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교착 상태
일단 새로운 지휘관인 아모리 몽포르 ( Amaury VI de Montfort) 는 바로 랑그도크 지방의 반란과 이단을 분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이전 아버지가 정복한 영토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레몽 7 세와 대결이 불가피 했다. 1215 년의 반란 이후 실질적인 툴루즈 군의 주도권은 레몽 7세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1218 년이 다 지나기 전 아모리 몽포르는 피레네 산맥의 작은 도시인 벨케어 (Belcaire) 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1219 년 6월에는 마르망드 (Marmande) 를 함락시켰다. 그해 여세를 모은 아모리는 다시 툴루즈를 공략했으나 레몽 7 와 이단 카타리 파는 이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1220 년 이전까지의 알비주아 십자군의 군사적 성공은 그저 랑그도크 변경 지대로 국한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220 년에 이르러 마침내 랑그도크 지역 내 주요 거점으로 서로간에 뺏고 빼앗기기를 반복한 카스텔노다리 (Castelnaudary) 가 알비주아 십자군의 손에 들어갔다. 다시 1221 년에는 몬트리올 (Montreal)이 레몽 부자의 손에 넘어가는 등 이 지역의 전세는 한마디로 교착 상태로 일진 일퇴의 상황이 반복되었다.
각지에 요새화된 도시들과 마을들을 하나씩 포위 점령하기 위해서 몇개월 씩 지루한 공성전을 벌이는 일이 일상사였다. 초창기 베지에 학살과 이단 화형식은 빠른 속도로 이 지역을 점령하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후반기로 갈수록 지고 난 후 끝까지 개종을 하지 않으면 화형식이라는 선택지 밖에 없는 카타리파가 극렬 저항을 했기 때문에 쉽게 이 지역을 점령할 순 없었다.
이렇게 예상외로 알비주아 십자군은 계속 진행될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5 차 십자군이 끝나고 6 차 십자군 시기까지 이어지게 되며 종국적으론 13 세기 중반까지 이어지게 된다. 결국 알비주아 십자군에 연관된 인물들은 이 십자군의 끝을 볼 수 없었다. 이미 인노켄티우스 3세는 1216 년 서거했고 시몽 드 몽포르도 1218 년 사망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레몽 6세가 1222 년 사망하고 아들인 레몽 7세가 완전히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남부 지역을 호시 탐탐 노리던 필립 2세 역시 1223 년 사망하고 루이 8세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따라서 카타리파 이단을 처리하고 최종적으로는 남부 프랑스를 프랑스 왕실에 귀속시키는 과업은 사자왕 루이 8세와 그 뒤를 잇는 성왕 루이 9세의 몫이었다.
10. 프랑스 왕실의 개입
경건왕 필립 2세 (필리프 2세) 의 뒤를 이은 루이 8 세는 아버지의 숙적으로 불린 사자심왕 리처드 1세와 비슷한 별명으로 불렸다. 프랑스의 상징은 사자가 아니라 백합이지만 프랑스 왕이 사자라는 별명으로 불린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자왕 루이 8 세 (Louis VIII the Lion ) 는 짧은 재위 기간과 아직 왕자였던 시절에 적지 않은 군사적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그는 1187 년생으로 이미 20세 도 안된 시점인 1214 년부터 실지왕 존과 전쟁을 벌여 1216 년에는 윈체스터를 함락하고 잉글랜드의 절반을 장악하는 엄청난 군사적 성과를 거둔바 있다. 결국은 해전에서 패배해 램버스 협정 (Treaty of Lambeth) 을 맺고 물러나긴 했지만 실지왕 존의 형인 사자심왕 리처드에 견줄만한 대담함과 무용을 겸비한 왕자였다.
(사자왕 루이 8세의 후세 상상도.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사실 루이 8세가 일찍 죽지만 않았더라면 프랑스 절대 왕정이 더 빨리 등장했을지도 모를 만큼 이 젊은 왕의 군사적 업적은 눈부셨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루이 8 세는 툴루즈 역시 노리고 있었다. 물론 이를 위해 십자군을 활용할 계획이었다. 1225 년 11월 열린 부르주 공의회 (Council of Bourges) 는 레몽 7를 파문하는 한편 알비주아 십일조 (Albigensian Tenth) 라는 새로운 세금까지 부과했다.
이로써 알비주아 십자군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루이 8 세는 직접 알비주아 십자군을 통솔해 1226 년 6월 랑그도크 지방으로 향하게 된다. 대규모의 병력으로 프랑스 왕이 직접 남하하자 대부분의 도시는 큰 저항 없이 항복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모든 남부 도시들이 순순히 항복하진 않았다. 남부의 아비뇽 (Avignon) 은 당시 이단의 중심지는 아니었지만 남 프랑스의 지배권을 확립하려는 프랑스 왕에겐 꼭 필요한 도시였다.
명목상으로는 독일 황제의 영토였던 이 도시가 항복을 거부하자 루이 8세는 3개월간의 포위 전 끝에 9월달에 함락시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불행히 루이 8세는 남프랑스 정복의 과업을 왕비인 블랑슈 드 카스티야와 루이 9세에게 넘기는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해 11월에 (아마도 이질에 걸려)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39 세 였다.
부왕의 뒤를 이은 루이 9세는 아직 12세였기 때문에 실권은 섭정을 맞게된 모후 블랑슈 드 카스티야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의 딸로 혈통으로 보면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딸 잉글랜드의 엘레오노르의 딸이었다. (즉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헨리 2세의 외손녀)
(블랑슈 드 카스티야의 13세기 삽화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외가 쪽인 플랜테저넷 왕조 보다 카페 왕조를 부흥하는데 힘을 쏟았다. 여기에는 물론 루이 8세가 못다한 과업인 남프랑스 정복 사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당시 남부 프랑스는 거의 독립 국가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카페 왕조의 힘을 남부 프랑스 까지 확장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툴루즈를 비롯한 남부의 왕령 영토가 필요했다.
1227 년에는 루이 8 세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블랑슈 드 카스티야에 의해 알비주아 십자군은 남부의 주요 도시를 함락하고 이단들을 화형대에 불태웠다. 그리고 마침내 적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툴루즈와 레몽 7세를 포위했다.
뛰어난 용맹을 자랑하던 레몽 7세도 이 상황에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1229 년 레몽 7 세는 결국 조건부 항복을 하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블랑슈 드 카스티야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레몽 7세의 후계자는 딸인 잔느 (Jeanne) 밖에 없었다. 그녀를 루이 9세의 동생인 알폰스와 결혼하게 하고 레몽 7세가 죽으면 그들에게 툴루즈를 물려주는 것이 바로 이 제안의 핵심이었다.
이는 한마디로 툴루즈를 카폐 왕조에 양도하란 것이었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던 레몽 7세는 다시 카톨릭 신앙으로 돌아와 이단 척결에 동참하고 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투항했다. 1229 년 4월 12일 파리 조약 (Treaty of Paris) 로 레몽 7세가 이 조건을 수락하므로써 마침내 공식적으로 전쟁은 종식되었다.
이 조약에는 잔느와 알폰스의 자식이 없을 경우 툴루즈를 프랑스 왕에 귀속한다는 조항이 있었는데 결국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 툴루즈는 프랑스 왕령으로 귀속된다. 결국 알비주아 십자군은 이단 척결로 시작해 프랑스 왕권 강화로 마무리된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 이단은 다 처리된 건 아니었다.
11. 알비주아 십자군의 유산
1229 년, 사실상 툴루즈가 프랑스 왕권에 포함된 이후 이단 처형의 불길은 더욱 거세게 솓아 올랐다. 교황 그레고리오 9세 (Gregory IX) 는 1231 년 부터 본격적으로 이단 심문관 (Inquisitor) 제도를 도입하여 이후 수백년간 수백만명의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할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하지만 엄밀히 이야기해서 현대의 상상처럼 모든 이단들이 무조건 잡히는 데로 끔찍한 고문을 거친 다음 마지막으로 자비롭게 화형대에서 산채로 화형당한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이 시대의 이단 심문관들은 길잃은 어린 양들을 자애롭게 교화시켜 진정한 신앙으로 돌아오는 감동 드라마를 선호했다. 거짓 신앙과 우상 숭배에 길잃은 영혼들을 구제하는 것이 참된 성직자의 도리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카톨릭 신앙으로 개종하면 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카타리파와 왈도 파 같은 이단들이 일부는 살기위해, 그리고 일부는 진심으로 정통 신앙으로 복귀했으므로 진짜 감옥에 투옥된 카타리 파는 11% 정도였다고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중세 교회의 모순이 이런 감동 드라마로 해결될 순 없는 일이었고 일부는 툴루즈의 투항 이후에도 독립적으로 끝까지 저항했다.
1244 년에 최후의 거항 거점 중 가장 중요한 카타리파 요새인 몽테귀르 (Montsegur ) 가 함락된다. 이후에 남은 카타리파 들이 케피뷔스 성 (Chateau de Queribus ) 에서 저항하다 1255 년 최종적으로 함락되어 카타리파의 모든 저항 거점이 분쇄된다. 이후에도 남은 카타리파들이 간간히 화형되다 1321 년 마지막으로 카타리파 화형이 있었다고 기록된 이후 카타리파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케피뷔스 성 유적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inpin )
하지만 알비주아 십자군의 유산은 - 바로 이단 심문 - 이후 500 년도 더 넘게 살아남는다. 19세기 까지도 이단 심문관 제도는 살아남았다. 이단 심문관들에 의해 과연 얼마나 많은 인명이 고문당하고 처형당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실치 않지만 마녀 사냥 및 종교 전쟁 시절 까지 합치면 아마 수백만명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그 수치는 연구마다 큰 차이가 있지만)
(스페인의 대 이단 심문관 (Grand Inquisitor) Tomas de Torquemada (1420 - 1498 ) 그는 연평균 40 명, 9일마다 한명 꼴로 무려 50 년간 2000 명을 화형대로 보낸 유명한 이단 심문관이다. 다만 실제로는 기소자의 상당 부분이 미리 도망쳐 목재 인형을 대신 태운 경우도 많았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스페인등 일부 지역에서 이단 심문 제도는 더 무시무시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당시의 교회는 죽은 후 지옥으로 갈 수 있는 가능성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면서 이단 심판을 통해 실제 죽기 전에도 지옥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결국 이렇게 종교의 자유를 계속 억압하고 교회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것이 종국적으로는 신구교의 분리와 종교 전쟁을 벌였는데 결국 이 종교 전쟁을 통해 더 많은 인명이 희생되는 어리석음이 반복되었다. 사실 중요하지도 그리고 필요하지 않은 갈등으로 인해 같은 기독교 인들끼리 서로 수백만명의 인명을 잔인하게 학살한 행위는 사랑을 가르친 그리스도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었다.
오늘날 현대에도 이런 모순이 반복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까 ? 내가 믿는 것이 정통이고 나와 다르면 이단이라는 믿음이 살아있는 한 아마 역사는 언제든지 반복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미 반복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알비주아 십자군은 여기까지 이고 다음은 5차 십자군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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