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파리스크르 전투 (Battle of Fariskur)
일반적으로 후퇴는 군인에게 치욕스런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임전무퇴의 정신은 때때로 전략적 후퇴보다 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1250 년의 루이 9세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를 인정하고 더 이상의 피해없이 퇴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을 지혜였다. 이제 객관적인 전력에서 적에 열세한 상황에서 적국의 내란만 바라고 기다라는 것은 결국 재앙을 스스로 재촉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대로 2월 27 일 알 만수라로 돌아온 새 술탄 투란샤는 본격적으로 이잡트 군을 통솔했다. 물론 알 만수라 전투를 통해 급부상한 맘루크 바이바르스도 함께였다. 투란샤는 일단 적의 후퇴를 완전히 봉쇄하기 위해 알 만수라 인근의 십자군 기지와 다미에타의 십자군을 분단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십자군의 병참선은 길지는 않았지만 현지 지형에 익숙하고 수로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이집트 군이 그 보급선을 노리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이집트 군의 군함이 보급선을 공격했고, 결국 머지 않아 십자군은 심각한 물자 부족, 그 중에서도 식량 부족에 시달리게 된다. 십자군은 이 난국을 타개하려 적의 봉쇄선을 뚫고 물자를 전달하려 했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군사와 배만 잃었다. 당시 이집트 군은 본래 비잔티움 제국에 의해 개발된 고대의 네이팜탄 내지는 화염 방사기 같은 무기인 그리스의 불을 이용해 수로를 통해 접근하려는 십자군 군함들을 불태웠다고 한다.
이렇게 큰 손실을 입으면서 시간이 지나자 확실히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등에 업은 이집트 군의 우세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십자군은 적과의 결정적인 교전을 벌이기도 전에 기아와 질병으로 괴멸할 절망적인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야 루이 9 세는 강화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도 루이 9세는 시리아 해안의 일부 도시와 예루살렘을 교환하자는 도저히 이집트 군이 들어 줄 것 같지 않은 조건의 협상을 시도했다. 그는 거의 현실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 거의 다 이긴 이집트 군이 그런 굴욕적인 협상을 맺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성왕 루이 9세. 여러가지 업적을 남긴 카페 왕조의 명군이지만 십자군 원정은 그의 흑역사로 남게되었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비록 강화의 여지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그냥 항복하기엔 아직 병력을 많이 보존하고 있던 십자군은 마지막 힘을 내서 혈로를 뚫기로 결정하고 1250 년 4월 5일 밤 대규모 탈출 작전을 펼쳤다. 다미에타를 향한 필사의 탈출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을 모르고 있지 않을 이집트 군은 십자군을 즉각 추격했다. 도망자 신세가 된 십자군은 질서 정연한 후퇴를 시도한 것이 아니라 거의 패닉에 빠져 도주했는데 가장 결정적인 실수는 그들이 운하를 건널 때 쓴 부교를 태우는 것을 깜빡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집트 군은 이 부교를 타고 별 어려움 없이 이들을 추격할 수 있었다.
이후 파리스크르에서 포위당한 십자군과 이집트군의 전투는 사실 거의 의미없는 전투로 쌍방 모두 전투 시작 부터 십자군의 참패와 이집트 군의 승리를 예상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십자군 사이에 왕이 항복을 명했다는 거짓 소문이 퍼졌고 상당수는 그냥 항복했으나 전투 중 및 포로로 잡힌 병사들 가운데 수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높은 몸값을 받을 수 있었던 귀족과 루이 9세는 일단 생명은 무사히 건질 수 있었으나 일반 병사는 그렇지 못한 것이다. 루이 9세와 귀족들은 모니아트 아브달라 (Moniat Abdallah ) 의 마을 근처에서 사로잡혔는데 이 시점에서 루이 9세는 살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알 살리히 ( al-Salihi) 라는 환관에게 투항했다. 성왕 루이 9세 치곤 씁쓸한 항복이었다.
그의 형제인 샤를 1세와 푸아티에 백작 알퐁스 역시 사로잡혀 대법관 이브라힘 벤 로크만 (Ibrahim ben Lokman) 의 알 만수라 저택에 감금되었다. 이들을 감시한 것은 환관인 알 무아자미 (Sobih al-Moazami) 였다. 다른 귀족들도 대체로 로크만의 저택에 감금되었다고 한다.
물론 투란샤가 이들을 다치지 않게 감금한 이유는 바로 몸값 때문이었다. 무려 40 만 리브르 (livres tournois - 당시 프랑스 왕국의 1년 수입이 125만 리브르 ) 금액이 몸값으로 지불되어 루이 9세와 12000 명의 병사들이 집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이들이 고국으로 귀국한 날짜는 5월 8일이었는데 꽤 신속하게 몸값의 지불과 포로 석방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당연히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비롯해 획득한 영토를 모두 반환해야 했다. 훗날 5월 8일은 타미에타 탈환일로 국경일로 기념하게 되었다.
13. 7 차 십자군 이후
한편 이 충격적인 패배의 실상을 그대로 전하기 어려웠던 일부 십자군들은 의도적으로 거짓된 정보를 흘렸다. 그것은 루이 9세가 위대한 승리를 거두어 카이로를 획득했으나 카이로가 배신하여 곤경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이 내용이 프랑스에 널리 확산되자 이른바 양치기 십자군 (Shepherds Crusade) 운동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이 괴상한 운동을 주도한 것은 헝가리 마스터 (Master of Hungary) 라고만 알려진 수수께끼의 인물인데 프랑스에 살던 헝가리 출신 수도승으로 생각되고 있다. 이런 민중 십자군 운동은 대개 수도승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이상할 것은 없는 구성이었다.
아무튼 이 헝가리 수도승은 스스로 성모 마리아를 접견했으며 성지로 루이 9 세를 구원하기 위해 양치기들을 이끌고 가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 말을 믿고 따르는 민중의 수는 기록에 의하면 6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이 루이 9세의 모후인 블량슈 드 카스티유와 만나기 위해 파리로 접근하자 블량슈 드 카스티유는 소요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른 두려움에 이들이 파리 시내를 지나는 것을 제한했다.
다행히 대비의 걱정과는 달리 이 양치기 십자군은 본래가 갈데 없는 군중들의 모임이었고 뚜렷한 목적이 없었기에 대부분 그해를 넘기지 않고 스스로 해산되었다. 일부는 도적때로 변신하여 당시 사회적 약자인 유태인을 약탈하거나 몰려다니면서 소요사태를 일으켰으므로 블량슈 드 카스티유는 이들을 해산하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위협해 이들을 진정시켰다.
아무튼 7 차 십자군의 재앙적인 진실이 밝혀지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해 본국으로 귀국한 루이 9 세는 거듭된 십자군의 실패로 인해 이전처럼 십자군의 열의를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예루살렘 상실은 3차 십자군 당시만 해도 매우 큰 이슈였으나 7차 십자군 실패이후엔 기정사실 처럼 여겨지기에 이른다.
다만 루이 9 세 본인은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바로 새로운 원정을 시도하기에는 7 차 십자군에서 잃은 손실이 너무나 막대했다. 이런 점을 보면 프리드리히 2세의 6차 십자군이 그야말로 외교적으로 실리만 취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오래가지 않을 예루살렘 탈환이었으나 좀처럼 가능하지 않아 보이는 무혈 탈환을 이루어 낸 것은 알 카밀과 프리드리히 2세라는 독특한 그 시대의 군주들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루이 9 세의 실패 이후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잔존 세력은 더 이상 예루살렘 회복의 가망성을 믿지 않게 되었으며 예루살렘 왕국은 패망한 상태에서 해안가의 일부 지역만 성전 기사단과 구호 기사단, 그리고 지역 귀족세력의 힘으로 간신히 독립을 유지했다. 그리고 사실상 북쪽에 반독립 상태로 존재하는 안티오크 - 트리폴리 공국/백국 연합만이 비교적 온전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 역시 곧 멸망할 운명이기는 했다.
다시 8 차 십자군이 결정되는 1270 년 사이의 우트르메르 및 주변 국가의 정세로 넘어간다. 참고로 이야기 하면 5차와 6차 십자군을 하나로 묶어서 설명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전에도 설명했듯이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 숫자를 붙여가며 십자군을 모집했던 건 아니었다. 이는 후세에 구분을 위해 붙인 구별이었다) 이 렇게 계산하는 경우 7 차는 6차, 그리고 8차는 7차가 된다. 여기서는 5/6 차 십자군이 시기적으로도 어느 정도 구별되고 이들을 이끄는 인적 구성과 결과도 달랐기 때문에 별개로 구별한다.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오해 없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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