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자군의 모집
교황이 십자군 모집을 선언하자 예상과는 달리 꽤 많은 기사와 영주들이 참전 의사를 밝혔다. 당시에 많은 기사들과 영주들은 십자군에 참여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살았는데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 저 멀리 수년간 살아서 도달할 수 있을 지도 모르는 성지까지 가는데 부담을 느끼는 영주나 기사들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교황이 프랑스 남부에서 이단 해결을 위해 십자군을 모집한다고 하자 많은 기사와 영주들이 여기에 호응했던 것이다. 당시는 지금과는 다른 중세시대로 죽고나서 천국에 들어가는 일을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지옥에 떨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도록) 많은 이들이 꽤 진지하게 고민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교황에 생전에 지은 죄를 은사해 주는 다양한 특전을 제공하기로 하자 여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집된 것이다.
하지만 항상 인간세상이라는 게 그러하듯이 모두가 그와 같은 순수한 이유로 모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제사보다는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이들도 있기 마련인데 가까운 곳에서 대규모 약탈의 기회가 보이기 때문에 낀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나중에 대거 참여하기에 이른 프랑스 왕실에게는 무엇보다 반 독립적인 프랑스 남부의 영주들을 왕령에 귀속시킬 절호의 기회였다.
1209 년 십자군의 모집은 매우 순조롭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십자군 모집을 위해 교황이 파견한 특사는 바로 시토회의 수사인 아르노 아말릭 (Arnaud Amalric) 이었다. 아직 이단 심문관 (Inquisitor) 이라는 제도가 설립 되기도 전이지만 그는 잔인성이나 극단성에서 초창기의 이단 심문관으로 봐도 무리가 없는 인물이었다. 사실 이단 심문관이란 제도가 바로 이 알비주아 십자군 이후로 생겨난 것으로 무방한데 다만 그 본격적인 제도로써의 설치는 1231 년 교황 그레고리오 9 세 부터였다.
이전의 모든 십자군이 그러하듯 본질적으로 교회가 군대를 소유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실제 군사 작전에는 기사와 영주 뿐 아니라 세속의 사령관도 필요했다. 이 일에 적합한 인물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사람은 4차 십자군에 참여했다가 다시 프랑스로 귀국한 시몽 드 몽포르 (Simon IV de Montfort, Seigneur de Montfort-l'Amaury, 5th Earl of Leicester ) 였다. 그는 나중에 영국 의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몽 드 몽포르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시몽 4세, 아들이 시몽 5세임. 일반적으로 국내에는 다 시몽 드 몽포르라고 번역하지만 영어로는 아버지는 Simon de Montfort the elder, 아들은 Simon V de Montfort 라고도 부른다 )
알비주아 십자군은 1209 년 중순 프랑스의 리용에서 집결했다. 대략 그 병력은 1만명 정도였다고 하는데 주로 북프랑스 지역의 기사와 영주들이 주축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 툴루즈의 레몽 6 세는 재빨리 태도를 바꿔 카타리파를 탄압하겠다고 말을 바꿨다. 그러나 십자군은 그대로 진행되었고 레몽 6 세 역시 파문이 풀리지 않았다.
남부 랑그도크 지역의 귀족들은 이 군사 행동에 매우 당황했다. 처음에는 간섭을 거부했던 지역 영주들도 당장에 자신의 영지를 빼앗길지도 모르는 상황에 직면하자 이단 척결에 동참하기로 했다. 따라서 초반에 베지에 까지는 알비주아 십자군은 그다지 피를 흘리지 않고 진격할 수 있었다.
십자군은 우선 알비와 카르카손 (Carcassonne ) 방향으로 향했다. 카르카손은 지금도 아름다운 고성들이 남아 있는 프랑스 지방 도시로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곳에서 십자군은 지역 영주인 레몽 (Raymond Roger Trencavel) 에게 협조를 요구했다. 그는 알비, 카르카손, 그리고 베지에의 자작이었는데 처음에는 협조할 뜻을 보였으나 이내 의도를 확실히 알 수 없는 십자군에게서 영지를 방어할 목적으로 카르카손의 방어를 강화했다.
레몽 자작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었던 십자군은 일단 그의 영지에서 이단들을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가는 길에 일부 이단을 그래도 평화롭게 처단한 다음 이단 심문의 역사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도시중 하나인 베지에로 향했다. 여기서 부터 중세 이단 심문의 피바람이 몰아친다는 말은 약간 감상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사실 적절한 이야기였다.
4. 베지에 학살 (The massacre of Beziers )
베지에 (Beziers ) 역시 아름다운 고성과 동화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으로 알려진 남부 프랑스의 소도시이다. 13세기 초반에는 다른 랑그도크 지역과 비슷하게 이곳에 카타리파가 꽤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카타리파 신자들이 다수 존재했지만 정통 카톨릭 신앙을 믿는 신자 역시 상당수 존재했다.
십자군은 이 도시로 향하기 전에 사절을 보내 그곳에 있던 정통 카톨릭 교도들에게 카타리 파와 운명을 같이 하고 싶지 않으면 그곳을 모두 떠나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마도 설마 자기들까지 어떻게 하겠냐는 생각을 했는지 대부분 카톨릭 신자들은 재산과 집을 놔두고 가기를 거부했다.
1209 년 7월 21일 십자군이 이 도시에 도달하자 많은 십자군들이 대체 카타리파와 평범한 카톨릭 교도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지 궁금해 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아르노 아말릭은 자신만의 방법이 있었다. 7월 22일 도시를 공격할 때 그는 나중에 이단 심문에서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
"Neca eos omnes. Deus suos agnoscet" (Kill them all, God will know His own.)
"그들을 모두 죽여라 그러면 신께서 알아볼 것이다."
한마디로 그냥 다 죽이란 말이었다. 결국 그날 베지에의 모든 시민들 - 심지어 카톨릭 교회 신부들과 교회로 피신한 이들까지 - 이 모두 학살당했고 도시는 거의 파괴되었다. (현재 있는 베지에시는 이 대학살과 파괴에서 재건된 것으로 1215 년부터 15세기까지 재건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당시 시몽 드 몽포르에 의하면 약 2만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베지에 자체의 인구가 그정도는 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로는 5000 - 6000 정도 되는 인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중세 시대에 인구 2만이면 꽤 큰 도시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와 같은 극악무도한 행위는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전범으로 재판을 받더라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지만 중세 시대 기준으로 봐도 좀 심한 것이었다. 대개 도시를 함락하고 약탈과 학살을 하는 경우가 드물진 않았지만 별 저항도 하지 않은 도시를 전부 파괴하고 시민을 모두 학살한 행위는 드물었기 때문이다. 베지에 이전에도 이단에 대한 심판이나 혹은 처형이 간혹 있었지만 이단이란 이유로 (일부는 이단도 아니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인명을 학살한 건 처음이었다. 차라리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한 4차 십자군이 그래도 도덕적으로 덜 비난 받을 만 했다.
이와 같은 자비를 모르는 대량 학살은 분명 기독교 교리 자체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그리스도는 분명 사랑을 가르쳤는데 그의 가르침을 전해야 하는 교회는 대량 학살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더구나 베지에 학살은 기사들이나 병사들이 한 일이 아니라 분명 교황 특사인 아르노 아말릭의 지시였다.
하지만 베지에는 사실 시작에 불과했다. 앞으로 수많은 이단 심판과 종교 전쟁에서 서로를 이단으로 지목하고 아무 죄책감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처형하는 일이 수백년간 지속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베지에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중세 이단 심문의 피바람과 화형장의 연기가 피어오른 셈이었다.
베지에의 학살이 일단락 된 후 그들은 아직도 남아있는 수많은 이단들을 척결하기 위해 카르카손으로 향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