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몽골군의 진격
1271 년 후반기에 몽골군 (정확히 말하면 아바카 칸의 일한국의 몽골군) 은 에드워드 왕자의 원대한 계획에 상당히 못미치는 병력만을 시리아에 파견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투르케스탄 (Turkestan) 의 영유권을 두고 다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기 때문이었다.
일한국에서 파견한 몽골 군대는 당초 약속한 압도적인 병력과는 달리 - 그래도 에드워드 왕자가 데리고 온 병력에 비한다면 훨씬 우세한 - 1만명 정도의 몽골 기병대로 사마가르 (Samagar) 장군이 통솔하고 있었다. 사마가르 (혹은 세마카르 Cemakar 라는 기록도 존재) 장군에 대해서는 매우 적은 사실만이 알려져 있지만 아무튼 그가 병력을 이끌고 온것은 일 한국의 중심이었던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인근이 아니라 마침 일 한국이 정복 활동을 벌이던 지금의 터키 영토에 속하던 지역이었다.
사마가르 장군은 여기서 셀주크계 투르크 부족들을 일부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서 1271 년 10월 중순에는 알레포에 도달할 수 있었다. 다시 몽골군이 도달하자 이전에 엄청난 유혈 학살을 기억하고 있던 지역 주민들은 대거 피난길에 올라 이 지역은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덕분에 몽골군은 생각보다 쉽게 알레포를 점령했으며 인근의 마라트 알 누만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갑자기 일이 틀어진다. 이 병력이라도 에드워드의 십자군과 합쳐졌다면 역사상 진정한 의미의 십자군 - 몽골 연합군이 무슬림 군대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으리라. 하지만 그 순간 사마가르 장군은 다시 유프라테스 강으로 군대를 회군한다.
그 이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가장 가능성 높은 것은 에드워드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하더라도 바이바르스가 이끄는 맘루크 군대를 상대해서 이기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하고 병력을 온전히 보존하기위한 전략적 후퇴라는 설이 가장 그럴 듯 하다. 이전 훌라구가 잃어버린 2만의 병력과 유능한 장군 (키트부카) 은 일 한국에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사마가르는 비슷한 실수를 다시 하기 싫었을 것이다.
실제 몽골군이 무적이거나 무적에 가까웠던 이유는 신속한 후퇴에도 이유가 있었다. 불리한 상황에서는 적이 보복을 가하기 전에 뛰어난 기동성을 바탕으로 빨리 후퇴해 버리면 적들은 몽골군에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다. 유리할 때 치고 불리할 때 피하는 것은 고대로 부터 전술의 기본이다. 몽골군의 유래가 없는 기동성을 적절히 활용해 치고 빠지는 전술에 능했으므로 불리한 상황이 예상되는데도 굳이 싸움을 벌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일한국의 가장 큰 적은 맘루크조가 아니라 차카타이 한국과 킵차크 한국이었다.
4. 바이바르스의 반격, 그리고 종전
한편 시리아 지역의 영토를 포기할 수 없었던 바이바르스는 다시 카이로에서 신속하게 병력을 이끌고 시리아 방면에 도달한다. 사실 이들이 출진할 무렵 사마가르는 정복했던 알레포등의 영토를 아주 쉽게 포기하고 퇴각했지만 아무튼 1271 년 11월 12일 바이바르스는 반격을 위한 군대를 직접 이끌고 나섰다. 물론 몽골군이 적절한 시기에 퇴각한 덕에 그들은 몽골 군대에 아무런 보복을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공격 대상은 바로 퇴각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적인 십자군으로 좁혀질 수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와 십자군들에게는 꽤 난감스런 상황이 된 셈이다. 그런데 사실 바이바르스는 이 일이 있기전에 십자군들을 더 난감한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지게 만들기 위한 작전을 진행했었다. 그것은 바로 키프로스 상륙 작전이었다. (설명은 나중에 했지만 실제로 이 일은 1271 년 여름에 있었다)
앞서 잠시 언급했듯이 바이바르스는 유럽에서 더 대규모의 십자군이 - 사실 오지 않을 것이었다 - 올 것에 우려해 보다 초기에 이들이 병력을 합치지 못하게 하려고 키프로스 (사이프러스) 점령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는 적의 추가 병력 지원을 끊어 버리는 것은 물론 십자군 국가들을 고립시키는 이중의 장점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정말 유럽에서 올 추가 십자군들이 있었을까 ?
사실 루이 9세가 죽은 후 프랑스 왕국의 유력자들과 샤를 1세는 다시 십자군을 정비해서 성지를 구원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맹세는 중세의 여러 맹세들처럼 지켜지지 않을 성질의 것이었다. 3차 십자군 때는 수년 간에 걸쳐 끊임없이 신규 병력이 아크레로 당도했지만 이제 100 년이 지난 시점에서 십자군의 이상은 널리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살아서 돌아오기 쉽지 않은 모험으로 인식되었으로 솔직히 에드워드 왕자도 병력을 모으기 쉽지 않았다는 건 이미 설명한 대로다.
따라서 바이바르스의 키프로스 상륙 작전은 전략적으로 완전히 쓸데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사실 맘루크군이나 이집트가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키프로스 상륙 작전 자체가 전략적인 판단 실수라면 이집트 해군의 리마솔 (Limassol) 상륙 작전은 전술적인 재앙이었다.
당시 기독교 군은 아크레에 큰 이권 때문에 상당한 함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제노바와 베네치아 함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둘이 전쟁을 벌이는 경우도 많기는 했으나 아무튼 12 - 13 세기 내내 기독교 함대의 우세함은 일반적으로 상륙 작전을 벌이는 쪽이 대부분 십자군이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1271 년의 리마솔 상륙 작전에 대해서는 불행히 상세한 내용이 전해지지는 않지만 그 결과는 맘루크 군의 일방적인 패배였다고 전해진다. 바이바르스는 불필요하게 많은 병력과 자원만 잃었다.
다시 그 후로 돌아와서 1271 년 12월. 본래 목표로 한 몽골 군을 놓치고 나자 사실 난감하기는 바이바르스도 마찬가지였다. 아크레는 진정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3차 십자군에서 널리 입증했을 뿐 아니라 지난 10 여년간 바이바르스 본인도 직접 확인한 바 있다. 특히 바다에서 포위하지 않는 이상 이 항구도시를 완전히 포위하긴 힘들다.
당시 상황을 본다면 병력이 근본적으로 열세한 십자군은 몽골군의 도움 없이 단독으로 공격에 나설수 없는 형편이었다. 아마도 같은 시기에 바이바르스 역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소모하면서 실제로는 얻는 게 별로 없을 아크레 포위전에 또 나서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 1272 년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휴전 협상은 특이하게도 10년 10월 10일이라는 좀 별난 기간으로 진행되었는데 1272 년 5월에 조인되기 직전에 불미스런 사고가 있었다. 그것은 에드워드 왕자가 암살자 (아사신 단으로 추정되는 ) 로 부터 암살당할 뻔한 사고가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지만 게임 어쌔신 크리드가 생각나는 장면 가운데 하나다)
이 암살의 배후로는 물론 바이바르스가 가장 유력하게 지목되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아사신 단이 몽골군에 의해 괴멸된 이후 잔당들 일부가 맘루크 조로 흘러들어가서 술탄을 위해 봉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신의 가호가 있었던 것인지 아무튼 에드워드 왕자는 목숨을 건저 귀국할 수 있었다.
5. 결론
9 차 십자군은 허무하게 이것으로 끝이났다. 에드워드 왕자는 귀국 길에 오르던 중 1272 년 11월에 헨리 3세의 승하 소식을 듣고 영국으로 귀국, 1274 년 에드워드 1세로 즉위한다. 이 허무한 종말은 이제 유럽에서 십자군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앞서 살펴 보았듯이 8/9 차 십자군의 시기에 십자군에 열정을 가진 사람의 숫자는 매우 적었다. 넘버링이 된 메이저 십자군 사이에도 계속해서 크고 작은 십자군이 당도했던 시기는 100 년전 이야기였다. 독자들은 이 마지막 십자군들에서 3차 십자군의 아크레 포위전과는 완전히 달리 새로운 십자군 병력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십자군 자체도 몇몇 군주들의 강력히 원해서 마지못해 진행된 것을 보았을 것이다. 9 차 십자군에서 유럽에서 당도한 병력은 사실상 한 번이었고 그 규모도 미미했다. 참가를 희망하는 사람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전쟁 수행의지가 사라진 만큼 13 세기 후반 십자군은 피할 수 없는 몰락을 행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교황의 권위나 신의 뜻으로 이 무모한 군사적 원정이 계속 진행될 순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시기와 그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도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하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었다.
이제 십자군 시대의 마지막 순간이 어떻게 다가왔고 어떻게 끝이 났는지를 설명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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