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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사 - 3차 십자군 1




 3차 십자군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일단 유럽에서 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이번 원정의 주연급 - 단독 주연은 물론 아니지만 - 이자 훗날 그럴 듯한 영웅담이 곁들어져 지긴 했지만 그래도 중세 유럽 최고의 영웅 혹은 악당 가운데 하나인 사자심왕 리처드 (Richard I of England : Richard the Lion Heart - 직역하면 사자심왕이지만 국내에는 그냥 사자왕 리처드로 더 친숙하다) 이야기에서 부터 3차 십자군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 나갈 생각이다. 


 왜 그런지 묻는다면 사실 꼭 그래야할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흔히 리처드 1세야 말로 살라흐 앗 딘 - 여기서는 서구식 호칭대로 살라딘이라고 통일 - 의 경쟁자로써 3차 십자군 원정이라고 하면 이 두 라이벌을 빼놓고는 기술이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사실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가 결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야기는 3차 십자군과 직접 적인 연관은 없지만 리처드 1세의 탄생과 배경부터 시작한다.



(리처드 1세를 그린 12세기 삽화. 살아있던 당시 그림인 만큼 어느 정도 사실 반영이 되었겠지만 그래도 그림이 부실해서 잘 알아보긴 어렵다. Richard I. Cœur de Lion (Lionheart, Löwenherz)  Illustration from a 12th century codex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1. 리처드 1세의 탄생과 배경


 리처드 1세가 태어난 것은 2차 십자군이 끝나고 이미 십자군 국가에서 에데사 백국이 적에게 넘어간 것이 기정사실 처럼 여겨지던 1157년 9월 8일이었다. 태어난 곳은 아마도 버몬트 궁으로 본래 헨리 1세가 1130년에 옥스포드 북쪽에 건설한 궁전이었다. 


 태어난 장소에 대한 자료에 정확도가 떨어지는 이유는 당시 리처드 1세가 속한 플랜테저넷 왕조 (혹은 앙제빈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자체가 정확한 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주요 도시 - 대개 수도 기능을 한건 앙제(Angers) 나 시농 (Chinon) 같은 도시다 - 를 옮겨다녔닌 데다 기록이 불완전한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 기록이 맞다면 일단 그는 잉글랜드 (영국이라고 하면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당시엔 스코틀랜드 등은 엄현히 다른 국가였다) 에서 태어난 셈이다. 솔직히 이건 좀 의외로 생각될 수도 있는데 당시 잉글랜드는 플랜테저넷 제국 혹은 앙제빈 제국에 편입된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앞서 예루살렘 왕국의 풀크 국왕 때 설명했지만 (  http://blog.naver.com/jjy0501/100096551126  참조) 이 앙제빈 제국이란 국가는 현대의 역사가가 붙인 명칭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 서부에 건설된 거대한 중세 국가였다. 중세 최고의 혼테크를 통해 영토를 확장한 앙주 가문은 풀크 국왕의 아들인 조프루아 5세(Geoffrey V of Anjou) 와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 (Matilda of England) 의 결혼을 통해 프랑스 서부 핵심과 잉글랜드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사실 조프루아 5세는 사실상 공석이 되서 점령하는게 임자인 잉글랜드의 왕위를 주장할 목적으로 이 결혼을 추진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 과정은 순조롭지 않았다. 잉글랜드 귀족들이 마틸다를 지지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이 프랑스의 야심 많은 백작도 싫어했기 때문이다. 결국 잉글랜드는 오랜 무정부 상태에 있다가 1154년에야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의 아들인 헨리 2세 (Henry II of England) 가 군대를 이끌고 상륙하자 잉글랜드 왕위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선에서 분쟁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헨리 2세는 물론 외할아버지인 헨리 1세의 계승권을 주장했다) 


(노란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앙제빈 제국 혹은 잉글랜드 국왕의 실제 지배지역이며 노란색 점은 영향력을 행사한 지역이다. CCL 에 따라 동일 조건하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Cartedaos )


 아무튼 리처드 1세는 헨리 2세의 삼남으로 잉글랜드가 우여 곡절 끝에 플랜테저넷 왕조의 일부가 된지 3년만에 태어났다. 헨리 2세에게는 앞서 설명한 엘레오노르 왕비 사이에 5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이 있었는데 그 가정사는 역시 순조롭지만은 않은 플랜테저넷 왕조사와 맞물려 있다. 

 장남인 윌리엄 (푸와티에 백작 기욤 9세) 는 태어난지 3년만에 죽어서 적어도 오래 살아 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 대신 일찍 죽어 불효를 저질렀다고 해야 하나 - 그 아래 있는 아들들은 꽤 불효 자식들이었다. 



 (헨리 2세의 자녀들 . 13 세기의 삽화  왼쪽에서 부터 윌리엄, 헨리, 리처드, 존의 순인데 중간에 딸들이 있다. 딸까지 합치면 자녀는 모두 8명이었다 This imag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in the United States and those countries with a copyright term of no more than the life of the author plus 100 years. )


 리처드의 위에는 젊은 헨리왕 (Henry the young king  이 명칭이 붙은 이유는 사실 헨리 2세가 살아있을 때 대관식을 치뤄 헨리 3세라 불리워야 하지만 그러면 나중에 등장하는 헨리 3세와 혼동이 오기 때문에 대신 이 명칭을 붙인 것이다.)이 있었고 일찍 죽은 장남을 대신하여 차기 잉글랜드 국왕 겸 노르망디 공작, 앙주 백작, 마인 백작이 될 예정으로 사실 헨리 2세가 살아있을 때 그 명칭을 부여받았다. 


 리처드의 아래로는 두 형제가 있었는데 제프리 2세 (Geoffrey II) 와 막내인 존 (왕제 존 이라고 아이반 호나 로빈 훗등의 악역으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친숙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왕이 되고 1215년에 마그나 카르타에 서명한 일이다.) 이었다. 


 사실 리처드의 아버지인 헨리 2세는 아버지 앙주 백작을 능가하는 야심가로 잉글랜드를 넘어 아일랜드의 지배권을 주장하고 (Lord of Ireland) 스코틀랜드까지 영역을 확장하려 들었기 때문에 자주 잉글랜드를 방문했고 아마도 헨리 2세가 잉글랜드에 있었을 때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훗날 영국의 가장 용맹한 전사왕이자 기사도 정신의 정수로 여겨지는 이 인물은 잉글랜드에서 태어났지만 잉글리쉬를 할줄은 몰랐던 것 같다. 당시 왕실이나 귀족의 공식 언어는 프랑스어였고 앙제인 제국의 심장부 역시 프랑스 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처드 1세의 유년 시절에 기록은 거의 없지만 아무튼 당시의 다른 플랜테저넷 왕족 처럼 그 역시 영어를 못했을 것이다. 솔직히 왕위에 있던 10년간 그가 잉글랜드에 머문 기간은 반년이 채 안된다고 생각된다. 만약 그가 후세에 중세 영국 국왕의 대명사로 생각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아마도 꽤 의외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무튼 리처드의 어린 시절은 그가 속한 플랜테저넷 제국이 왕조 최고의 야심가 헨리 2세에 의해 급격하게 확장되던 시절이다. 아마도 이것을 머리와 가슴에 새긴 어린 리처드가 훗날 엄청난 군사적 모험을 강행하게 되는 이유중 하나가 아니었을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리처드 1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매우 빈약하지만 그의 청년기에 대해서는 인상적인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그의 외모에 관한 것이다. 리처드 1세는 키가 엄청나게 크고 붉은색에 금발이 섞인 (Red to blond)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 키는 6피트 5인치 (196 cm) 라고 하는데 다소 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거구인점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큰 키에 활달한 성격의 리처드는 당시 발군의 신체적 능력과 용기로 곧 주목을 받았다. 






 (리처드 1세의 초상화 - 시간이 갈수록 미화되는 경향이 있다. 위가 17세기, 아래가 19세기의 삽화이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2. 리처드 1세의 청년기


 당시 사자심왕이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건 당시가 중앙집권적인 상황이 아닌 중세시대로 영주들이나 영주 - 국왕간, 혹은 교회와의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혼란스런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리처드 1세는 일찍부터 타고난 무용과 용기를 바탕으로 자신의 영지안의 귀족들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여 어린 나이에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170년, 리처드 1세가 13세가 되던 해에 헨리 2세는 심하게 앓아누웠고, 자신이 일을 당했을 때를 생각해서 후계 구도를 정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 계획은 장남 헨리를 헨리 3세 (젊은 헨리) 로 옹립하여 앙주, 노르망디 및 잉글랜드등 제국의 중심부를 장악하게 하고 프랑스내 주요 영지를 나머지 아들들에게 분배해서 제국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헨리 2세 자신은 상왕으로 전체를 감독하게 되는 봉건식 구조였다. 


 1171년, 리처드는 어머니인 엘레오노르의 요청으로 프랑스의 요충지인 아키텐 지역을 물려 받기로 결정되었다. 1172년에 (당시 15세) 리처드는 아키텐 공작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사실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중앙 집권적이지 못한 당시 봉건 사회에서는 무력으로 얕보이기 시작하면 하위 군주들을 통솔하기 어려운 법이었다. 이런 약육 강식의 사회에서 크고 자란 리처드는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재능인 신체적 무력과 용기를 지니고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미 청소년 시절 부터 그의 용맹은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 용맹은 곧 엉뚱한 방향을 향하게 된다.


 리처드는 훗날 사자의 심장은 지녔어도 영혼은 지니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답게 은혜를 원수로 갚을 준비를 당시 부터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 2세의 아들들은 영지와 왕위를 물려준 보답으로 헨리 2세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반란의 가장 의외인 점은 그 주모자가 삼남 리처드가 아니라 미래의 왕이 될 젊은 헨리였다는 사실이다. 



(대관식에서 왕관을 받는 젊은 헨리왕, 그는 1170년과 1172년 두차례 잉글랜드의 왕으로 대관식을 치뤘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1173년에서 1174년 사이 반란을 주도한 것은 놀랍게도 왕위계승에 불만을 품을 요인이 없어 보이는 젊은 헨리였다. 그 이유는 이러했다. 젊은 헨리는 일단 명목상 왕위에 오르고 나자 상왕으로 실권을 장악한 아버지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젊은 헨리는 그보다는 자신에게 완전히 양위하던가 아니면 자신에게 간섭하지 않기를 희망했다. 젊은 헨리는 5살 된 막내 존을 제외한 삼남 리처드와 사남 제프리에게도 반란에 동참하기를 권유했는데 가정 교육에 문제가 있었는지 이 형제들은 아버지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혼쾌히 동참했다. (후일 막내 존의 인물됨을 보면 반란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다만 반란을 일으키키엔 너무 어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반란엔 어머니 엘레오노르가 연루되어 있다는 설이 있다)


 그들이 반란의 협력자로 고른 것은 앙제인 제국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헨리 2세의 경쟁자,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였다. 루이 7세 입장에서는 플랜테저넷 왕조를 약화시킬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를 적극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 프랑스 국왕은 리처드에 대해서 기사 서임식을 하기까지 하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1173년, 젊은 헨리 (당시 18세)는 영지와 돈을 약속하고 여러 영주들을 회유해서 자신이 물려 받게 될 왕국을 공격했다. 플란더스 백작을 비롯한 영주들의 힘과 루이 7세의 지원아래 반란은 초반에는 성공적으로 이루어 지는 듯 했지만 문제는 헨리 2세가 나이가 좀 들긴 했어도 만만치 않은 관록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다. 


 결혼 동맹을 통해 영토를 크게 확장하긴 했지만 사실 헨리 2세 역시 중세 군주 답게 군사적 실력을 기반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인물이었다. 사실 누구나 사장은 될 수 있어도 이윤은 아무나 낼 수 없다는 이야가 있듯이 제국은 아무나 (?) 세울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걸 유지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런 반란에 쉽게 무너질 헨리 2세 였다면 그의 제국은 오래 전에 붕괴했을 것이다. 


 헨리 2세는 곧 2만에 달하는 중세 시대에는 제법 큰 병력을 편성하여 반격에 착수했다. 결국 루이 7세는 전선에서 이탈했고 리처드 자신은 전투에서 패배해  Château de Taillebourg이란 성채에서 전쟁의 나머지 기간동안 농성하다 결국 헨리 2세의 군대앞에 항복했다. 



(리처드가 반란당시 농성전을 벌인  성채의 유적.  The ruins of Château de Taillebourg inCharente-Maritime, France I, the copyright holder of this work, release this work into the public domain. This applies worldwide. )


 한편 그러는 동안 젊은 헨리와 플랜더스 백작은 잉글랜드 상륙전을 진행했다. 잉글랜드 내부의 반란 세력 및 스코틀랜드와 힘을 합치기 위해서 였다. 이 소식을 들은 헨리 2세는 엘레오노르 및 왕실 가족과 심지어 약혼녀들까지 포함한 포로들을 동반하고 잉글랜드로 상륙했지만 이미 그 시점에서 반란세력은 제압당한 상태였다. 결국 1174년 반란은 종식되었다. 


 젊은 헨리는 이 일로 본래 자신이 받았던 잉글랜드 왕관을 빼앗기고 영국 해안의 좁은 영지만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나마 부정으로 인해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주모자가 아닌 단순 가담자로 분류된 리처드는 이보다 관대한 처분을 받아 결국 자신의 영지를 어느 정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리처드는 아버지의 궁전 앞에서 용서를 빌었으며 수일 후 동생 제프리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이 사건은 아직은 젊은 청년들에 비해 관록의 헨리 2세가 더 우위에 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결국 한 동안 더 이상의 반란은 막을 수 있었다. 이렇듯 중세 봉건 사회는 얕보이기 시작하면 자식들도 반란을 일으키는 전란의 세기였다. 


 십자군 전쟁과 별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리처드 1세의 성장 배경과 인물됨에 대해서 사전 설명을 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리처드만이 이렇게 기사도 정신을 논하기 이전에 인간됨에 문제가 있는 중세 군주는 아니었다.  권력의 비정한 속성 때문인지 형제 부모 친척간의 죽이고 싸우는 피비리내 나는 투쟁은 우리에게도 사실 낮설지는 않다. 평범한 인간도 권력을 지니면 변하게 마련인데 어린 시절부터 권력 투쟁과 전쟁에서 자라온 리처드 1세에게는 아마도 정의롭게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면 정의가 되는 상황이 너무 자연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다. 


 사실 앞서 설명한 살라딘이 특이한 경우이지 리처드 1세는 좀더 자연스런 경우라고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리처드 1세라는 인물은 좀더 한쪽으로 극단에 치우친 인물이었다. 그의 용기와 무용은 의심할 수 없지만 기사도 이전에 인간성은 의심할 수 밖에 없었으며, 통치 능력은 의심할 바 없이 낙제점이었다. 하지만 앞서 본 보에몽과는 달리 또 그 용맹성 때문에 인기있는 중세 기사 이야기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나름 매력 적인 영웅이자 악당인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참가할 때 까지 좀더 이야기 해보자.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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