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영국 해군의 대응 (39년에서 41년 사이)
앞서 이야기 했듯이 비록 부족한 전력이었지만 독일 유보트들은 영국 상선들을 상대로 놀라운 전과를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당연한 이야기 이지만 영국도 그냥 얌전히 당할 이유는 없었다. 지상에서는 40년 프랑스 전투 때 까지 별 하는 일이 없던 영국 육군과는 달리 해군은 이미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전쟁이 선포되고 몇시간 되지도 않아 영국의 여객선 아테니아 (Athenia) 는 독일 U - 30 의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이는 여객선을 보조 순양함으로 오인한 유보트의 실수였지만 영국으로써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다시 시작했다는 징조로 받아들여졌다. 사실 이후의 일을 생각하면 이러한 우려는 타당한 것이었다.
1939년 9월 23일에는 북해전역에서 독일의 잠수함 작전에 대한 모든 제한이 풀렸고, 10월 4일에는 이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 이는 결국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재판이었다.
(윈스턴 처칠경 :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
당시 아직 수상에 자리에 오르기전 해군 장관 (Lords Commissioners of the Admiralty) 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이런 유보트들의 준동을 억제하기 위해 과감하게 항공모함들을 투입했다.
당시 유보트들은 앞서도 설명했지만 사실 주로는 물위에 떠있다가 공격을 받거나 하면 잠수하는 일종의 반잠함에 가까웠기 때문에 항공기를 이용한 수색은 아주 효과가 좋았다. 그 효용성은 대전 중 후반에 충분히 입증되었다. 따라서 당시 영국 항모들이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면 유보트들에게 큰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영국 해군은 1차 대전 당시 유보트에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이에 대한 준비가 별로 되어 있지 않았다. 심지어 해군 항공기들은 유보트를 탐지했을 때도 이를 효과적으로 격침시킬 무장도 탑재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니 처칠의 조치는 오히려 영국 해군의 금쪽같은 항모들을 위협에 노출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 항모 커리지어스가 격침되고 아크 로열호는 간신히 유보트의 어뢰 공격을 피했다. 이런 큰 피해를 입자 처칠도 귀중한 항모를 대잠 작전에서 뺄 수 밖에 없었다.
이후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되자 앞서 설명했듯이 독일 유보트들을 살판이 났다. 이 독일 유보트의 '행복한 시간' 동안 독일 유보트들은 3개월 동안만 80만톤의 연합군 선박을 격침시켰다. 당시 대서양에 투입할 수 있던 유보트들은 평균 14척에 불과했는데도 말이다. (이는 작전중인 유보트를 말함. 보유한 유보트의 숫자가 아니라는 점을 주의하자)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는 연합군 상선 : This artistic work created by the United Kingdom Government is in the public domain )
1940년에 입은 엄청난 피해로 인해 영국의 선박 보유량은 크게 감소했다. 그러나 영국은 미국에서 대규모의 선박을 수입할 수 있었다. 미국이 참전하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50척에 달하는 구형 구축함이 미국에서 영국으로 대여되었다.
1941년 2월에 되자 영국은 구축함을 대거 보충하고 새로운 전술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41년 2월, 영국 수송선단의 목적지는 리버풀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를 지휘할 서부 항로 사령부 (Western Approaches Command) 역시 리버풀로 이동했다. 그해 4월에는 영국 공군 해안 경계사령부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서부 항로 사령부는 항공기를 동원해 대잠작전을 더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또 사령부는 더 효율적인 대잠 작전 교리의 개발 및 독일 잠수함들의 추적 작전을 수행했다.
또 영국은 41년에 이르러서는 영국내 조선소에서 120만톤의 신규 선박을 건조하고, 미국으로 부터 무려 700만 톤에 달하는 선박을 주문했다. 이 덕에 영국은 그해 360만톤의 선박을 잃고도 오히려 41년 말에는 선박 보유 톤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 중 유보트가 격침시킨 것은 210만톤)
이로써 1941년초 절반으로 감소했던 수송량은 다시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다. 이런 연합국의 물량상의 우위는 전쟁의 승패를 미리 보여준것과도 다름 없었다. 따라서 일본이 그해 12월 진주만을 기습해서 미국을 전쟁에 참전시킨 것은 독일의 패배를 확정지은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행위였다.
8. 연합군의 신기술과 대잠 작전 교리
한편 영국도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난 이후 새로운 대잠 전술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영국 해군이 초기에 쓰던 음파 탐지기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음파 탐지기는 유보트의 프로펠러 소음등을 탐지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초창기 음파탐지기는 제대로 사용하려면 우선 구축함의 프로펠러 부터 꺼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반면 이미 1차 대전 당시부터 개발되어 당시 투입된 능동 소나인 ASDIC (애즈딕, Active Sonar 의 일종) 은 이보다 훨씬 쓸만했다. 이는 수중으로 음파를 쏘아서 적의 잠수함의 위치를 잡아내던 장치였다. ping하는 이 소음은 아주 특징적이어서 Active ping 이라고도 불리웠다. 영화 특전 유보트에서도 이 핑 하는 소리는 쉽게 들을 수 있다.
(능동 소나 (Active sonar) 의 원리 : 음파를 쏘면 물체에 닿으면 다시 반사된다. 이를 이용 물속에 있는 적의 잠수함을 찾아낸다. CCL 에 따라 복사. 저자 : Georg Wiora (Dr. Schorsch))
물론 이 애즈딕이 꼭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이 초기 능동 소나는 잠수함이 바로 아래 있으면 정확히 알아내지 못해 폭뢰를 떨어뜨릴 때 위치를 정확히 잡지 못하는 문제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그 특유의 핑 소리 때문에 이 소리를 들으면 유보트들은 일단 자리를 피했다.
당시 애즈딕은 감지 범위가 2700m 정도였다. 또 15노트 이하에서만 효과적이라는 단점도 같이 가지고 있었다. 또 아무래도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는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사실 애즈딕이 아주 큰 역활을 한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물속에 있는 잠수함의 위치를 잡아낼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진보였다.
또 한편으로 영국 해군은 울프팩 전술을 역이용하는 방법도 개발해냈다. 이른바 HF/DF (별명 '허프 더프') 라는 장치였다. 당시 울프팩 전술을 다시 자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일단 xB -Dienst 같은 통신 감청 부대나 항공 정찰을 통해 적의 수송선단의 예측로를 예상한 다음. 여기에 적당한 간격으로 유보트들이 초계하도록 한다. 그리고 유보트 중 하나가 수송선단을 발견하면 이를 사령부에 연락하고 사령부는 이를 토대로 다른 유보트에 연락을 해 공격을 지시한다.
그러니 울프팩 전술에서는 통신이 절대적이었다. 따라서 이 통신을 감청하는 고주파 방향 탐지기를 이용하면 그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허프 더프였던 것이다.
또 한편 영국 해군은 41년에 또다른 해전사상의 혁명을 일으켰다. 영국 구축함의 머리 위로 레이더가 장착되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신무기를 이용해서 영국 해군의 구축함들은 눈으로 볼 수 없던 범위까지 볼 수 있었다.
또 설명하지만 당시 유보트는 사실 반잠함에 가까웠다. 그들은 대부분 디젤엔진을 가동시켜 물위로 떠 다니다가 꼭 필요한 경우에는 잠시 잠수해서 배터리로 작동했다. 그러니 이 레이더는 수상의 유보트들에게도 효과가 있었다.
한편 영국군의 대잠 무기들도 여러 탐지 장치 처럼 진화했다. 당시 영국해군이 대잠 작전에 가장 유용하게 쓰던 무기는 폭뢰 (爆雷, depth charge) 였다. 이 무기는 일종의 폭탄으로써 일정한 깊이 - 물론 잠수함이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깊이 - 가 되면 폭발하는 무기였다. 폭탄이 잠수함을 직접 타격하면 더 좋긴 하지만 근처에서 터져도 잠수함 선체에 큰 손상을 입히고 더 나아가 고압의 바닷물이 새어 들어와 잠수함을 침몰 시킬 수 있었다.
(영국의 Mk VII 폭뢰(드럼통 처럼 생긴 것)를 장착하는 수병들 : This artistic work created by the United Kingdom Government is in the public domain )
(폭뢰를 터뜨리는 HMS Ceylon, 1944년 1월 5일 촬영된 것이다. This artistic work created by the United Kingdom Government is in the public domain )
당시 구축함들은 애즈딕이나 음파 탐지기, 허프 더프등을 이용해 바닷속으로 숨은 잠수함의 위치를 알아내고 그 위를 지나가며 폭뢰를 떨어뜨렸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가라앉은 폭뢰는 터지게 된다. 그래서 폭뢰를 떨어뜨린 구축함은 빠르게 그 위를 지나갔다. 그러면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배 뒤에서 폭뢰가 터지는 것이다.
반면 레이더 등에 유보트가 걸거나 육안으로 보이면 연합군 군함들은 대포를 이용 유보트를 격침시켰다. 또 잠수한 유보트를 격침시키기 위해 잠수함 위로 폭탄을 쏟아 붇는 대잠 박격포인 헷지호그(Hedgehog)등도 등장했다.
(헷지호그 대잠 박격포 (Hedgehog anti submarine mortar) This artistic work created by the United Kingdom Government is in the public domain )
영국군은 상선을 여러척 묶어서 호위함의 호위아래 가는 선단의 개념을 일찍부터 발전시켰다. 그들은 40척을 묶으나 80척을 묶으나 방어 범위에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자 더 큰 규모로 상선단을 결집시켰다. 이중에서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바로 폭탄이나 연료처럼 폭발하기 쉽거나 인화성이 강한 물질을 탑재한 수송선이 공격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이 배가 폭발하면 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인근의 아군 배도 무사하지 못했다.
한편 점차 수송선단의 호위가 철저해지자 대담한 유보트 선장들 중에는 아예 적 수송선단의 한가운데로 부상해서 함포로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호위함들이 다른 수송선이 다칠까봐 함부로 공격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유보트들도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결국 이렇게 41년 이후 영국 해군이 새로운 신무기로 무장하자 유보트들도 더 이상 행복할 순 없었다. 이 해에 결국 유보트의 영웅 귄터 프린도 전사했다. (그런데 귄터 프린의 최후에 대해서는 현재는 약간 설명이 엇갈린다. 과거엔 영국 구축함에 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 영국군이 대응하기 전에 다수의 유보트를 투입했다면 독일 유보트들은 영국을 고사시킬 수 도 있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41년에 이르러 영국이 어느 정도 대비를 하게 되고 1941년말 막대한 물량을 가진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자 이 기회는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조기에 다수의 유보트를 건조하자는 되니츠 제독의 거듭된 간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한 히틀러의 근시안적인 실책이 연합군을 살린 것이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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