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히틀러의 바다의 전사들 - 독일 U 보트 전사(戰史) 2





4. 독일 해군과 유보트

 사실 히틀러는 해군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었다. 사실 히틀러가 계획하는 것은 동방 - 즉 동유럽에 건설할 광대한 미래의 제3제국이었지 바다에서 대영제국과 세력다툼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히틀러가 독일 해군의 재건 계획을 지시하긴 했어도 이 계획이 제대로 본궤도에 오르기도 전에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될 수 있었다. 독일은 육군위주의 육지형 국가였고, 히틀러도 육상 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아돌프 히틀러 : portrait crop of File:Bundesarchiv Bild 183-H1216-0500-002, Adolf Hitler.jpg.
 Author : Notwist)



 그러나 이러한 히틀러의 적은 관심만이 독일 해군의 문제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일 해군내에서도 의견의 차이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크게 두가지 의견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한편에서는 전함과 순양함등을 비롯한 수상함 위주의 전력을 중심으로 해군을 재건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 과정은 시간이 매우 길게 걸릴 것이고 돈도 많이 들지만 일단 재건된 해군이 완성되면 영국해군과의 싸움도 가능할 지 몰랐다.


 다른 한쪽에선 이와 같은 계획은 실현가능성이 적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단 영국 해군 만큼 해군 전력을 키울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때까지 영국이 그냥 기다려 주겠는가? 아니 영국은 몰라도 전쟁은 그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일단 히틀러 총통이 그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따라서 잠수함같은 비대칭 전력을 대폭 키워 연합군을 궁지로 몰아넣어야 한다.


 전자의 수상함 위주의 전략을 대표하는 것은 당시 독일 해군 참모총장이었던 에리히 뢰더 (Erich Raeder) 제독이었다. 그는 당시 독일 해군 (Kriegsmarine) 의 재건 계획으로 Z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것은 1944년까지 전함 10척, 항공모함 4척, 순양전함 3척, 중순양함 8척, 경순양함 44척, 구축함 68척 유보트 249척을 건조하여 영국 해군과 경쟁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에리히 뢰더 제독, 1943년까지 독일 해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출처 : Deutsches Bundesarchiv (German Federal Archive), Bild 146-1980-128-63
Author : unknown)


 한편 유보트의 아버지로 불릴 만한 독일 잠수함대의 사령관은 잠수함 위주의 전술을 지지하고 있었다. 바로 칼 되니츠 (Karl Dönitz) 제독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보다 많은 유보트가 있다면 영국을 사실상 고립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계산하기론 전쟁 초기에 300척의 VII 형 유보트만 있다면 영국의 상선을 모두 격침 시켜 영국을 해상 봉쇄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자원과 식량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영국은 고사되고 말 것이다. 이를 통해 독일은 영국을 패배 시키거나 적어도 협상에 나서게 할 수 있었다.


(칼 되니츠 제독 - 되니츠 제독은 1918년에 독일 해군 잠수함 UC -25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잠수함대 출신이었다 :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


 일단 1939년에 전쟁이 발발하자 에리히 뢰더 제독은 현재 상태에서는 독일 해군이 전멸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그것은 수상함 전력에서 본다면 맞는 말이었다. 그는 해군에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제군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력을 다하고 명예롭게 전사하라"


 그러나 이 말은 유보트에게는 아직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 였다.




 5. 전쟁초반의 유보트


 일단 전쟁이 시작된 1939년 9월1일, 독일 해군에게는 사실 유보트도 많이 모자랐다. 이 때 당시 독일 해군의 유보트는 57척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대양에서 싸울 수 있는 VII 형은 22척에 불과했다. 사실 작전에 투입할 수 있던 유보트는 50척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에게 필요한 300척의 VII 형 잠수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잠수함대 사령관 되니츠 제독은 이 어려운 상황에서 영국 함대를 직접 공격하라는 히틀러와 뢰더 제독의 성화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안되는 유보트들을 영국 해군에게 헌납하는 것이나 다를바 없는 요구였다. 그보다는 영국의 숨통을 끊기 위해 무장되지 않은 상선들을 공격해야 했다.


 아무튼 이와 같은 요구에 의해서 되니츠 제독은 얼마 안되는 유보트들을 영국 해군과 수송선단 모두에 투입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영국 해군을 공격하는 시도는 약간의 성공을 거두긴 했다. 항공모함 커리지어스 (HMS Courageous ) 를 비롯하여, 전함 로열 오크 (HMS Royal Oak - 귄터 프린의 U - 47 이 격침) 등을 격침시키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 얼마 안되는 유보트는 그 숫자가 더 줄어들어 버렸다.



(항모 커리지어스 : This artistic work created by the United Kingdom Government is in the public domain )


 되니츠에게 있어 더욱 한심한 것은 - 물론 연합군에겐 매우 다행한 일이지만 - 히틀러는 유보트의 잠재력을 계속 깨닫지 못하고 이에 대해서 별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 하겠지만 훗날 히틀러가 유보트의 가능성을 깨닫고 이에 대해서 투자를 늘렸을 땐 이미 때가 너무 늦었다) 황당하게도 1939년 생산된 유보트는 모두 28척에 불과해 손실된 유보트를 보충하는데 그쳤다. 이 때 대량으로 유보트를 만들었다면 영국에게는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러한 좋지 않은 여건에도 되니츠와 유보트 함대의 노력, 그리고 독일 해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므로써 그들은 해전사에 영원히 남을 전과를 세우게 된다. 이른바 유보트의 행복한 시간의 시작이었다.



 6. 행복한 시간 ( "Die Glückliche Zeit" = Happy Time, 1940년 6월 - 1941년 2월 )


 1940년대가 되자 독일 해군에 매우 좋은 일들이 연달아 발생했다. 그것은 이해에 이르러 노르웨이와 프랑스가 점령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가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영국 해군은 가장 든든한 동지인 프랑스 해군을 잃었다. 연합군 해군은 갑자기 그 규모가 크게 줄었다.

 여기에 프랑스와 노르웨이 두곳을 연결해서 사실상 서유럽 해안선을 다 장악하다 시피한 독일 해군은 이제 잠수함을 운용하기에 매우 적절한 상황이 되었다. 어디든 잠수함 기지들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르웨이 전투와 던케르크 후퇴 작전등에서 많은 영국군 구축함들이 사라져 일시적으로 영국의 구축함이 모자라게 된 것도 아주 좋은 상황을 연출해 주었다.  따라서 이제 독일 유보트들은 신나게 사냥을 할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여기에 칼 되니츠는 잠수함 전사에 가장 유명한 전술을 도입해 그 성과를 더욱 증폭시켰다. 이른바 울프팩 (Wolf pack, 독일어로 Wolfsrudel 혹은 Rudeltaktik ) 전술이었다. 사실 이 전술은 매우 간단한 전술이었다.

 우선 일련의 유보트들이 연합군의 수송선들이 나타나는 지점들에 적당한 거리로 떨어져서 순찰을 돈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의 유보트가 수송선단을 발견하면 무전으로 다른 유보트들에 연락을 해서 서로 모이게 했다. 당시 영국 역시 적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서 선단을 이루어 다녔기 때문이다. 그러면 유보트들은 일단 낮에는 수송 선단을 몰래 따라다녔다.

 그리고 밤이 되면 유보트들은 물위에서 접근해서 공격을 가했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잇점이 있었다. 일단 밤이 되면 수면위에 낮게 떠 있는 유보트는 잘 안보인 반면, 수송선단의 불빛은 잘 보였다. 공격을 잘하긴 위해서는 수면위에 떠서 공격하는게 좋았는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밤이 더 좋은 공격 시간이었다. 유보트 들은 어뢰 공격 뿐 아니라 갑판위의 88/105mm 함포 사격을 선호했다. 이렇게 늑대 때처럼 모여든 유보트들에게 연합군 상선들은 유린 당했다.

 이 전술은 단순하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되니츠 제독은 1차 대전때도 이 전술을 구상했지만 무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실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후 무전기술의 발전으로 인해서 이 전술을 유용하게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얼마 안되는 유보트들은 놀라운 전과를 올리기 시작했다. 이 때가 독일 해군의 영웅들이 대거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들 중에 몇명을 소개해 본다.



(귄터 프린 :  Günther Prien.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귄터 프린은 Type VIIB 형 유보트인 U - 47 을 이용해 인상적인 전과를 올린 유보트 함장이었다. 총 30척의 상선을 격침, 총 16만 톤의 상선을 격침시켰고, 앞서 이야기 했지만 전함 로열 오크를 격침시켰다. 이 로열 오크의 격침은 가장 인상적인 전과 였다.

 당시 로열 오크는 세계 최고의 해상 요새라고 자부했던 오크니 제도의 스캐퍼 플로우 기지에 정박해 있었다. U - 47 은 여기에 몰래 잡임 이 전함과 833명의 승무원을 수장시키고 무사히 귀환했다. 이 이야기가 전해지자 프린 대위와 되니츠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다만 이 일은 1939년 10월 9일로 행복한 시간 보다 약간 전이었다)

 이 일이 있고 나서는 히틀러도 마침내 유보트에 대해서 관심을 표명했다. 되니츠는 재빨리 히틀러와 면담을 하고 앞으로 더 많은 자원을 유보트에 투입하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러나 총통의 약속이 흔히 그러하듯 그 약속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오토 크레취머 (Otto Kretschmer) 가 이끈 U - 99 역시 VIIB 형 유보트였다. U - 99는 로열 오크같은 화려한 목표물을 격침하지는 못했지만 합계 19만 8천톤, 총 35척의 수송선을 격침해 상선 격침 경력으로는 U- 47을 능가하는 전과를 올렸다.



(제일 앞에 있는 사람이 오토 크레취머,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중이다. CCL 에 따라 복사
 출처 : Deutsches Bundesarchiv (German Federal Archive), Bild 183-2004-0504-500
 Author : Fremke, Heinz)


 오토 크레취머는 이전에도 U - 23 을 지휘해서 7척의 적함을 격침한 적이 있었다. 그는 함장으로써 총 27만 4천톤의 적함(총 46척)을 격침시킨 독일 유보트의 에이스로 침묵의 오토 (Silent Otto, Otto der Schweigsame ) 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 업적으로 1등 철십자 훈장, 기사 십자장 (Knight's Cross with Oak Leaves and Swords) 등을 수여 받았으며 전체 격침 톤수로 유보트 함장 중 1위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비슷한 시기에 역시 같은 VIIB 형인 U - 100 을 지휘하면서 앞서 두사람과 라이벌 관계였던 독일 해군의 에이스로 요하임 쉐프케 (Joachim Schepke ) 가 있다. 그는 앞서 두사람 보다는 약간 못한 13만 5천톤의 기록을 세웠다. 물론 이것도 700 톤급 잠수함 한척이 올린 전과로는 엄청난 것이다.


(요하임 쉐프케 :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일단은 여기까지 소개하고 나중에 연재가 끝나고 나서 독일 유보트 격침 랭킹을 따로 정리해 보겠다.


 아무튼 이 행복한 시간에 독일 유보트는 1940년 6월에서 10월까지만 270척의 연합군 상선을 침몰시켰다. 그러나 유보트의 희생은 6척에 불과할 정도였다. 

 사정이 이러니 영국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이대로는 물자 고갈로 영국이 고사 될 위기에 빠진 것이다. 훗날 처칠은 이야기 하기를 "전쟁 중 나에게 진정한 공포를 준것은 유보트의 위협이었다" (The only thing that really frightened me during the war was the U-Boat peril) 이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래도 영국에게도 위안이 될 만한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히틀러의 오판으로 충분한 숫자의 유보트가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되니츠가 원한 만큼의 유보트가 있었다면 영국은 정말 패배 했을 지도 모른다.

 여기에 독일 공군을 사유물 처럼 움켜진 괴링의 비협조도 영국에게는 행운이었다. 사실 유보트의 울프팩 전술이 더 효과를 보려면 항공기의 도움이 필수였다. 아무래도 주로 물위에서 주변을 육안으로 탐색하는 유보트는 시야가 매우 좁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항공 정찰로 적 선단을 발견해서 그 결과를 무선으로 보내 준다면 울프팩 전술의 효과는 극대화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약간 늦게 FW - 200 콘도르 몇기만이 제공되었다. 유보트 들은 이들의 도움만으로도 두달 동안 30척의 연합군 수송선을 해치울 수 있었으니, 되니츠와 유보트 함대에게는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적어도 수백대의 FW - 200 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


(FW - 200, Focke-Wulf 200 Condor - 이 항공기는 원래 여객기로 개발된 것으로 항속거리가 비교적 길어서 장거리 수색에도 적합했다
 출처 : Deutsches Bundesarchiv (German Federal Archive), Bild 146-1978-043-02
 저자 : 미상 )


 그러나 비록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독일 유보트 함대는 매우 큰 전과를 올리고 있었다. 따라서 1941년 초까지 행복한 시간은 지속되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생대에 박쥐가 등장하면서 플로팔랑곱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enage-girl-years-reconstruct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