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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바다의 전사들 - 독일 U 보트 전사(戰史) 6



 13. 지중해 전투


 앞서 이야기 했듯이 히틀러는 그의 근시안적인 생각으로 41년 10월 27일 24척의 유보트들을 지중해로 파견했다. 그 이유는 지중해를 장악하려고 하는 영국 해군을 공격해서 북아프리카에서 싸우는 롬멜의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과 골치아픈 동맹인 이탈리아를 돕기 위해서 였다.


 하지만 이 결정으로 미국 동부 해안을 마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에 되니츠는 충분한 유보트를 동원할 수가 없었다. 히틀러의 판단이 연합군을 도운 수많은 사례중에 하나이지만 이는 유보트들에겐 재앙같은 일이었다. 사실 지중해는 북대서양 처럼 넓은 바다가 아니었기 때문에 잠수함들이 숨기가 덜 수월했고, 유보트들이 활약하기 좋은 바다가 아니었다. 여기에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영국군이 철통처럼 수비하는 폭 14km 정도의 좁은 해역이 지브롤터 해엽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지브롤터 해엽을 우주에서 바라본 사진 : This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 was created by NASA )



 영화 '특전 유보트'에서도 나오지만 이 좁은 바다를 통과하는 것은 유보트 선원들 입장에서는 생명의 안전을 담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유보트 함장들은 꽁수들이 있기는 했다. 그것은 염분과 해류의 차이로 인해 대서양에서 지중해로 흘러가는 해류를 타면 엔진을 켜지 않고도 통과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잠수한 채로 가만 있으면 운이 좋은 유보트는 엔진을 켜지 않고 소리없이 지중해로 들어갈 수 있었다. 1944년 5월까지 무려 64척의 유보트가 지브롤터 해엽을 통과하여 지중해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운이 좋은 경우였고, 영화에서는 그렇게 운이 좋지 못했다.


비록 이렇게 전체 전쟁에서는 실책으로 평가할 만한 일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보트들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순 있었다.


 일단 유보트들의 활약을 설명하기에 앞서 지중해 전선에 대해서 간략한 설명을 해야할 필요가 있다. 연합국과 추축국이 해군력, 공군력을 동원해서 지중해에서 확보하려 했던 것은 바로 보급로였다.


 일단 해상 제국인 영국의 입장에서는 지브롤터에서 수에즈 운하를 통해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지중해 항로가 매우 중요했다. 이는 영국의 주요 식민지인 인도와 그 주변 지역을 연결하고 있었다. 만약 영국이 이를 상실한다면 영국의 생명선 하나가 끊어지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지중해에서 영국의 3대 거점은 지브롤터, 몰타, 그리고 수에즈 운하가 있는 이집트 식민지였다.


 한편 이탈리아 입장에서는 리비아 및 에티오피아 식민지를 비롯한 별 도움은 안되지만 나름대로 힘들게 얻은 식민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부 지중해 항로를 확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특히 이는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북아프리카 주둔 영국군을 능가하는 전력을 지닌 이탈리아군이 영국군을 공격하고 나서 대패하고 난 이후 독일군이 도와주러 오면서 독일에도 중요한 항로가 되었다.


 따라서 지중해 전투의 핵심은 자신의 수송선단을 보호하면서 반대로 적의 수송선단을 괴멸시키는 것이었다.



(지중해의 위성 사진 - 당시 영국군은 지브롤터에서 수에즈 운하에 이르는 라인을 확보하려 했고, 이탈리아는 이와 수직으로 교차되는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서 리비아에 이르는 라인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고 이러한 라인이 수직으로 교차되는 곳에 바로 몰타 제도가 있었다. This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 was created by NASA.)


 1940년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추태에 가까운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 군을 도와주기로 결정한 히틀러는 그해 10월 소수의 유보트들을 호랑이굴 같은 지브롤터 해엽을 통과시켜 지중해로 이동시키는 한편, 독일 공군의 함선 공격 전문 부대인 제 10항공군단을 12월에 이탈리아에 배치했다. 또 41년 2월에는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아프리카 군단이 리비아에 상륙했다. 이들은 비록 숫적으로는 열세일지 몰라도 독일군에서 가장 정예한 부대들이었다. 사실 이런 정예 부대들을 투입하게 한 것 만으로도 이탈리아는 연합군을 도와 독일의 발목을 잡은 셈이었다.


  한편 1940년 11월 11일, 영국 해군은 타란토 항에 틀어박혀 있던 이탈리아 해군을 항공 모함을 이용해 공습을 가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이 때 영국 해군이 입은 손실이라곤 항공기 2대 뿐이었다. 훗날 이 항모를 이용한 공습에서 큰 감명으로 받은 일본해군이 진주만 기습을 추진했을 정도로 성공적인 공습이었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패배하는 수상함 전력과는 달리 이탈리아 해군의 잠수함과 독일 유보트들은 상당한 성과를 거둔 편이었다. 이들은 추축국 항공기 부대와 연합해서 영국이 지중해 방면에 투입한 H 전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H 전대는 초창기 항모 1척(HMS 이글)을 비롯, 전함 4척과 경순양함 5척, 구축함 17척을 가진 빈약한 함대였으나 곧 항공 모함 HMS 아크로열을 비롯한 추가 전력을 확보하여 추축국에 맞서 처절한 수송 작전을 벌이게 된다.


 당시 지중해 전투에서 가장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바로 지브롤터 - 수에즈 축과 이탈리아 - 북 아프리카 축에 교차점에 있는 작은 섬인 몰타였다.



(몰타섬의 위치 : 이 시칠리아 섬 남쪽에 있는 작은 섬은 당시 영국령이었다. : CCL 에 따라 복사, 출처 : Self-made by User:3meandEr from English Wikipedia , 저자 : User:3meandEr, 복사 허용, 저자 표시)



 하필 이 섬을 영국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추축국 입장에선 여간 껄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발진하는 성가신 영국 공군 때문에 추축국의 수송 선단은 큰 방해를 받았다. 반면 영국 해군은 이 섬을 연결하는 축선을 지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특히 몰타에 지속적으로 보급을 해서 이곳에 있는 공군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1940년 치열한 항공전 끝에 몰타 섬에 남은 전투기는 단지 3대 뿐이었다. (당시 주민들과 부대에선 이 금싸라기 같은 비행기에 신념, 희망, 박애 라는 이름까지 붙였다고 한다)


 영국군은 1940년 8월의 허리 작전 (operation Hurry - 음 빨리 작전인가 ?) 을 통해 몰타섬에 방공용 허리케인 전투기 12기 보급한 이후 다시 11월에 코트작전 (operation Coat) 를 통해 허리케인 전투기 12기를 공급하려 했다. 그러나 추축국 역시 이를 지켜만 볼 이유가 없었다. 코트 작전에서 발진한 허리케인 전투기 12기 중 8대는 바다에 추락하고 말았다.


 1942년 8월 13일에 시작된 페데스탈 작전 (operation pedestal) 은 이러한 몰타 수송 작전 중 가장 처절한 전투였다. 이 때 영국군은 항모 3척, 전함 2척, 순양함 7척, 구축함 24척, 상선 14척을 동원해서 스핏파이어 전투기 36기와 주요 물자를 몰타 섬에 공급하려 했다.


 한편 독일군도 기를 쓰고 이를 막으려 했다. 유보트들과 독일 공군이 벌떼 처럼 몰려들자 몰타 주변 해역은 아수라 장으로 변했다. 헬무트 로젠바움 함장이 이끄는 VIIB 형 유보트인 U - 73 은 이 전투에서 2만 6천톤급 항모인 HMS 이글을 어뢰 4발로 격침시켰다.


(HMS 이글. 사실 상선을 개조해서 만든 항모도 아니고 (전함을 개조한 것) 본격적인 공격항모를 잃은 것은 영국 해군으로써는 큰 아픔이었다. This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worldwide. )


 이 전투에서 영국 해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상선 14척 중 9척이 격침당하는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몰타에 항공기와 물자를 보충하는데는 나름 성공했다. 영국군은 지중해 전투기간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까지 무려 140기의 항공기를 몰타에 전달할 수 있었다.


 이렇듯 유보트들은 열악한 상황에서도 연합군의 지중해 수송선들과 군함들을 계속 격침시켰다. 영국 해군은 페데스탈 작전 이전에도 큰 손실을 입었다. 그것은 영국해군이 자랑하는 최신예 항모인 아크 로열을 잃은 것이다.


 1941년 11월 13일 항모 아크 로열은 몰타에 항공기들을 공급하던 중 프리히드리 구겐베르거 (Friedrich Guggenberger) 의 U - 81 (VIIC형) 의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어뢰를 맞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아크 로열 : This work is in the public domain )



(활짝 웃는 프리히드리 구겐베르거 (Friedrich Guggenberger) 함장 : 출처 Deutsches Bundesarchiv (German Federal Archive), Bild 183-B13197  저자 : Schwarz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그러나 유보트 역시 피해는 적지 않았다. 독일도 유보트 7척과 숙련된 승무원들을 연합군에 헌납했던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입한 병력을 생각해보면 아주 나쁘지 않은 전과였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했듯이 좀더 대서양에 집중해야 할 때 독일군은 지중해에 병력을 투입하느라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쟁에서 좀 더 불리한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14. 북극해 전투


 사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것은 연합군으로써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입장이긴 했지만 영국해군과 독일해군에게는 각자 할 일이 더 생긴 셈이었다. 연합군은 소련에 물자를 공급하기 위해 새로운 수송 선단을 북극해로 보냈고, 유보트들도 먹이를 따라 이 위험한 바다로 나갔다.


 당시 연합군은 미국의 무기 대여법에 따라 소련에 450만톤에 달하는 막대한 물자를 공급했다. 이 물자를 가득 실은 수송선들 중 8%는 소련에 가지 못하고 도중에 침몰했다.


 그러나 이 북극해 전투는 사실 유보트들에게는 수치스러운 전과였다. 1941년 북해에서 침몰한 연합군 수송선 81척 중 유보트의 실적은 3척에 불과한 반면 이 위험한 바다에서 침몰한 유보트들은 이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이 북극해는 정말 위험한 바다였다. 조금만 주의를 소홀히 해도 배 전체가 얼음으로 뒤덥혔고, 이 얼음을 방치할 경우 결국 얼음의 무게 때문에 배가 전복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가혹한 추위와 파도, 빙산은 모두 위험했다. 이 바다에서 유보트와 연합군 모두에게 가장 큰 적은 상대가 아니라 바로 가혹한 기후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노르웨이에서 출격한 독일 공군이 큰 전과를 올리게 된다. 1942년 5월 27일 소련으로 향하던 연합군의 PQ 16 수송 선단은 독일 공군의 공격을 받고 7척을 손실했다.


 그 다음 6월 27일  출발한 PQ 17 수송 선단은 전함 티르피츠와 중순양함 히퍼, 포켓 전함 어드미럴 셰어와 뤼초프가 그들을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암호 해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수송 선단은 독일 함대를 피하기 위해 분산했는데, 오히려 이것 때문에 독일 공군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결국37척 중 11척만이 소련에 도달했고, 항공기 2500대, 전차 400대, 차량 4000대가 북극해로 빠져 버렸다.


 이 엄청난 피해로 인해 연합군 수송 선단은 42년 12월까지 대 소련 수송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42년 12월에 이르러 수송이 재개되었을 때 발생한 바렌츠 해 전투 (Battle of the Barents Sea) 는 엉뚱하게도 되니츠를 도왔다.



(바렌츠해 전투 지도 : This artistic work created by the United Kingdom Government is in the public domain  )



 이 바렌츠 해 전투에서 수송선단 JW51B 를 공격한 독일 수상 함대는 한척의 손실도 입어서는 안된다는 히틀러의 모순된 명령때문에 적극적으로 공격을 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이 수송선단은 결국 소련으로 물자를 수송할 수 있었다.


 보고를 받은 히틀러는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은채 불같이 화를 냈고, 독일 해군을 해체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독일 해군의 주요 함정을 모두 해체하라는 명령을 받은 되니츠는 히틀러를 설득해 주력 함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43년 1월 되니츠는 경질된 뢰더 제독을 대신해 독일 해군의 새로운 참모 총장이 되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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