스 왕국의 아말릭 1세 역시 아내가 죽어서 홀아비가 되었다. 이에 독일측에서는 이 둘이 결합해서 아이유브 제국의 위협에 대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사실 이 시점에서는 그게 가장 적절하긴 했지만 처음에 아말릭 1세는 이에 반대했다. 결국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와 키프로스 왕국의 왕위를 분리하기로 합의하면서 아말릭 1세는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 (예루살렘 왕국 국왕으로는 아말릭 2세 ) 자리에 올랐다. (아마도 이는 가망이 없어 보이는 예루살렘 왕국에 자신의 신생 왕국이 끌려 들어가는 사태를 막기 위한 고육 지책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트르메르에서 꽤 오랜 경험이 있는 프랑스 귀족으로 이미 현지에 토착화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앞서 이야기 했듯이 훨씬 현실 감각이 뛰어나고 통치력이 우수했으므로 굳이 우세한 무슬림 세력과 싸우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따라서 1198 년에 무슬림 과의 휴전 협상을 5년 더 연장했다.
사실 양측에서 서로에 대한 군사 행동이 이 기간 전혀 없지는 않았다. 1197 년 하인리히 6 세가 뜻하지 않게 급사하면서 신성로마제국군은 돌아갔지만 양측에서 서로를 적대시 하는 세력들이 여전히 많았기 때문에 양측의 군사 충돌이 계속되었다. 특히 현지 사정에 어두운 소수의 십자군 병력이 우트르메르로 들어왔다가 패배해서 떠나는 일이 많았다. 다행이 이런 일들이 대세에 영향을 미치진 못했기 때문에 1204 년에 아말릭 1세는 다시 휴전 협정을 6년더 연장했다.
이렇게 해서 일단 위태위태하던 십자군 국가는 앙리 1세와 아말릭 1세라는 현실 감각이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앞으로 1291 년 까지 버틸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게 되었다. 더욱이 현실적인 능력과 감각이 역시 뛰어난 알 아딜 역시 굳이 무리해서 이들을 쫓아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싸움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차라리 1204 년에 4차 십자군이 성지에 도달하지 않은 것이 더 다행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다만 현지에서는 4차 십자군을 꽤 기대했었다고 한다. 이들 중 상당수가 성지 회복을 위해 우트르메르로 온 유럽인이었기 때문이다)
아말릭 1세는 1205 년 아마도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이사벨라 왕비도 이번에는 아말릭 1세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이번에는 5번째 결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의 사후 키프로스 왕위는 아들인 위그 1세에게, 그리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위는 아사벨라 왕비와 몽페랏의 콘라드 사이의 딸인 마리아 (Maria of Jerusalem) 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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