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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몰락 2





 4. 바그다드 포위전 (Siege of Baghdad, 1258)


 아바스 조는 공식적으로 750 년에서 1258 년 사이 이슬람 세계 (라기 보단 엄밀히 말해 수니파) 의 지배자로써 바그다드를 그 수도로 하고 칼리프들을 배출해왔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본다면 11세기 셀주크 투르크 시대 이후 13 세기 초까지 칼리프의 권력은 사실상 바그다드의 성벽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대로다.


 이와 같은 상황을 변화시킨 것은 34 대 칼리프인 안 나시르 (An - Nasir li-Din Allah. 재위 1180 - 1225) 였다. 칼리프 안 나시르의 시기에는 주변 상황이 아바스 왕조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주변 세력들이 극도의 분열 상태에 빠졌고 셀주크 투르크 왕조는 몰락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안 나시르는 이를 적절히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첫번째 한일은 페르시아 일대를 지배하고 있던 셀주크 술탄 토그룰 3세 (Toghrul III) 에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혼자서는 성공하기 힘들었으므로 호라즘 제국과 연합한 끝에 결국 셀주크 제국을 완전히 와해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반적으로 토그룰 3세를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술탄으로 본다) 칼리프는 정적을 암살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으면서 주변 지역을 어느 정도 장악해 지금의 이라크 일대와 이란 일부를 장악했으며 티크리트에서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영토를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렇게 수복한 영토는 과거 전성기의 아바스 왕조에 비해 작기는 하지만 그가 죽을 무렵에는 더 이상 칼리프는 종교적 상징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바스 왕조의 부흥은 그렇게 오래가진 못했다. 계속해서 서진하는 몽골 제국 때문이었다. 사실 몽골 제국의 서진에 큰 방해가 된 것은 호라즘 제국이나 아바스 조의 조직적인 대응보다는 주기적으로 제위 계승 문제 때문에 몽골 제국이 분열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칸이 죽으면 몽골의 장군들과 황족들은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 원정을 중단하고 쿠릴타이에 참석하고자 카라코룸으로 향했다. 


 그러나 몽케 칸의 시대에 이르자 이제 과거 호라즘 제국으로 알려진 지역은 거의 몽골 제국에 복속되었다. 몽케 칸은 훌라구로 하여금 저 멀리 이집트까지 몽골 지배를 확립하도록 명령했는데 특히 바그다드의 칼리프에 대해서는 만약 순순이 투항하지 않으면 바그다드 까지 완전히 파괴할 것을 명령했다. 


 아바스 왕조의 불운한 마지막 칼리프는 알 무스타심 (Al-Musta'sim  :  al-Musta'sim-Billah Abu-Ahmad Abdullah bin al-Mustansir-Billah  ) 으로 1242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사실 칼리프는 몽골의 침입을 방어하는 데 충분한 병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의 요구를 거절했다. 


 몽골 제국은 중국에서 데려온 궁수부대 부터 우리에게 그루지아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지아는 물론 아르메니아 등 아주 인종적으로 다양한 부대로 구성된 대군을 파견했다. 이들의 병력은 대략 12 - 15 만 정도를 헤아렸는데 아바스 왕조의 병력은 아무리 많더라도 이의 몇분의 1 수준 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숫적인 열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몽골군은 계속된 정복전쟁으로 인해 전쟁의 프로들인 반면 아바스 군은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양적은 물론이고 질적인 측면에서도 몽골군의 압도적 우세가 전쟁 내내 이어졌다. 


 그런데 십자군 전쟁사라는 제목에 걸맞게 글을 써나가려면 아마도 이 정도 선에서 간단히 정리하고 결과만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몽골 군은 아바스 군을 간단히 분쇄한 후 바그다드를 포위했으며 바그다드 함락 이후에는 몽케 칸의 명령대로 아주 끔찍한 학살극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1258 년 2월 10일에 일어난 이 엄청난 유혈 참극은 오늘날까지 과연 이 때 학살된 사람들의 숫자가 얼마인지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게 만들고 있다. 



(1258 년 바그다드 포위전을 묘사한 몽골 측 그림  public domain   ) 


 당대의 기록에는 무려 수백만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록들도 존재하지만 당시의 인구 수준이나 혹은 바그다드 자체 인구를 감안해 보면 생각하기 힘든 숫자이기 때문에 대략 10 만명 선이 더 적당한 숫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그 정도라고 해도 근대적이지 않은 무기를 든 군대에 의해 하룻동안 자행된 학살 가운데서는 가장 악명이 높은 학살이었다. 심지어 십자군 조차 무슬림들에게 그런 학살을 자행한 적이 없었을 정도였다. 


 이후 몽골군은 저항하는 자는 온갖 극악 무도한 방법으로 학살하면서 마침내 시리아까지 접근했다. 1259 년에 다마스쿠스, 알레포 같은 도시 까지 몽골군에 의해 정복되자 이제 십자군 국가들은 이 무시무시한 군대와 직접 접촉하게 되었다.. 



 5. 십자군과 몽골 제국


 사실 초창기에 몽골 제국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던 시절, 일부 십자군 지도자들이나 유럽의 군주 (대표적으로 루이 9세) 는 무슬림과의 전쟁에서 몽골제국과 손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몽골 제국은 그들이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력하고 잔인했으며 더 나아가 유럽인들을 자신들과 동등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몽골 제국은 지금의 러시아 지역을 정벌하고 타타르의 멍에로 알려진 강압적 대리 통치의 시대를 열었을 뿐 아니라 사실 일부 동유럽 지역을 넘보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유라시아 대륙에서 몽골 제국에서 가장 먼 위치에 있던 덕분으로 서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안전했다. 


 서유럽 차원에서 이루어진 몽골 제국과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 (1243 - 1254  Innocent IV) 서신 교환은 지금 기준으로 볼 때는 서로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꽤 웃음을 자아내는 것들이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가 "타타르의 황제 (유럽인들은 몽골 제국을 타타르라고 불렀다) 에게 보내는 서신" 에서는 평화에 대한 갈망을 표현하면서 (사실 그는 앞서 말한대로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온힘을 쏟고 있었다) 더 이상 기독교인을 죽이지 말것과 참된 신앙인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할 것을 역설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에 대해 1246 년 몽골의 구유크 칸은 이에 대한 대답을 편지를 ( 이 편지는 페르시아어로 이루어졌는데 당시 몽골인들이 유럽어를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냈는데 여기에는 교황이 모든 서유럽 영주들의 우두머리로써 몽골 황제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1246년구유크 칸이 교황에게 보낸 편지 원본   public domain   ) 


 물론 몽골의 칸도 기독교로 개종할 생각이 없었고 교황 역시 몽골의 칸의 신하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간의 별 소득없는 서신 왕래였을 뿐이었다. 다만 동서간의 대륙을 가로지른 편지 왕래라는 점은 이채롭다. 
     

 이와 같은 편지 왕래는 사실 교황이 안전거리를 두고 몽골 제국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상황에 놓인 1250 년대 말쯤에 우트르메르의 잔존 십자군 영주들은 사실 몽골 군에 대해서 그다지 환상을 품지 않고 있었다. 특히 안티오크 - 트리폴리의 지배자인 보에몽 6세는 미리 몽골 측에 복종의 의사를 밝히고 시리아 정벌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몽골군에 철처하게 파괴당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사실 몽골군은 주로 파괴자의 명성으로 유명하긴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와 같은 명성을 바탕으로 주변 소국이나 부족들의 복종을 끌어내 그 힘을 보충하는 것이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반드시 모두 정복하고 직접 통치하려고만 하지 않았다는 것은 과거 몽골과 고려의 관계를 보면 알수있다. 물론 그 지역에서 강대국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들은 정복했지만 주변 위성 국가들까지 다 정복하기 보단 봉신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점을 노리고 일부 기독교 군주들 (대표적으로 동방 정교회 계통인 그루지아(조지아) ) 은 몽골의 침입이 있기도 전에 카라코룸을 방문하고 복종의 의사를 밝혔다. 또 모스크바 공국이 작은 공국에서 결국 키에프 대공국을 대신해 새로운 러시아의 중심이 된 것도 러시아의 공국들을 대표해 몽골에 세금을 바쳤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보에몽 6 세가 선제적으로 몽골에 충성하기로 결정한 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은 없는 이야기였다. 사실 그의 장인이었던 아르메니아의 헤툼 1세 (Hetoum I of Armenia) 가 먼저 복종의 의사를 밝혔고 보에몽 6세 역시 여기에 참여해 안티오크 공국은 1260 년에 몽골의 조공국이 되었다. 그리고 몽골의 알레포 및 다마스쿠스 점령에 보에몽 6세도 참가했던 것이다. 이 충성의 댓가로 안티오크 공국은 이전에 무슬림에게 뺏긴 영토 일부를 다시 돌려받기도 했으니 손해보지 않는 장사였다.


 다른 십자군 영주들은 대개는 몽골과 맘루크 왕조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시돈의 영주였던 줄리앙 (Julian of Sidon) 은 대담하게도 몽골이 무슬림 영주들을 침략하는 과정을 영토확장의 기회로 여기고 다마스를 침공했다. 문제는 이 지역이 이미 몽골의 영역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공격의 결과로 몽골의 주요 장군인 키트부카 (Kitbuqa) 의 조카를 살해하는 실수를 범했기 때문에 시돈의 불쌍한 백성들은 몽골 군대로 부터 도륙당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1260 시돈은 몽골 군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대다수 백성들이 살해당하고 영토는 폐허가되지만 영주인 줄리앙은 먼저 이를 알고 탈출하는 덕분에 무사했다. 이 파렴치한 인물은 폐허가된 시돈을 부유한 성전 기사단에 판매한 후 자신 스스로는 성전 기사단원이 되었다. 


 아무튼 당시 몽골제국이 줄리앙의 행위를 단순한 도발이라고 생각하고 십자군 전체가 도발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서 나머지 영주들과 기사단은 무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달리 말하면 이제 몽골 제국이 보기에도 예루살렘 왕국의 잔존 세력은 하나의 국가라고 보기도 힘든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몽골 제국의 서진은 십자군 국가들 직전에 갑자기 멈추게 된다. 그것은 몽케 칸이 1259 년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쿠빌라이 칸과 아리크부카 사이의 권력 투쟁이 발생하게 되는데 훌라구는 쿠빌라이 칸을 지지했다. 아무튼 이로 인해 몽골 제국의 힘은 크게 흔들렸다.


 이런 상황에서 훌라구는 이집트까지 정벌하라는 몽케 칸의 유지를 받들어 이집트 원정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전에 비해 그 위력은 상당히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세계사에 한 획을 그은 전투인 아인 잘루트 전투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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