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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7 차 십자군 1






1. 루이 9세 


 7 차 십자군 (주의 : 서적에 따라서는 5,6 차를 합쳐 5차로 보는 시각도 있기 때문에 그 경우 이 이후는 사실 6차가 된다)  이후의 십자군은 국왕들의 입김이 꽤 많이 작용한 십자군이었다. 그 중 7 차 십자군은 루이 9세라는 인물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흔히 성왕 (聖王) 루이 (Saint Louis) 라는 별명이 붙은 루이 9 세는 사자라는 별명이 있는 용맹한 젊은 왕이었던 루이 8 세의 아들이었다. 이전 알비주아 십자군에서 설명했듯이 루이 8세는 알폰소 8세의 딸 블랑슈 드 카스티유 (Balanche of Castile) 와 결혼해서 그 사이 아들인 루이 9세를 두었다. 살아남은 아이들 중 루이 9세가 장남이었다.  


 루이 8세가 병으로 일찍 죽자 루이 9세는 12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1214 년생이고 1226 년 즉위) 이후 1270 년 죽을 때 까지 그는 프랑스의 왕이었다. 역대 프랑스 왕 가운데 가장 신앙심이 깊은 축에 속했던 그는 재위 기간 내내 유럽의 평화 조정자이자 예술과 신앙의 후원자 역활을 했다. 앞서 설명한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와 프리드리히 2세의 갈등 기간 동안에도 이를 평화적으로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또 프랑스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성인품에 올라간 인물이기도 하다. 



(성왕 루이 9세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HGCOM  ) 


 루이 9세는 아버지와는 달리 유럽 내에서는 적극적인 군사 활동을 펼치지는 않았지만 2차례 (7차와 8차) 십자군에 깊이 발을 들여놓았다. 7차 십자군에 대해서는 루이 9세가 1244년 중병에 걸렸던 시절 신에게 병이 완치되면 십자군에 참가하겠다고 맹세했는데 실제로 회복하고 나서 십자군 참전을 선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루이 9세는 실제로 신앙심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지만 루이 9세 시절의 프랑스는 비교적 내부와 외부에 위협세력이 없어 사실 십자군 원정을 하기에 적당한 시기이기도 했으며 당시가 프랑스 기사의 전성 시대였던 것 역시 십자군 원정에 프랑스가 적극 나서게 한 배경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루이 9 세는 십자군 원정을 수년에 걸쳐 계획했다. 앞서 프리드리히 2세 때도 언급했듯이 1245 년에는 교황이 리옹으로 도주해 프리드리히 2세를 폐위하고 대립황제를 선언했으며 황제 역시 리옹 공의회에 참가하는 성직자는 모두 잡아들이겠다고 극단 대립을 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 국왕 (섭정) 이라는 황제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사실 프리드리히 2세는 전혀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영국의 경우를 이야기 하면 당시 헨리 3세는 십자군 원정보다는 실지왕 존 시절에 (그는 존의 맏아들이다) 빼앗긴 땅을 수복하는데 더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국왕이 장시간 자리를 비우거나 프랑스 군대가 성지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는데는 큰 관심이 있었지만 십자군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처음부터 7 차 십자군 원정은 루이 9세와 그의 형제들에 의해 준비되고 계획되었다. 루이 8세와 블랑슈 왕비 사이에는 꽤 많은 자녀가 있었는데 그 중 상당수는 어려서 죽었지만 당시 성인으로 성장해서 루이를 도울 수 있는 동생이 세명이 있었다. 그 세명은 다음과 같다. 



 - 로베르 1세 (Robert I of Artois, count of Artois  1216 - 1250) 


 아르투아 백작 로베르 1세는 루이 8세의 살아남은 아들가운데 둘째 였다. 형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와 함께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며 신성로마 제국 황제의 관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당시 도저히 프리드리히 2세와 맞서 싸울 세력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프랑스 왕실은 이를 거절하고 교황 대 황제의 싸움에서는 현명하게도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거나 중재자 역활만 했다. 로베르 1세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형의 7 차 십자군 원정길에 따라 나선다.  



(로베르 1세의 14세기 삽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 (Alphonse of Poiteirs, Count of Poitiers, Count of Toulouse (1220 - 1271) )


 루이 8세의 살아남은 3번째 아들인 알퐁스는 1225 년에 푸아티에 백작, 1247 년에는 툴루즈 백작의 타이틀을 얻은 프랑스의 유력 군주였다. 그는 7차와 8차에 모두 형을 돕게 되는데 7 차 때는 상당한 병력을 가지고 이집트로 약간 뒤늦게 도착했었다. 


 -  샤를 1세 (Charles I of Naples  1226 - 1285)

  루이 8세의 살아남은 아들 가운데 막내인 그는 꽤 독특한 이력과 용맹의 소유자이다. 형들과 비교해서 가장 큰 야심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역시 8 차 십자군에서도 언급할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언급할 일이 있을 듯 한데 참고로 나중에 대공위시대에 무주 공산이 된 시칠리아에 침공해 스스로 시칠리아 국왕이되고 이후 될 수 있는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여러가지 타이틀을 노린 야심가였다는 점만 미리 언급해 둔다. 십자군 원정 직전 그는 프로방스 백작 겸 포카궤에 백작 (Count of Provence and Forcalquier) 이었으나 그다지 강한 영주는 아니었다. 



(샤를 1세의 석상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Raffaele Esposito  )


 사실 유럽측에서 십자군에 참가한 주요 영주들을 보면 루이 9세, 알퐁스, 샤를 1세, 로베르 1세로 한마디로 프랑스 왕과 그의 형제들이었다. 거의 가족 십자군 같은 구성이었는데 그럼에도 십자군의 규모는 상당했다고 한다. 


 루이 9세는 십자군 모집을 위해 수년간 모든 노력을 다했고 당시 프랑스에는 한동안 평화시절에 기사들이 넘처나고 있었으므로 대략 15000 명의 정예 병력 (적어도 3000 명의 기사와 5000 명의 석궁수를 포함) 을 소집하는데 성공했다. 아마 이외에도 보조 병력과 보조 인원들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일부에서는 10만에 달하는 대군이라고 선전되기도 했다. 


 하지만 중세 시대에 국왕이 모집할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었고 더구나 당시 루이 9세가 통치한 지역은 나중에 프랑스라고 알려지는 지역의 일부에 불과했다. 마지막으로 헨리 3세에 대비하기 위해 많은 병력을 프랑스에 두고 갈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5000 명 + 알파 정도의 실 전투 병력이 원정에 참가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세 시대에 이는 결코 적은 병력이 아니었다. 아마 군대에 종군하는 보조 인력, 성지 순례자, 기타 사람들 까지 합치면 족히 1.5 만명에 수만명이 더 참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군함은 36 척 정도로 적었는데 베네치아가 협력을 거부했으므로 대신 피사와 제노바를 끌어들어 모자란 수송력을 충당하기로 결정되었다. 


 루이 9세는 이 원정을 위해 무려 150 만 리브르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준비했다고 했는데 원정의 규모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액수라고 생각된다. 


 사실 1248 년의 원정 자체는 순조롭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미 성지 예루살렘은 황제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 그러면 무슨 명분으로 이들이 원정을 준비한 것일까 ?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다시 1230 년대의 우트르메르로 돌아가서 설명을 계속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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