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자라
엔리코 단돌로 원수가 약속한 돈을 마련하지 못해서 전전긍긍 하고 있는 십자군을 방문한 것은 1202 년 8월말이었다. 병사들의 대부분은 중세 당시 한번 퍼지면 대책이 없었던 전염병을 예방할 목적으로 좁은 진지 안을 벋어날 수 없었으므로 갑갑하기 짝이 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이대로는 이미 많은 돈을 쓴 상태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망신스럽게 그냥 돌아갈 위기에 처한 귀족과 기사들도 갑갑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한 단돌로 원수는 이들이 좀처럼 받아들이기도, 받아들이지 않기도 어려운 제안을 내놓는다. 그것은 본래 아드리아 해의 베네치아의 보급기지였다가 헝가리 왕을 배후에 끼고 반란을 일으킨 자라 (Zara, 현재의 크로아티아의 자다르 (Zadar) ) 을 공격하는 걸 도와 준다면 빚을 갚을 수 있을 때 까지 연기 해 주겠다는 것이다.
갑자기 뜬급없이 왜 이 도시가 등장하는 지에 대해서 잠시 설명해 보면 이렇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 기복이 있긴 해도 꾸준히 쇠퇴해 가던 비잔티움 제국은 본래 자신이 지배했던 아드리아해 양쪽, 그러니까 이탈리아 반도와 발칸 반도의 지배력을 꾸준히 잃어갔다. 이탈리아 반도는 진작에 비잔티움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서 중부에 교황은 독립한 상황이었고 북부는 일단 명목상 신성 로마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남부는 결국 노르만 족에게 빼앗기게 된다.
한편 그보다 좀 늦게 발칸 반도 역시 새롭게 일어난 여러 민족들에게 서서히 뺏기면서 (달리 생각하면 이들 민족이 독립하면서) 점처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 아드리아해 가장 안쪽에는 바로 석호안의 섬나라 베네치아가 존재한다. 베네치아는 강력한 해상 무역 국가로써 육지의 상황이야 그렇다 쳐도 바다는 반드시 자신의 지배하에 놓지 않으면 무역은 커녕 국가의 존립이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베네치아에서 아드리아해, 동지중해, 콘스탄티노플,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거대한 지역에 중간 기지 역활을 할 수많은 거점들을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15- 16세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대 판도. 앞서도 설명했듯이 아드리아해에서 시작되는 주요 기지들은 베네치아의 생명선이었다. CC-BY-SA-3.0,2.5,2.0,1.0; Released under the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Original uploader was -kayac- at it.wikipedia )
이 거점 중에서 아드리아해 한 가운데 자라라는 도시가 있다. 발칸 반도의 달마티아 지방에 있는 이 도시는 카톨릭을 믿는 도시로써 1183 년 이후 베네치아의 중간 보급 기지 역활을 거부하고 반란 상태였다. 강력한 힘을 가진 베네치아가 이들을 한번에 처리하지 못한 것은 이 도시가 교황 및 헝가리 왕 에머릭 1 (Emeric I, King of Hungary) 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왜 크로아티아의 도시인데 헝가리의 보호를 받고 있었을까 ? 그것은 당시의 지도가 지금과는 달라서 이 지역이 당시 헝가리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아래 지도를 보면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1190 년대 헝가리 왕국과 주변 지도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현재 구글 맵에서 자다 (자다르, Zadar) 의 위치. (붉은 색 A) 지금은 크로아티아 영토다)
에머릭 1 세는 사실 십자군에 참가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는 이전에 설명한 벨라 3세와 안티오크의 아그네스 (Agnes of Antioch : 공녀 콩스탄스와 르노 드 샤티옹 사이의 딸이다)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왕이었다. 이런 든든한 배경으로 인해 자라는 베네치아로 부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베네치아 입장에선 자라는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베네치아의 바로 앞 마당이랄 수 있는 아드리아해 중간에 있는 이 도시는 베네치아 공화국으로써는 반드시 점령해야 할 도시였다. 따라서 단돌로 원수는 십자군을 동원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십자군이 마련한 비용은 그래도 귀족들이 많은 재산을 내놓아서 무려 5만 1천 마르크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8만 5천 마르크에 모자랐고 도저히 남은 비용을 채울 수 없던 십자군 수뇌부는 결국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누가 봐도 십자군이 교황의 보호를 받는 카톨릭 도시를 공격하는 건 어불 성설이었다. 물론 이전 십자군 전쟁사를 보신 독자들이라면 이미 1- 3차 십자군은 물론 민중 십자군 까지 어김없이 같은 기독교도 들부터 먼저 공격해 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로마 교회나 혹은 토착 기독교도들과의 싸움인 경우가 많았고 지금처럼 교황의 지지를 받는 카톨릭 계 도시를 공격한 일은 드문 일이었다.
일부 기사들은 결국 여기서 종군을 거부했다. 그들은 베네치아에서 벋어나 독자적으로 성지로 가기로 맹세했으나 그 수는 매우 적었고 사실 별 의미있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기사들과 영주들은 이것이 예루살렘 수복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라는 편리한 변명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 당장 마련할 길이 없는 돈을 내는 것 보다 더 나은 조치로 생각되었다.
9월이 되자 일단 합의를 본 십자군과 베네치아 군 양측은 부산히 준비를 했다. 대략 병력은 베네치아 측 1만명과 십자군 1만명으로 2만의 병력이었고 선박은 210 척 정도였다. 이는 중세 기준으로 보면 대함대로 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를 이끌고 그들은 카톨릭 도시인 자라를 공격할 차비를 했다.
14. 자라 공방전 (Seige of Zara. 1202 년 11월 10일 - 11월 23일)
연합 함대가 베네치아를 출발한 것은 10월 8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이 자라를 포위하기 위해 달마티아 앞바다에 나타난 것은 11월 10일이었다. 베네치아에서 자라 까지는 직선거리로 따지면 수백 km 에 불과해서 사실 지금 같으면 배로 가도 하루 이틀 거리다. 속도가 느린 갤리선이라 처도 일주일이면 될 거리를 왜 이렇게 느릿느릿 돌아갔는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중세 당시 이와 같이 느린 이동 속도는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앞서 3차 십자군 당시에도 프랑스 - 영국 연합 함대는 꽤 느릿 느릿한 속도로 거의 1년에 걸쳐 지중해를 건넜다. 특히 함대의 규모가 대규모일 경우 필요한 물자를 싣는 것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데다 기상이 조금만 좋지 않으면 꼼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바닷길로 간다고 해도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보면 대항해 시대나 중국의 정화의 원정 시대에는 항해술이 중세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상세한 기록은 없지만 아마 이들은 중간 기지에서 물자를 싣거나 혹은 기상 악화로 대기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달이나 걸려 자라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이 워낙 부산히 준비를 했기 때문에 십자군 - 베네치아군의 연합군이 자라 근방에 당도했을 때 이미 자라는 자신이 공격의 표적이 되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을 대비해서 이런 저런 환영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십자군들은 복잡한 해안선을 지닌 섬들 사이에 견고하게 구축된 요새인 자라를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신이 손수 하시지 않는한 이 견고한 요새를 어떻게 점령한단 말인가 ? " 라고 반문하는 이도 있었다. 자라인들은 연합군이 선박이 안쪽으로 침투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쇠사슬을 비롯한 장애물까지 설치해 놓은 상태였다.
(자라는 달마티아의 복잡한 섬들과 해안선, 절벽등으로 보호 받은 천혜의 요새 지형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강국 베네치아의 거듭된 침공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
적의 침공에 앞서 심리전의 일환이었는지 자라측에서는 십자군을 대상으로 십자가를 들고 이교도 대신 기독교도를 공격하는 십자군이 어디 있는지를 따져 물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 잘못된 이야기 였다. 1-3차 십자군 모두 기독교도 부터 먼저 공격했기 때문이다. 굳이 차이가 있다면 카톨릭 교도를 공격했다는 점 정도였다.
이 자라 포위전에서는 베네치아의 독특한 상륙선이 등장했다. 이는 나중에 다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도 등장하게 되는데 대략 길이 30 미터, 너비 9 미터에 높이 12 미터에 달하는 공성 타워 모양의 배로 해안가에 세워진 성벽을 공략하는데 사용되었다. (나중에 콘스탄티노플 공방전에서 다시 설명) 그리고 150 개의 공성기가 성벽을 무너뜨리는 데 사용되었다. 물론 이것들은 살라딘이 구축한 견고한 카이로 요새를 공략하기 위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역시나 기독교도들을 공격하는데 우선 사용되었다. 사실 이 전쟁 기계들은 이교도를 위해서는 한번도 돌을 발사하지 않을 운명이였다.
(자라 공성전 구스타프 도레 작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
자라는 11월 23일 함락되었고 결국 다시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격분한 건 당연했다. 교황은 즉시 십자군과 베네치아군 전체에 파문장을 날렸다. 하지만 십자군 측이 이 전투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했기 때문에 일단 십자군에 대해서만 파문은 철회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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