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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15일 일요일

히틀러의 바다의 전사들 - 독일 U 보트 전사(戰史) 8



 
 17. 모두에게 잔인한 전쟁


 유보트 전사를 쓰면서 한가지 생각한게 있다면 바로 전쟁에 참가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말로 이야기 하면 유보트에 탑승했던 병사들과 유보트에 맞섰던 연합군 병사들과 그리고 위험천만한 바다를 건너는 수송선단의 탑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들 모두가 언제 침몰해서 차가운 바다에서 죽을 지 모르는 운명이었다.


 연합군의 상선에 탑승한 선원들은 민간인의 신분이었지만 바다에서 전쟁이 벌어질 동안 이들의 생명은 가장 보장받기 어려운 것 중 하나였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 민간인 보다 해군 군함을 탄 수병들이 더 안전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6년간을 지속적으로 바다에서 공격받은 영국 상선들의 경우 특히 그러했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은 자국의 상선의 숫자가 1차 대전과 비교해서 2000척이 감소했다는 사실에 매우 우려했다. 이는 배의 평균 크기가 1차 대전 시기에 비해서 2배 이상 커지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즉 대형 상선으로 주요 물자를 실어날랐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배의 숫자가 줄어드는 대신 배의 크기는 커지는 현상은 이를 공격해야 하는 유보트들에게는 희소식이었다.


 독일 해군에게는 기뻐해야 하는 사실이 이것 보다 많았다. 일단 1차 대전때 보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물자의 양이 훨씬 많아졌는데, 특히 석유의 경우 심각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영국군이 좋아하는 전략 폭격을 시행하기 위해서 4발 중폭격기 500대를 동원할 경우 340만 리터의 항공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연료는 전부 해상으로 수입해 오는 것이었다. 이것 말고도 식량의 절반과 철과 다른 금속들, 그리고 미국에서 사들이는 무기와 탄약들이 모두 바다를 통해 수송되야 했기 때문에 대서양에는 유보트들의 사냥감이 풍부했고, 한동안 유보트들은 만선의 꿈 (?)을 쉽게 이룰 수 있었다.



(유보트로 부터 어뢰 공격을 받은 연합군 상선 :  This artistic work created by the United Kingdom Government is in the public domain  )



 물론 상선들도 대비를 갖추긴 했다. 상당수의 상선에 1차 대전 때 쓰던 구형포들이 적어도 1,2문씩 장착되었는데, 사실 별로 효과는 없었지만 선원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는 효과는 있었다. 여기에 도움은 안되긴 하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CAM 이라는 항공기 발진용 상선이 있어서 가끔 독일군의 항공기와 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상선 발진 항공기들은 불운하게도 대부분 추락했다.


 이보다는 영국이 개발한 호위함을 대동하는 수송 선단이 더 큰 도움이 되었다. 영국군은 대규모의 상선단을 조직해 호위함으로 보호해서 다녔고, 이는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대담한 유보트 선장들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공격을 해댔고, 심지어 호위함을 우회할 목적으로 상선단의 한가운데서 부상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선들 중앙에 있으면 호위함이 함부로 공격하기 어렵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상선단에서 가장 위험한 수송선은 두 말할 필요 없이 바로 폭탄과 연료를 수송하는 배였다. 탄약과 폭탄을 가득실은 배가 공격을 받아 이들이 폭발하면 이 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러니 이런 배는 선원들은 물론이고, 근처를 지나는 상선들에게까지 기피 대상이었다.


 연료의 경우도 나을게 전혀 없었다. 아니 어떤 경우에는 더 심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항공유의 경우는 거의 폭탄과 동급으로 위험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어떤 형태의 유류 운반선이든 공격을 받는 순간 기름을 바다에 뿌리며 불탈 수 밖에 없었다. 기름 범벅이 된 바다에서 불에타고 연기에 질식해서 죽는 것은 차라리 폭탄이 한번에 터져 죽는 경우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뢰공격을 받고 불에 타면서 침몰하는 유류 운반선 : This image is a work of a sailor or employee of the U.S. Navy, the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일단 공격을 받은 수송 선단은 전속력으로 유보트의 추격을 피했다. 한편 좁아 터진 유보트는 결코 포로를 잡지 않았다. 따라서 한번 공격을 받아 배가 침몰하면 그들이 구조될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대부분이 차가운 대서양의 바다속에서 죽어갈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 수송선단에 탑승한 선원들은 러시안 룰렛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피할 수 없었다. 누가 탄 배가 공격을 받아 죽게 될 지 아무도 몰랐다. 선원들은 제발 유보트의 공격이 이 배만은 피해가기만을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6년씩이나 살아남은 선원들은 정말 신의 응답을 받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한편 이들을 공격하는 유보트의 승무원들도 이들보다 더 나을게 없는 운명이었다. 사실 대전 초반에는 격침되는 유보트의 숫자가 적었고, 힘들고 어려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유보트는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영웅시 되었다.


 나치의 선전기관들은 그들을 국가적 영웅으로 치켜세웠고, 귄터 프린 같은 유명한 유보트 선장들은 독일 공군의 슈퍼 에이스들 만큼이나 인기있는 존재였다. 많은 독일 청년들이 이런 영웅주의적 선전에 고무되어 유보트에 탑승했다.


 그러나 그들의 임무는 그렇게 영웅적이지만은 않았다. 당시 만들어진 700 - 1000 톤급의 좁은 유보트안에 50 - 60명 정도의 승무원들이 몇달동안 생활해야 했다. 면도를 못하는 것은 기본이고 제대로 씻을 수도 없었으며, 침대 역시 몇명이 공유하면서 사용했다. 대부분의 승무원들이 몇달동안 비좁은 공간에서 햇빛 한번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렇게 비좁은 배안에서 위생이나 식사 또한 매우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살아서 돌아갈 수 있던 대전 초기는 비교적 행복했다. 훗날 유보트 승무원들이 당시를 행복한 시간이라고 회상했듯이 말이다. 대전 중기 이후에는 승무원들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점차 줄어들었다. 1943년 이후에는 2번이상 작전에서 살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다.



 따라서 유보트들은 대전 후기에는 숙련된 선원들이 부족했고, 결국 어린 수병과 젊은 장교들을 태워서 다시 바다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미숙한 이들은 대개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었다. 유보트를 영웅시하는 선전에 혹에 유보트에 타게 되면 그것이 마지막이 되는 경우들이 드물지 않았다.


 42-43년 이후에 유보트들은 잠시 물밖에 나가 있기도 힘들었다. 구축함과 항공기로 부터 시작되는 폭뢰와 대잠 박격포들의 공격은 이들에게 고문과도 같았다. 물속에 숨은 유보트들은 깊은 바다에서 조여드는 압력과 주변에서 터지는 폭뢰로 인해 선체가 손상되었고, 운이 좋게 침몰하지 않는다 해도 사방에서 새어오는 물을 막느라 정신이 없었다.




(영화 유보트의 스틸컷 : 구축함의 폭뢰 공격으로 이성을 잃은 기관장 요한의 모습)



 이 과정에서 유보트의 승무원들이 느낀 극도의 공포감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해수가 들어와 배터리가 침수되면 더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배터리에서 유독가스인 염소가스가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면 승무원들은 산소 마스크를 하고 잠시간 버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경우는 배가 심하게 파손되어 물속에서 다시 물위로 부상을 할 수 없게되는 경우이다. 이 경우 승무원들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산소가 고갈되는 잠수함 안에서 저산소증으로 괴로워하면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사실 운이 좋아서 수면위에서 공격받아 탈출에 성공하는 경우에는 다시 한번 운이 좋아야 했다. 차가운 대서양 한가운데서 그들은 자신이 공격했던 수송선단의 선원들과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 망망대해에서 역시 죽을 때 까지 거의 있을 수 없는 구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말 운이 좋은 유보트 선원들은 연합군에 구조되는 경우가 종종있었고 이들의 숫자는 대전 말까지 5000명에 이르렀다.


(1943년 4월 17일 격침된 U 175 의 승무원들이 USS Spencer 에 구조되는 사진 - 포로 신분이지만 커피와 담배를 받는 장면이 이채롭다. This image is a work of a sailor or employee of the U.S. Navy,  the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대서양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유보트와 연합군과의 싸움은 양측 모두에게 잔인했던 전쟁이었다. 그것은 물속의 유보트 승무원들과 물위의 수송선단의 선원들에게 모두 마찬가지 였다. 그러나 전쟁은 그들에게만 잔인하지는 않았다.  2차 대전의 다른 전장에서, 그리고 오늘날 일어나는 모든 전쟁에서, 전쟁이 살아남은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 잔인하다는 것은 결코 틀리지 않는 진리일 것이다.





 18. 연합군의 건함 능력


 비록 유보트의 공격으로 대전 기간중 1200만톤 이상의 상선을 잃었지만 연합군은 그보다 더 많은 배들을 생산해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유보트의 활약 이후 바다 위에는 더 많은 연합군 배들이 다니게 되었다. 이 때 특히 생산력의 대부분을 차지 했던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이 시절 전설이된 수송선이 하나가 있다. 바로 리버티 선 (Liberty ship) 이었다. 사실 유보트와는 상관이 없어 보일 지 모르지만 이들이 유보트들의 주요 공격 목표였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들이 상대한 미국의 가공할 생산능력이 결국 독일의 힘을 압도했다는 좋은 증거이기 때문에 설명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1940년, 영국 정부는 모자라는 상선을 보충할 목적으로 간단한 영국식 설계대로 만든 60척의 상선을 건조해줄 것을 미국 조선소들에 요청했다. 그러나 이 설계를 받아든 미국인들은 미국 산업 특유의 대량 생산 방식을 도입해 좀더 생산속도와 생산량을 늘리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의 새로운 디자인에 따라 'EC2-S-C1'라는 배가 나오게 되었는데 EC2 는 Emergency Cargo 2 의 약자이고, S 는 증기 터빈 엔진 (Steam turbine engine) 이란 뜻이며, C1 은 디자인 명칭이었다.


 미국인들은 대량 생산을 위해 당시 흔히 쓰이던 리벳 대신 용접을 주로 사용하는 건조 방식을 선택했다. 이는 사실 당시 용접 기술로는 다소 위험한 방법이긴 했다. 심지어 용접 불량으로 바다위로 가던 배가 침몰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일이 리벳으로 조립하는 대신 용접으로 한번에 붙이니 아무튼 작업 속도는 빨라졌다. 이 배는 길이 135 m 에 배수량 14245 톤의 비교적 큰 수송선이었다.


 그런데 이 리버티 선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미국인들은 1775년 미국 독립운동 당시 패트릭 헨리가 외친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 이라는 문구를 생각해내고 최초로 건조된 리버티 선을 SS Patrick Henry 라고 정했던 것이다. 은근히 영국인들에게 옛추억 (?)을 떠올리게 한 것이다.



(리버티 선 중 하니인 John W. Brown - 이 사진은 저자에 의해 공개된 것임. )



리버티 선의 제원
Displacement:14,245 tons[1]
Length:135 m (441 ft 6 in)
Beam:17.3 m (56 ft 10.75 in)
Draft:8.5 m (27 ft 9.25 in)
Propulsion:Two oil-fired boilers,
triple-expansion steam engine,
single screw, 2,500 horsepower(1,864 kW)
Speed:11 to 11.5 knots (20 to 21 km/h)
Range:23,000 miles (37,000 km)
Capacity:10,856 metric tons deadweight (DWT)[1]
Complement:41 men
Armament:Stern-mounted 4-in (102 mm) deck gun for use against surfaced submarines, variety of anti-aircraft guns


 아무튼 점차 주문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리버티 선의 생산은 18개 조선소로 범위가 확장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엄청난 생산능력이다. 미국식 대량 생산 방법이 적용되기 시작하자 그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43년 이후에는 하루 평균 3척씩 리버티 선이 건조 되었다. 그리고 대전 말기까지 총 2710척의 리버티 선이 건조 되었다.


 심지어 대전 중에는 건조 시간이 평균 44일로 줄어들었다. 당시 선전용으로 한척은 용골이 깔린지 4일 15시간 30분 만에 완성시키기도 했으니 미국의 생산능력은 정말 지금 기준으로 보더라도 경악할 수준이었다. 여기에 미국은 7000톤급의 빅토리 선 (Victory ship) 534척과 이들보다 더 큰 T2 tanker 490척을 건조했다.



 미국의 이러한 엄청난 생산능력은 지금 생각해도 거의 미스테리한 수준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되니츠와 그의 유보트들은 이런 괴물같은 생산능력을 가진 적과 맞서 싸웠으니 사실상 미국이 참전한 시점에서 대서양 전투는 독일의 패배가 정해진 전쟁이었다. 1943년 이후 되니츠와 유보트 승무원들은 이와 같은 사실을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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