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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24일 일요일

십자군 전쟁사 - 십자군의 몰락 5





 10. 1260 년대 후반 십자군 국가를 둘러싼 국제 정세


 그런데 1263 년 이후로 십자군 잔존 국가의 대부분 남은 지역들이 바이바르스에게 하나씩 점령당할 때 왜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을까 ? 사실 도와줄 가능성이 있는 국가는 많았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직접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던게 현실이었다. 


 일단 유럽의 경우 신성 로마 제국의 초기 삼왕조의 마지막 왕조인 호엔 슈타우펜조의 마지막 황제 콘라드 4세 (예루살렘 국왕으로는 콘라드 2세) 가 1254 년 사망했다. 이후 유럽에는 정치적 혼란기가 도래하게 되는데 이 시대를 대공위 시대라고 부른다. 당시의 혼란상은 황제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교황청 마저 우려할 정도였다. 


 이 시기에는 단지 독일 뿐 아니라 유럽의 유력 제후와 왕들이 서로 자기 지지세력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자리에 앉히려고 했으므로 (예를 들어 라인 지역 제후의 지지를 얻은 영국의 콘월의 리처드. 그는 헨리 3세의 동생이었다. 한편 프랑스도 자기 지지세력을 제위에 앉히려 시도하는 등 유럽은 극도에 혼란상에 빠진다 ) 유럽 전체가 정치적으로 다소 혼란한 상태였다. 


 다만 이 시기에 십자군을 편성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라고 하면 역시 프랑스였다. 성왕 루이 9세가 아직 건재한 데다 사실 십자군 역사상 가장 많은 기사와 제후, 국왕이 참전한 국가가 프랑스였다. 하지만 루이 9세가 십자군을 다시 편성한 것은 사정상 어쩔 수 없이 한참 후였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1268 년 바이바르스가 난공불락의 요새인 아크레를 포기하고 안티오크로 향할 때 유럽 말고도 안티오크 공국을 도와줄 상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몽케칸 시절 신하의 예를 하고 속국으로 편입된 몽골 제국이었다.    


 하지만 몽케칸의 사후 제국은 분열되었고 보에몽 6 세가 충성을 바친 상대였던 훌라구 역시 1265 년 죽은 후 일 한국의 제위는 아바카 칸에게 계승되었다. 아바카 칸의 모후인 도쿠즈 카툰 (Doquz Khatun) 은 케라이트 족의 공주로 당시 페르시아 등지에서 융성하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다. 사실 그들은 431 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바 있지만 그래도 기독교에 대한 매우 동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들은 아바카 칸 (Abaqa Khan) 은 사실 불교쪽에 가까웠는데 이런 점만 봐도 몽골인들이 종교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일 한국의 정신적 지도자인 모후의 영향과 안티오크 자체가 자신의 신하라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리고 바이바르스에게 당한 선대의 치욕을 갚기 위해서라도 사실 아바카 칸이 다른 이유가 없었다면 안티오크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몽골 제국 내부의 내전이 문제였다. 사실 일 한국과 맘루크 왕조는 서로 손을 잡고 동서로 일 한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1267 년 킵차크 한국의 칸 베르케 (Berke) 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몽케 테무르 (Mongke Temur) 가 칸으로 즉위하자 대칸이었던 쿠빌라이는 양국간의 전쟁을 그만 둘 것을 명했고 몽케 테무르는 여기에 일단 동의했다. 그러나 일한국의 아바카 칸과 차카타이 한국의 바라크 (Baraq) 와의 전쟁은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안티오크는 외롭게 바이바르스의 침공을 막아내야 했다.  



 11. 안티오크 공방전 (Siege of Antioch, 1268) 


 안티오크 역시 잘 요새화된 도시였지만 난공불락이라고 부를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1 차 십자군 전쟁에서 소개했던 바 사실 꽤 견고한 성벽을 지니고 있어 쉽게 함락 시킬 수 있는 도시는 아니었으며 아마도 병력이 충분하고 지휘관이 유능했다면 바이바르스를 격퇴하거나 혹은 최소한 오랜 시간 도시를 방어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안티오크의 당시 상황은 이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그다지 유능하지 않았던 지배자 보에몽 6 세는 거처를 좀 더 안전한 트리폴리로 옮겨간 상태였으므로 군대의 지휘는 다른 사람이 맡았다. 당시 안티오크 방어를 담당한 것은 시몽 망셀 (Simon Mansel) 이었는데 불행히 보에몽 6세와 마찬가지로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도시의 튼튼한 방벽을 최대한 방어하려 하는 대신 무의미하게 병력을 내보내 숫적으로 우세한 맘루크 군대와 싸웠다. 


 물론 이 무모한 군사행동은 필연적인 패배를 가져왔고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병력을 더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심지어 시몽 망셀 본인은 사로잡혔다. 바이바르스는 포로로 잡힌 시몽 망셀을 이용해 안티오크 수비대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수비대는 거절했다. 이에 더 분노한 바이바르스는 5월 18일 총공격을 명했는데 성벽은 튼튼했지만 이를 수비할 병력이 모자란 탓에 제대로 방어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안티오크 자체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쉽게 함락되었다. 


 그 다음 벌어진 것은 무차별 학살과 납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4만명의 기독교도가 학살당하고 10만명이 노예로 잡혔다고 하나 당시 안티오크 인구 수준을 감안할 때 다소 과장된 숫자긴 하겠지만 그럼에도 엄청난 수의 주민이 학살당하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려나간 것이 확실하다. 이날 맘루크 군대의 잔인성은 과거 십자군이 보여주었던 것과 견주어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안티오크 공국의 마지막 지배자인 보에몽 6 세는 자신의 공작령과 주민들을 지키기 보다는 어떻게든 바이바르스의 칼을 피해보려고 하는 것이 지상 과제인 듯 아예 전투 자체에 참가를 하지 않았다. 결국 조부인 보에몽 4세 시절 때 부터 이어져 온 안티오크 - 트리폴리 십자군 국가 (지금의 레바논 일대 및 시리아 일부) 는 이제 트리폴리와 인근 지역 이외에는 모두 맘루크조의 영역이 되었다. 


 안티오크 함락 이후 십자군 잔존 국가들의 영역은 아주 심하게 위축되어 있어 사실상 해안가의 몇개의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기능을 하는 도시는 1187 년 예루살렘 상실 이후 사실상 왕국의 수도 역활을 해온 아크레 였다. 그리고 일단 트리폴리도 보에몽 6세의 최후의 보루로 한동안 남게 된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사실 유럽에서는 다음 십자군에 대한 열기가 끓어오르진 않았다. 이전 십자군들의 괴멸적인 피해로 인해 많은 제후과 기사들, 그리고 국왕들은 십자군의 대한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단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루이 9세였다. 루이 9 세는 내정에 있어서는 큰 성과를 보인 국왕이었는데 십자군 원정만큼은 매우 재앙적인 결과만 가져왔던 역사가 있다. 루이 9세는 십자군의 잔존 세력이 이제 거의 멸망단계에 이른 매우 위태로운 상황임을 알고서 8 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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