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드워드 1 세의 참전
비록 십자군이라는 개념이 13 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널리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생각되기는 했지만 안티오크까지 함락되고 팔레스타인 해안가의 아크레를 비롯한 몇몇 도시만이 최후의 보루로 남은 상황에서 십자군에 가담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루이 9세의 이야기는 이미 했지만 이보다 좀 늦은 시기에 직접 성지를 향해 출발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후에 에드워드 1세가 되는 에드워드 왕자 (헨리 3세의 아들) 가 있었다.
(에드워드 1 세 1239 년 생이고 재위는 1272 년에서 1307 년까지 public domain )
에드워드 1세가 십자군의 십자가를 지기로 한 때는 1268 년 6월 24일로 이 때 그의 동생인 에드몬드 (Edmund Crouchback, 1st Earl of Leicester and Lancaster ) 와 그의 사촌인 헨리도 같이 십자가를 지기로 (즉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막상 전쟁을 하려면 항상 필요하게 마련인 돈이 모자랐다. 이 때 십자군을 준비 중이었던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영국의 도움을 받기 위해 자금을 일부 융통해주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결국 세금을 새로 걷는 방안이 검토되었는데 당시 영국은 마그나 카르타의 정신에 입각해서 의회의 동의없이는 세금을 신설할 수 없었으므로 여기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결국 1270 년에서야 의회에서 새로운 세금이 통과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에드워드 왕자는 비교적 빠른 시기라고 할 수 있는 1270 년 8월 20일 - 즉 루이 9세가 죽기 5일 전 - 에 도버해엽을 건너 프랑스로 건너갔다. 하지만 병력은 아주 적어서 225 명의 기사를 포함해 대략 1000 명이 넘지 않은 병력만이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였다. 이런 점을 보면 당시 십자군이 별로 인기가 없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마도 에드워드 왕자는 루이 9세와 합류할 생각이었지 실제로 단독으로 십자군을 수행하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 십자군은 아크레를 구원하기 희망하는 편이었고 루이 9세는 튀니스로 향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루이 9세가 죽었다는 소식이 그들에게도 곧 전해졌다. 하지만 에드워드 왕자는 샤를 1세와 합류할 생각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그렇지만 결국 이것도 헛걸음이 되고 말았던 것이, 에드워드 1세가 샤를 1세와 합류할 무렵에는 이미 샤를 1세가 휴전 협정에 서명한 다음이었기 때문이다. 어쩔수 없이 에드워드 왕자는 튀니스에 당도한 즉시 샤를 1세와 함께 시칠리아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악천후로 인해 그해 겨울동안 군대는 발이 묶이게 된다.
1271 년이 되자 이제 명백하게 시대착오적인 발상인 십자군을 접을 때가 되었지만 에드워드 왕자는 여기까지 온 이상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돌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에드워드 왕자는 계속해서 본래 목표인 아크레로 갈 뜻을 굳혔고 여기에 감명을 받았는지 샤를 1세는 직접 아크레까지 갈 순 없지만 대신 병력을 빌려주기로 하므로써 십자군 원정은 계속될 수 있었다. (사실 대로 말하면 5/6 차 보다는 8/9 차를 하나로 합치는 게 더 적절하긴 하지만 원정 주체와 지역이 달라서 인지 8/9 차를 나누어 분류한다)
이 때 에드워드를 따라간 병력이 본래의 1000 명 보다는 많았겠지만 구체적으로 몇명이나 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아마도 루이 9세의 병력 자체도 1만명이 좀 넘는 수준이었고 샤를 1세의 병력도 이보다 더 많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수만에 이르는 대병력은 아니었을 것이며 수천 정도가 합리적인 추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정도 병력으로 바이바르스의 군대를 막기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 십자군도 기대는 구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몽골 제국이었다.
2. 프랑크 - 몽골 연합 (Franco - Mongol alliance)
이미 7차 십자군 이후로 몇차례 설명했지만 루이 9세나 보에몽 6세를 비롯 십자군 측에는 몽골 제국의 힘을 빌려 십자군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거나 (루이 9세) 혹은 생존을 도모하려는 통치자 (보에몽 6세) 들이 있었다. 사실 몽골 측 시각에서는 자신들의 신하가 된 속국들을 돕고 나아가 저 괘씸한 맘루크 조를 응징하려는 것이었으나 (즉 몽골 측에서는 십자군을 동등한 동맹으로 생각한 일이 한번도 없었다) 아무튼 후에 서구측 기록에서는 프랑크 몽골 연합이라고 불리게 된다.
사실 가장 좋은 동맹의 기회는 1260 년 아인 잘루트 전투 당시 있었으나 당시 대개의 십자군 국가들은 중립을 지켰다. 물론 십자군이 참가했다고 해서 꼭 몽골 측 승리로 끝났으리라는 보장은 없었겠지만.
앞서 설명했듯이 1260 년대 후반에는 일 한국이 다른 몽골의 한국 - 차카타이 한국 - 과 전쟁을 벌이고 있어 이를 지원해줄 만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내분이 소강 상태에 이르자 이제 일한국의 칸인 아바카 (Abaqa Khan) 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마침내 1271 년 5월 9일 아크레에 당도하지 첫번째 한 일은 주변으로 사절들을 파견해 바이바르스에 대해서 원한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와 싸울만한 이유를 지닌 주변 세력들을 전쟁에 참가시키는 것이었다. 레지날도 로셀 (Reginald Rossel) 을 비롯한 사절들이 페르시아에 있던 아바카 칸의 궁정에 도달한 것은 1271 년 9월 4일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 아바카는 혼쾌히 대 맘루크 전쟁에 참가할 뜻을 밝혔다.
그러는 사이 에드워드 왕자는 키프로스 왕국의 위그 3세 (Hugh III of Cyprus) - 사실 당시 명목상의 예루살렘 왕국 국왕이었다 - 도 참전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나머지 십자군 잔존 세력 (예를 들어 트리폴리 백작령) 도 참여시켜 병력을 불린 후 주변의 카툰 (Qaqun) 같은 지역의 무슬림 영토들에 대한 작은 군사 원정을 시도했다. 여기까지는 에드워드 왕자의 원대한 계획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이미 1271 년 후반기에 몽골 제국이 지금의 시리아, 터키 지역에 병력을 증강하고 있었으므로 바이바르스도 이번에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바르스는 새로운 십자군 병력이 바다로 침공할지 모른다고 우려했으며 이들이 바다와 육지에서 협공을 할 가능성을 경계했다. 잘못하면 바다와 육지에서, 그리고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십자군 - 몽골군의 협공을 받아 큰 곤경에 처할 위기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알라의 도움이 있었는지 그런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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