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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몰락 3






 6. 아인 잘루트 전투의 배경  


 아바스 왕조를 상당히 무난하게 격파한 훌라구와 그의 몽골 가신들은 사실 과도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몽골 제국의 군사적 승리는 사실 아바스 왕조나 시리아/팔레스타인의 독립적인 에미르들이 잘 훈련되어 있지 못하고 분열되었던 반면 적어도 1258 - 1259 년 사이 몽골 제국은 일시적으로 통일성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몽케칸의 죽음 이후 몽골제국의 분열상은 더 극심해지게 되는데 최종적인 승자가 된 쿠빌라이 칸은 대칸의 지위에 오르긴 했어도 사실상 대 몽골 제국이라고 불리는 제국의 동쪽을 지배하는 정도에서 만족해야 했으며 나머지 부분들은 독립적인 몽골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따라서 1260 년에 훌라구와 그의 가신들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마지막으로 그럭저럭 통일성을 유지했다고 볼 수도 있던 몽케칸에 비해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다. 하지만 몽골군은 이전의 전투에서 너무 쉽게 승리를 거두었기에 적을 꽤 얕잡아 보고 있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바그다드의 아바스 조나 이집트의 맘루크조는 별 차이가 없어보였던 것이다. 1260 년 훌라구는 이집트의 지배자 쿠투즈 (Qutuz) 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동서의 왕중의 왕인 대칸으로부터 우리의 칼을 도망쳤던 맘루크 쿠투즈에게. 너는 다른 나라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생각해보고 우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너는 우리가 어떻게 광대한 제국을 정복했으며 더렵혀진 땅을 정화하고 무질서를 바로잡았는지 들었을 것이다. 우리는 광대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이를 학살했다. 너는 우리 군대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과연 너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는가 ? 어떤 길로 너가 우리를 피할 수 있다는 말인가 ?   


 우리의 말은 빠르고, 우리의 화살은 날카로우며, 우리의 칼은 천둥과 같고, 우리의 심장은 산처럼 단단하며, 우리의 병사는 모래알처럼 많다. 요새나 무기로는 우리를 막을 수 없다. 신에 대한 너의 기도도 우리에 맞설 수 없다. 우리는 눈물이나 비탄에 감동받지 않는다. 오직 우리에게 보호를 구하는 자만이 안전할 수 있다. 전장의 불길이 일기 전에 답장을 서둘러라. 저항할 경우 너는 가장 끔직한 참극을 겪을 것이다. 우리는 너희들의 모스크를 산산조각내고 네가 믿는 신의 약함을 드러낼 것이며 그 다음 너의 아이들을 노인들과 함께 죽일 것이다. 현재 너만이 우리의 진군을 막는 유일한 적이다. " 


 사실 이 편지가 1258 년쯤 훌라구가 본래 몽케칸으로 부터 받은 병력을 유지하는 상태에서 전해졌다면 어느 정도 사실성을 가질 수 있었으나 1260 년 즈음에는 실제 몽골군이 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다소 넘어서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몽골군의 가장 강력한 힘은 바로 그 명성이었으므로 훌라구는 이를 최대하 이용하기로 한 것 같다. 


 하지만 쿠투즈 역시 그다지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이 맘루크는 저절로 그 자리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암투를 거치고 전장을 넘나들면서 그자리에 올라갔다. 쿠투즈는 답장을 서두르는 대신 사신들의 목을 베어 카이로의 성문앞에 매달므로써 전쟁 수행 의지를 불태웠다. 사실 쿠투즈는 그냥 몽골의 침입을 방어할 준비를 한게 아니라 아예 팔레스타인 방면으로 먼저 진군함으로써 공세적 작전을 세웠다.    


 과연 쿠투즈가 어느 정도 몽골 제국의 사정을 알고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알기 힘들지만 적어도 몽케 칸이 죽은 후 대칸의 지위를 두고 징기즈칸의 후손들이 다투는 상황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소문이 퍼지지 않았을리는 만무하다. 


 당시 훌라구 역시 대칸의 후보 중 하나였으므로 병력을 모두 이집트 방면에 투입할 순 없었으며 결국 그가 직접 이집트에 가는 대신 두개의 만인대 (투멘, tumen) 을 두명의 가장 신뢰하는 장군인 나이만 (Naiman Turk) 와 키트부카 (Kitbuqa Noyan) 에게 주어 이집트의 불손한 술탄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대략 당시 몽골군의 병력은 2만명 수준이었던 것 같다. 여기에 소수의 그루지아, 실리시안 아르메니아 군이 동맹군으로 따라갔는데, 당시 속국들은 누가 대칸 레이스에서 승리할 지 알 수 없었기에 대규모 병력을 지원해준 곳은 많지 않았다. 따라서 모래 처럼 많은 병력은 허풍에 불과했다. 솔직히 쿠투즈가 끌고온 병력도 비슷한 수준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몽골군의 승리의 중요한 요인에서 사람들이 흔히 간과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병력면에서 우세였다. 몽골 제국은 여러 민족을 통합했고 몽골인이 중심이 되기는 했어도 정복사업에는 피정복 국가나 속국들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병력을 투입, 병력면에서 우세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승리를 이끌어 나갔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는 일본 원정시 고려를 동원한게 대표적인 사례다. 앞서 아바스 왕조 전쟁 때도 다양한 속국 군대와 중국인을 포함한 피정복 민족들이 동원되었다. 사실 이런 방식은 몽골 뿐 아니라 여러 제국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이기도 하다.


 몽골군은 전투의 프로였기에 우수한 기동성과 기마술만 있으면 자신들이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적을 상대해서 늘 이길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병법의 기본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세한 군사력으로 적을 압도적으로 제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인 잘루트 전투를 앞두고 몽골군은 주변에서 병력을 더 충원하기 희망했다. 특히 이들은 십자군 국가들과 기사단이 자신들을 지원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지니고 있었다. 


 후세의 인식으로는 서방측이 무슬림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군에 도움을 요청하는 부분이 더 기억에 남기는 했지만 사실 1260 년에는 반대로 몽골측이 십자군 측에 도움을 청했다. 몽골군의 규모가 이집트 군에 비해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으므로 주변에서 어떻게 병력을 끌어 모으면 병력면에서 다시 우세를 유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십자군이 태생적으로 무슬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기대를 건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에 프랑크인이라고 불린 십자군들도 바보는 아니었다. 그들은 냉정하게 이 전투에서 쌍방간에 전력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쿠투즈와 새롭게 그의 수하가 된 맘루크 바이바르스가 뛰어난 장군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느 한쪽을 지지하는 것 보다 그냥 중립을 선언하는 편이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1260 년에 있었던 시돈의 파괴는 몽골군의 잔인성을 부각시키며 몽골군이 맘루크 조 보다 더 위험한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여기에 당시 교황 알렉산드르 4세 (Alexander IV) 는 십자군이 몽골군에 협력하는 일을 금지했으므로 괜찮은 핑게거리도 있었다.    



(시돈을 공격하는 키트부카. 14세기 삽화     public domain  ) 


 사실 역사의 가정이란 알 수 없는 부분이긴 해도 몽골군을 도왔다면 십자군 왕국이 속국의 형태로 잠시간 더 존속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엔 그 생각을 하긴 힘들었고 당시에 생각하기엔 가장 합리적으로 누가 이겨도 보복을 받지 않기 위해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십자군을 지배했다. 당시쯤 되면 남은 십자군 세력은 성지 회복 보단 그냥 존속 자체가 목적인 (사실 그것도 힘에 부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들은 현실적으로 중립을 선택했다. 따라서 역사상 프랑코 - 몽골 연합 (Franco - Mongol Alliance) 은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7. 아인 잘루트 전투 (Battle of Ain Jault : 1260) 


 아인 잘루트는 갈릴리 남동부로 사실 십자군 영토에 매우 가까웠다. 따라서 쿠투즈는 아크레 근방에서 군대를 보급하기 희망했는데 신중하게 중립을 지키기로 결정한 십자군들은 여기에 동의했다. 한편 몽골군도 맘루크 군대가 갈릴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적의 주력을 분쇄하기 위해 갈릴리로 진격했다. 




(아인 잘루트 전투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pMaster  ) 


 양측 군대가 아인 잘루트에서 마주친 것은 1260 년 9월 3일이었다. 현지 지형에 익숙하고 미리 진을 치고 있었던 쿠투즈는 유리한 높은 지형을 미리 차지하고 있었다. 여기서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정예 부대의 치고 빠지는 전술이 꽤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몽골군도 이런 류의 전법에 강했지만 이것이 몽골군만의 전매 특허는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이 모르고 있던 비장의 히든 카드가 맘루크 군에 있었다. 몽골군이 바이바르스의 부대를 분쇄하기 위해 돌격을 감행하자 이집트 군은 후퇴하는 듯 했다. 그러나 함정이었다. 현지 지형을 잘 몰랐던 몽골군이 적을 추격하자 곧 그들은 이집트군의 주력이 매복한 지형에 갖히게 되었다. 


 몽골군은 죽기 살기로 싸우며 분전했지만 이미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 맘루크군 역시 용감하게 싸웠으므로 전투는 아주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높은 고지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쿠투즈 조차 맘루크 군을 독려하기 위해 아예 투구를 벗어버리고 (따라서 병사들이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전투에 뛰어들었다. 쿠투즈와 그의 병사들은 "오 이슬람 (O Islam)" 을 크게 외치며 싸웠고 결국 승리할 수 있었다. 키트부카는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가지 더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전투에서 소형 대포의 일종인 미드파 (midfa) 가 사용되었다는 것인데 그 위력은 강하진 않았지만 폭발음으로 인해 몽골군과 말들에 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대표에 사용된 화약에 대해서는 14세기 초 아랍 화학서와 군사 서적에도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아인 잘루트의 승리는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몽골군은 더 이상 무적이 아니었고 그들의 진격은 팔레스타인에서 멈추고 말았다. 1260 년대 이후의 몽골 제국은 여전히 강력하긴 했지만 사실 더 이상 하나의 제국은 아니었고 서로간에 몇개의 국가로 분리된 후 상호간의 전쟁과 견제, 동맹이 이어졌으므로 이전처럼 강력한 정복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사실 아인 잘루트 전투의 결과로 몽골의 정복 전쟁이 막을 내렸다기 보단 몽골 제국이 더 이상 정복 전쟁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어려운 시점에 나온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소식을 들은 훌라구는 복수를 다짐했으나 당장에 이집트가 아니라 다른 몽골 군주인 베르케 (Berke) 가 더 위협적인 존재였기에 결국 복수는 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몽골군의 복수는 결국 다른이가 대신 해주었다. 쿠투즈가 이집트로 귀환하던 도중에 암살 당했던 것이다. 암살의 배후는 맘루크 조에서 일반적으로 그러하듯이 그의 자리를 노리는 다른 맘루크였는데 이 경우에는 바로 바이바르스였다. 


 아인 잘루트 전투의 승리는 사실 바이바르스의 작전에 따른 것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뛰어난 지략을 지닌 장군으로 맘루크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으므로 술탄의 자리를 노릴 만한 능력과 야심이 있었다. 하지만 바이바르스의 야심은 단순히 술탄이 아니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는 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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