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튀니스 상륙
일단 목표가 튀니스로 정해졌으니 프랑스에서는 십자군을 소집하느라 분주했다. 구체적인 병력 수준은 알려져있지는 않았지만 루이 9세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만큼 적어도 1만 이상의 병력을 편성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이 병력이 목표로 삼은 튀니스는 당시 하프시드 (Hafsid) 왕조의 영역이었다. 베르베르 족의 무하마드 빈 아부 하프스 ( Muhammad bin Abu Hafs ) 이름을 딴 이 왕조는 지금의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일부 (주로 사람이 살수 있는 북부 지역) 를 지배하는 왕조였다.
당시 하프시드 왕조는 스스로 칼리프를 자청하고 있었는데 1270 년 당시 지배자는 칼리프 무함마드 1세 (알 무스탄시르. Muhammad I al-Mustansir ) 였다. 이 칼리프는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관대한 정책을 펼쳤던지 기독교에 동적적이라는 소문이 퍼져있었다. 특히 이와 같은 루머는 스페인의 기독교 왕국들과 좋은 관계 덕에 더 퍼졌던 것 같은데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이웃 무슬림 왕국들을 견제하기 위한 용도 이상은 아닐 가능성이 높았으나 당대에는 이를 과도하게 해석해서 기독교로 개종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잘 못 소문이 났었다고 한다.
루이 9세는 뛰어난 통치자이긴 했지만 종종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결정들을 내리곤 했는데 아마도 이 소문을 과도하게 믿은 것이 분병했다. 1270 년 7월 1일 프랑스에서 출발한 루이 9세의 십자군은 7월 17일에는 순조롭게 지금의 튀니스에서 가까운 카르타고의 옛 폐허에 상륙했는데 상륙한 루이 9세는 샤를 1세의 원군을 기다리는 한편 칼리프에게 개종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루머가 꽤 퍼졌던 것인지 샤를 1세 역시 형에게 칼리프의 개종을 시도하도록 권유했다고 한다)
하지만 하프시드 왕조는 칼리프 (Caliph 아랍어로는 칼리파 (Khalifah) 에 더 가까움) 를 자칭한 왕조이다. 칼리프란 무슨 뜻인가 ? 그 의미는 칼리파트 라술 알라 (Kahlifat rasul Allah : 신의 사도의 대리인) 이다. 즉 신의 사도인 예언자 무함마드의 뒤를 잇는 이슬람 세계의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어처구니 없는 서신을 받은 칼리프는 루이에게 전쟁터에서 결판을 짓자는 답신을 보냈다. 칼리프를 개종시키려는 시도는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루이 9 세도 그런식으로 일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샤를 1세의 원군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샤를 1세라면 분명 튀니지와 하프시드 왕조 정복에 큰 흥미를 느낄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샤를 1세는 때마침 시칠리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느라 8월 25일 이전까지는 튀니지에 상륙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나마 루이 9세에게 다행한 것은 분노한 칼리프가 군대를 이끌고 프랑스 군을 공격하지 않은 정도였다.
4. 루이 9세의 최후
루이 9세는 항간에 떠돌던 소문은 과도하게 믿은 것이 분명하지만 당시 튀니지의 상황은 전혀 몰랐던 것이 분명하다. 사하라 사막 바로 위에 위치한 튀니지 일대는 그래도 지중해와 가까워 살만하지만 7-8 월에는 무척 덥다. 지금도 평균 최고 기온은 7-8 월이면 섭씨 32 도 이상이다. 이런 높은 기온에서는 음식물이 쉽게 상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다고 하겠다. 당시는 냉장고라든지 기타 위생적으로 음식을 보관할 방법이 없던 시절이었다. 무엇보다 건조한 이 지역에서 깨끗한 식수를 구하기가 대단히 힘들었다.
그 당연한 결과로 상륙한지 얼마 안되 프랑스 군 진영에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다. 병사들은 이 병을 위장이 뒤틀리는 병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이질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아무튼 프랑스 군은 채 7월이 지나기도 전에 전염병으로 무수히 죽어나가서 칼리프 무함마드 1세가 십자군을 격파하기 위해 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이걸 지켜보는 일인 것 같았다.
루이 9 세는 56 세로 당시로는 사실 적은 나이가 아니었다. 그의 젊은 아들도 먼저 프랑스 군 진영에서 죽었다. 그리고 루이 9세도 앓기 시작하더니 1270 년 8월 25일 '예루살렘' 이라는 단어를 마지막으로 하고 숨을 거두었다. 오랬동안 루이 9세는 선페스트로 사망한 것으로 믿어졌으나 현대의 연구자들은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루이 9세 역시 이질로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다. 페스트가 유행하려면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루이 9세의 죽음. Jean Fouquet 작. public domain )
불행히 동생인 샤를 1세는 루이가 죽은 25일에서야 튀니지 해안에 상륙했으므로 형의 임종을 지킬 수 없었다. 프랑스의 왕위는 루이 9세의 아들인 필리프 3세 (Phillip III ) 가 이었다. 아무튼 샤를 1세는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튀지니 포위를 진행했다. 일단 전투가 진행되자 샤를 1세는 형과는 달리 곧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샤를 1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이 튀지니에서도 발휘되었을 뿐 아니라 날씨도 서서히 선선해 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청난 야심가이면서도 현실주의자인 샤를 1세는 사실상 이 일대를 정복하기 쉽지 않거니와 정복하더라도 유지하기 쉽지 않음을 곧 깨달았다. 칼리프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지역 주민들이 고분고분 기독교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아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샤를 1세와 프랑스군은 간략한 평화 조약을 맺고 10월 30일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된다. 이렇듯 뛰어난 장군이라면 물러날 때도 적절히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연히 병력을 온전하게 보전해 돌아간 샤를 1세는 자신의 여러가지 야망을 계속해서 실행에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야망에는 달성할 순 없었지만 라틴 제국의 황제가 되는 것도 있었다)
한편 루이 9세의 튀니스 상륙을 전해 들은 바이바르스는 튀니스에 원군을 파견해서 이들이 이집트 본토에 상륙하기 전에 분쇄하려는 계획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루이 9세의 사망과 연이은 소식을 듣고는 이를 취소했다. 또 샤를 1세는 영국의 에드워드 왕자 (훗날의 에드워드 1세) 가 이끄는 십자군과 힘을 합쳐 튀니스를 정벌하려 했지만 상황이 틀어지자 이를 포기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이끄는 병력은 대신 성지로 향하게 되는데 후세에 이를 마지막 십자군이나 혹은 9차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다음에는 9 차 십자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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