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4 년 예루살렘 상실 이후 7 차 십자군은 사실상 예루 살렘 상실 및 예루살렘 왕국의 몰락을 확정지는 역활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 완전한 몰락과 상실까지는 한세대 이상 시간이 더 걸렸다. 이후 8 차 십자군 (문헌에 따라서는 7차라고도 하는) 1270 년의 십자군 사이 기간 동안 실제로 이 십자군 보다 더 중요한 여러가지 변화가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이집트와 아시아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이후의 기술은 여기에 맞춰서 진행할 예정이다.
1. 맘루크 왕조의 등장
맘루크라는 단어는 아라비아어 مملوك mamluk 에서 나왔다고 하며 그 의미는 누군가 소유하는 (owned) 라는 뜻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는 남자 노예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이 단어가 당시 이슬람 사회에서는 그 시대에 후진 지역이랄 수 있는 쿠만족이나 킵차크쪽에서 팔려온 백인 남자 노예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후에는 좀더 범위가 확대되어 그루지아 (조지아) 나 체르케스 (Circassian) 인등을 포함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우크라이나 및 러시아 일부, 우즈벡, 그루지야 등지에서 어릴 때 팔려온 백인 노예를 보통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당시 이슬람 사회에서는 노예라고 해도 여러가지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즉 이런 백인 남자 노예들은 가족과 같이 자라게 되고 교육의 기회도 있었으며 커서는 경호를 맡거나 혹은 군인으로 활약하게 되었으므로 노예일지라도 대우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이들을 가혹하게 다루다간 주인도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는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사실 그들은 살던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팔려 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알레포의 맘루크.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어릴 때 부터 주인에 의해 양육된 맘루크는 대개 이슬람 교로 개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커서는 노예 신분에서 해방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자신의 주인에 대해서 충성을 다했기에 믿을 만한 심복이자 경호 부대로써 맘루크는 이슬람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겨졌다. 이 제도는 사실 9세기부터 19세기 까지 오랜 세월 지속된 제도였다. 심지어 나폴레옹의 군대에도 맘루크 부대가 별도로 존재했다는 점은 놀라운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노예 내지는 해방 노예 신분이었던 맘루크가 1250 년을 전후해서 갑자기 급부상한 것은 이집트 내부의 극심한 혼란이 그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유브 왕조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투르크 족 왕조들은 한결같이 제대로된 왕위 세습제가 정착되지 못했으므로 주기적으로 분열되어 싸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군인들의 힘이 강해졌다. 이 과정에서 믿을 만한 심복이었던 맘루크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250 년의 알 만수라 전투에서 파리스 앗 딘 아크타이 (Faris Ad - Din Aktai) 와 바이바르스 알 분두크다리 ( al-Malik al-Zahir Rukn al-Din Baibars al-Bunduqdari) 를 비롯한 맘루크가 큰 역활을 하자 이들의 정치적 힘은 크게 부각되었다.
사실 그 전해의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 ( Al-Malik as-Salih Najm al-Din Ayyub/ Al-Salih 라고 기록한 문헌도 존재 ) 가 죽고 난 후 그 아들인 투란샤가 술탄을 계승한 것은 일반적인 왕위 계승의 법칙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실제로는 맘루크와 연개된 궁정음모의 결과였다.
이 음모에는 여자가 연관되었는데 바로 죽은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의 후궁 샤자르 알 두르 (Shajar al-Durr) 였다. 그녀는 맘루크의 지도자들과 연계해 알 만수라에서 십자군을 대패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정당한 계승자인 투란샤를 제지할 명분도 힘도 없었으므로 투란샤가 알 만수르에 도착해서 술탄의 지위를 계슬할 때 까지는 숨을 죽이고 지냈다.
하지만 투란샤가 맘루크들과 그녀를 경계하기 시작하자 이들은 숙청되기 전 빠르게 선수를 쳐서 1250 년 5월 2일 투란샤를 암살했다. 투란샤가 사실상 마지막 아이유브조의 이집트 술탄이었는데 이로 인해 100 년도 안되는 짧은 아이유브 왕조의 이집트 지배가 막을 내렸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아주 특이한 것이었는데 샤자르 알 두르가 여자의 몸으로 술탄으로 선포된 것이다. 하지만 칼리프가 여자를 술탄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해서 그녀는 맘루크 사령관인 이즈 앗 딘 아이박 ( al-Malik al-Mu'izz Izz al-Din Aybak ) 과 결혼한 후 이즈 앗 딘 아이박이 술탄으로 선포되어 최초의 맘루크조 술탄이 탄생했다. 사실 이와 같은 일은 7 차십자군 패배와 같은 시기인 1250 년에 모두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맘루크조는 바리 왕조 (Bahri dynasty, 알 바흐리 조 (Al-bahri) 라고도 부름) 혹은 바리야 맘루크 (Bahriyya Mamluks) 등으로 불리는 데 실제로는 하나의 왕조가 아니라 여러 맘루크 지배자를 통칭하는 단어였다. 이들은 킵차크에서 건너온 투르크계 맘루크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바리 왕조는 1250 년에서 1382년까지 이집트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 및 시리아까지 지배력을 넓혔으며 몽골의 침임에 맞서 싸웠다. 결국 이 맘루크 왕조와 몽골 제국 사이에 낀 세력은 대부분 멸망하고 말았는데 그 중에 십자군들이 건설한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 세력 및 안티오크 공국, 트리폴리 백작령이 존재했다. (단 키프로스 왕국은 섬 나라라는 지형적 이점으로 더 오래 생존해서 나중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합병된다)
기본으로적 한가지 먼저 이야기 해야 할 점은 이미 이전의 투르크계 왕조 (장기 왕조나 셀주크 투르크 왕조) 나 쿠르드 족 왕조 (아이유브 조) 모두가 제대로된 1인 세습 제도의 전통이 미흡했던 것 이상으로 맘루크 왕조 역시 왕위 계승시에 문제가 많았다는 점이다. 즉 이전 왕조들이 왕국을 케이크 자르듯이 잘라서 계승시키는 바람에 번번이 왕위 계승 후에는 내전이 발생했는데 맘루크 조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기 보단 이를 더욱 심화시켜 기본적으로 왕위를 계승하기 보단 점령하는 체제로 나갔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부적인 권력 투쟁의 정도는 이전보다 더 심했고 하극상 역시 한결 더 심해졌다고 할 수 있다.
2. 우트르메르의 상황 (1250 ~ )
우트르메르의 잔존 십자군 왕국들은 1244년의 재앙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국왕인 콘라드 4세 (예루살렘 국왕으로는 콘라드 2세) 는 좀처럼 이교도와는 성전을 벌일 기회가 없었는데 물론 그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교황파 및 황제에 반기를 든 역도들을 처리하는 문제 때문이었다. 사실상 예루살렘 왕국은 방치된 거나 다름없었다.
이보다 북쪽에는 트리폴리 백작령과 안티오크 공국을 포함하는 북부 십자군 왕국이 보에몽 5세에 의해 통치되는 중이었는데 지금의 레바논과 시리아 일부 지역을 합친 이 소왕국은 자체 방비가 튼튼해서가 아니라 주변이 분열되어 있고 주요 관심사가 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덕분으로 전쟁에서 비교적 무사할 수 있었다.
(연두색 지역이 트리폴리 백작령 및 안티오크 공국 Wikipedia Commons File:Principality of Antioch locator.svg, modified by me through the addition of names and coloring. )
한편 십자군과 기독교 세력에게는 다행하게도 1250 년 이후 다시 이슬람 세계는 크게 분열되었다. 기본적으로 시리아에 남아있는 아이유브 왕조의 잔존 세력들은 이집트의 친척들이 노예들로 교체된데 더 격분해서 이들과 대립했다.
이는 1250 년 너무나 치욕스런 패배를 당한 루이 9세에게 새로운 기회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번엔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되찾을 가능성을 기대하고 왕은 우트르메르로 귀환했다. (사실 이는 희박한 가능성이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전례가 루이 9세에게 희망을 가져다 주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까지 십자군 통제하에 있던 아크레, 자파, 카이사레아 같은 도시에서 지낸 협상의 결과는 무의미한 것이었다.
처음에 루이 9세는 이집트의 새 술탄 아이박과 알레포 및 다마스쿠스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안 나시르 유수프 (al-Malik al-Nasir Salah al-Din Yusuf, / An-Nasir Yusuf) 사이의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수복하고자 노력했다. 안 나시르는 루이 9세가 자신의 이집트 침공을 도와 줄 수 있다면 예루살렘을 넘겨줄 수 있다고 이야기 했으나 루이 9세가 이미 그의 군대를 이집트에서 대부분 상실했고 새로운 군대를 일으킬 돈도 없었으므로 결국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이야기였다.
루이 9세는 동시에 이미 유럽에까지 그 무자비한 명성이 퍼진 몽골과의 협상도 진행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심지어 몽골 제국의 황제 구유크 (Guyuk Khan, 오코타이 칸(태종) 의 장자로 원나라 정종. 바투와 대립했다 ) 에게까지 사절을 파견했으나 그전에 대칸 구유크가 사망하고 말았다. 그 후 제위에 오른 몽케 칸 (헌종) 은 쿠빌라이에게 중국 등 남동아시아 정벌을, 훌라구에게 서남아시아 정벌을 명하는 데 훌라구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아무튼 거침없이 세계를 정복하던 몽골 제국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변방의 프랑스 왕국은 딱히 언급할 만한 상대로 생각도 되지 않았기 때문에 루이 9세의 시도는 전혀 성공할 수 없었다.
다만 루이 9세의 시도는 한가지 성공을 거두긴 했는데 1253 년에서 1255 년 사이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다녀온 플랑드르 출신의 성직자 루브룩의 윌리엄 (William of Rubruck) 의 여행기가 바로 그것이었다. 루브룩의 윌리엄은 루이 9세의 명으로 몽케칸과 협상을 하기 위해 9000 km 를 넘게 여행 카라코룸까지 당도 1254 년 목표에는 도달했으나 결국 목적은 이루지 못한 인물이다. 그는 종종 마르코 폴로에 비견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루이 9세의 노력은 당시 중세 유럽인들의 세계관을 넓히는 데는 도움을 주었을 진 모르지만 이미 쇠락한 예루살렘 왕국의 상황을 회복시키는데는 사실상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더구나 1254 년에는 거의 유령 국왕 (?) 이었던 콘라드 4세 마저 사망하면서 신성로마 제국의 대공위 시대가 시작되고 유럽은 혼란의 시대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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