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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6 차 십자군 2






 3. 신성 로마 제국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과는 다르게 신성 로마 제국은 사실 초기 삼왕조 시대 (작센, 잘리에르, 슈타우펜) 에는 그런 국명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초창기에는 프랑크 제국의 카를 대제가 받았던 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로마 제국이란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신성 제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황제가 없던 시절이랄 수 있는 대공위 시대가 시작되었을 때인 1254 년이다. 


 하지만 아마도 오토 1세가 962 년 로마 제국의 정제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때부터 한가지 분명한 점이 있었다. 당시 게르만 족이 세운 국가들 조차도 꿈꾸던 목표는 바로 자신들이 붕괴시키는데 일조했던 로마 제국을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유럽의 권력자들의 꿈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과 같이 부강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고 다시 자신이 그 위대한 지배자가 되는 것이야 말로 사실 근대까지 내려오는 유럽 권력자들의 로망이었다. 


 그런데 로마 제국이라고 하면 서로마 제국에 한정한다고 해도 서유럽의 대부분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며 더 나아가 로마를 장악하고 있어야 말이 된다. 특히 로마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 이유는 바로  교황이라는 존재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개조로 평가되는 오토 1세는 오늘날 제국 교회 ( Reichskirche ) 정책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게르만족 특유의 사유 교회 ( Eigenkirche ) 제도에 근거한 것으로써 과거 게르만 족들이 사유지에 건설한 교회에 대해서는 토지 소유자인 유력 부족장이나 영주가 재산상의 처분권 만이 아니라 성직자의 임면등의 권한도 보유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 기부된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교회는 로마 교황의 지시를 받지만 사유지를 기반으로한 교회는 그 토지 주인의 지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오토 1세의 즉위 당시 게르만족의 분열상은 극심해서 당시 독일은 도저히 하나의 나라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토 1세는 교회 조직을 근거로 행정망을 건설하고 더 나아가 정신적으로도 자신의 신민들을 통치하기 위해 제국교회 정책을 펼쳤다. 이는 쉽게 말해 성직자의 서임권 - 물론 사유 교회 - 을 황제가 가져가는 형태였다. 


 일단 오토 1세는 자신의 근거지인 작센에서 이를 성공적으로 실행 한 후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도 전국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 제도의 문제는 교회가 황제에 충성할 때만 작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황과 황제의 권력 다툼과 서임권 투쟁은 중세의 필연적인 과정이 되었다.


 역대 신성로마 제국 황제들은 대관을 받기 위해서는 교황을 굴복시키거나 자신의 입맛에 맞는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남하해서 로마로 진격한 경우가 부지기 수였다. 특히 가장 강력한 중세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1세 바바로사 때는 더 나아가 양검론을 내세우면서 황제 역시 신으로부터 지상의 권력을 위임 받았기 때문에 세속 정치에서 교황의 존재는 필요 없으며 제국은 신으로 부터 직접 성별 받았다고 주장했다. 


 양검론과 함께 프리드리히 1세는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물론 교황과 이탈리아의 독립적 지역들을 굴복시키기 위해서) 신성 제국이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 이는 황제가 직접 신으로부터 권력을 받았고 제국이 직접 신으로부터 성별을 받았다는 의미에서 시작된 국명으로 당연히 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후에 여기에 로마라는 단어가 하나 추가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단어가 탄생했다. 


 그 손자인 프리드리히 2세는 어땠을까 ? 당연히 그 역시 황제가 직접 신으로부터 세속 권력을 위임 받았다는 이론을 지지했다. 또 로마 제국 재건이라는 당면 과제를 위해 독일, 이탈리아를 완전히 장악하고 더 나아가 기독교의 성지인 예루살렘 까지 장악하려 했었다. 황제가 욜랑드와 결혼 했던 것은 자신의 제국의 속주를 하나 더 늘림과 동시에 예루살렘을 장악해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한편 교황청에서는 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주는 댓가로 십자군 원정을 종용했다. 황제는 십자군 원정길에 나서긴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방식대로 성지를 탈환하게 된다. 



4. 그레고리오 9 세 vs 프리드리히 2세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인노켄티우스 3 세의 후임으로 교황좌에 오른 호노리오 3세는 사실 프리드리히 2세의 어린 시절 지도교사였다. 호노리오 3세가 교황좌에 오른 후에 그는 자신의 옛 제자가 그다지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다. 특히 십자군 원정에 대해서 황제는 기만적인 자세로 약속을 했다가 계속 어겼기 때문에 교황과의 사이는 틀어질 수 밖에 없었다. 


 1227 년 호노리오 3 세를 대신에 교황좌에 오른 그레고리오 9 세 (Gregory IX 1227 - 1241) 는 전임 호노리오 3세와는 다르게 황제와는 사제 지간의 정도 없었기 때문인지 더 극단적으로 대립하게된다. 사실 교황과 황제의 대립은 중세 서양 역사의 가장 흔한 단골 레파토리이기도 했다. 



 (지오토의 그레고리오 9세의 꿈에 나타난 성 프란시스코. 침대에 누운 사람이 교황 그레고리오 9세  This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in the United States, and those countries with a copyright term of life of the author plus 100 years or fewer.  )


 그레고리오 9세가 1227 년 즉위할 때 쯤 프리드리히 2세 역시 예루살렘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싶어 했으므로 군대를 소집하고 있었다. 당시 프리드리히 2세는 1220 년 이후 대부분 이탈리아에 있었으므로 제국의 중심지는 이탈리아였다. 프리드리히 2세의 정책을 한마디로 이야기 하면 독일은 속주의 일부였다. 


 프리드리히 2세가 생각하는 세계 제국의 중심은 당연히 로마가 있는 이탈리아였다. 여기서부터 독일과 지금의 프랑스 일부, 이탈리아, 예루살렘 왕국을 아우르는 제국을 확고하게 건설하는 것이 황제의 목표였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 제국은 하느님으로 부터 직접 성별을 받았기 때문에 세속에 있어서 교황의 존재는 필요없었다. 황제는 교황의 존재를 계속 무력화 시키는 것을 재위 내내 주된 정책으로 삼으면서 이탈리아를 자신 제국의 중심지로 삼았다. 



 (오토 1세 당시의 신성로마 제국. 프리드리히 2세는 여기에 남이탈리아, 시칠리아, 샤르데냐 및 코르시카 섬을 추가했고 더 나아가 예루살렘 왕국도 추가하려 했다.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Map_of_the_Holy_Roman_Empire_in_the_10th_century.png  ) 


 그런데 이와 같이 독일을 속주의 일부로 생각하는 정책이 나중에 독일이 근대 국가로 나가는 대신 심각한 분열을 겪으면서 영방국가로 나가게 되는 이유중에 하나가 된다. 프리드리히 2세는 대 독일 정책에 있어 제후들의 이익을 위한 협정을 통해 제후들의 힘을 의도적으로 키웠는데 이는 제후들끼리 대립해서 황제를 견제할 만한 세력으로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히려 나중에 황제가 없는 대공위 시대가 시작되면서 제후의 힘은 더 커지게 되고 나중에는 사실상 독립 국가 처럼 분리되고 만다. 이것은 사실 제국이 서서히 분열되는 여러 단계중 하나이긴 했지만 분명 프리드리히 2세의 정책은 독일 통일을 저해한 요소였다. 


 한편 그의 새로운 숙적으로 등장한 그레고리오 9 세는 경건한 신앙인임과 동시에 외골수였다. 그의 제위 기간동안 이단에 대한 처벌 법규가 강화되고 종교 재판소에서 이단으로 판명된 이들을 처벌하는 종교 재판이 본격화 되었다. 앞서 알비주아 십자군에서 설명했듯이 1229 년에는 이단 심문관 (Inquisitor) 제도가 도입되었고 1233 년에는 교황이 이에대한 교령집을 발표해 이단 심문과 종교 재판이 교황청의 지시하에 본격화 되었다. 초기 이단 심문관은 도미니크회 수도사가 담당했다. 


 물론 그레고리오 9세는 선대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와 독일을 동시에 지배하고자 하는 황제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과 성지를 탈환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그러므로 황제와 교황의 극한 대립은 사실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1228 년에는 더 이상 십자군을 미룰 명분이 없어진 프리드리히 2세가 실제 병력을 소집하므로써 6 차 십자군의 서막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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