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사자심왕의 최후
사자심왕 리처드 1세가 3년의 휴전 기간이 끝난 후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유럽 귀환길에 오른 것은 1192년 10월 6일 이었다. 그의 귀국길은 원정길 이상으로 평탄치 못했다. 일단 당시에는 흔히 그랬지만 거친 풍랑으로 인해 리처드 1세는 동 지중해에서 이탈리아나 시칠리아로 전진하지 못하고 결국 당시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인 코르푸 (Corpu) 로 항로를 변경해야 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리처드 1세가 키프로스를 점령하면서 부터 그와 적대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적대적인 지역에 상륙해야 하는 부담이 있기는 했지만 일단 다른 대안이 없었으므로 잉글랜드 함대는 비잔티움 제국의 해안도시인 코르푸로 항로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마저도 풍랑 때문에 잉글랜드 함대는 코르푸도 아닌 아퀼레아 (Aquileia) 에 난파되고 말았다. 이 때 부터 리처드 1세는 어쩔 수 없이 안전한 해로 대신 적대적인 세력으로 둘러싸인 육로로 중부 유럽을 통과하는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본래대로도 중부 유럽 육로는 그다지 않전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전의 십자군들이 증명해 보인바가 있다. 예외라면 강력한 병력을 이끈 프리히드리 바바로사가 있을 수 있지만 리처드 1세의 처지는 그와는 많이 틀렸다. 바바로사가 이끈 병력은 당시 유럽 최대 규모의 군대였을 뿐 아니라 감히 그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비잔티움 제국 마저도 염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바바로사는 살아 생전에 리처드 1세 처럼 많은 적을 만든 적은 없었다.
리처드 1세의 불안한 육지 여행은 곧 중부 유럽에서 끝나게 된다. 리처드 1세 일행은 중부 유럽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한 하인리히 사자공 (Heinrich der Löwe) 의 영토를 지날 때 였다. 하인리히 사자공 (영어로는 Henry the Lion) 은 리처드 1세와 비슷한 별칭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보다 훨씬 연배가 위였다. 그는 벨프가의 수장으로 바바리아와 작센의 공작이었다.
(하인리히 사자공의 전성기의 영토. 리처드는 비엔나 근처에서 사로잡혔다 )
하인리히 사자공은 전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아 엘레노오르 사이에 첫번째 딸이자 리처드의 누나인 마틸다와 결혼여 사실 리처드 1세와는 동서 지간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리처드 1세와 사이가 좋지는 못했다. 한편 바바리아 영지의 근처는 과거 아크레 전투에서 그와 원수 지간이 된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드 5세의 영지와 가까웠다.
리처드 1세는 비엔나 근처에서 크리스마스 직전에 레오폴드 5세에게 사로잡혔다. 레오폴드 5세는 사실 몽페랏의 콘라드와 사촌관계 였는데, 콘라드 암상 용의자로 리처드 1세를 기소한 것이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리처드 1세가 배후에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꽤 있었기 때문에 사실 증거는 없어도 혐의는 충분했다.
한편 이에 리처드 1세는 신분이 낮은 종자 및 순례자들 사이에 섞여 변장을 하고 탈출하려 했지만 그가 먹는 식사가 가난한 순례자들이 먹기에는 너무 호화스러운 것 (혹은 비싼 반지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이었기 때문에 곧 정체가 들통나고 말았다.
(지금은 잔해만이 남은 뒤른슈타인 성 Ruin of the castle of Dürnstein, Wachau, Austria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 Airin )
레오폴드 5세는 리처드 1세를 체포해 뒤른슈타인 (Dürnstein) 성에 포로로 구금했다. 이는 십자군을 구금하거나 공격해서는 안된다는 서약을 어긴 것으로 비난을 받을 만 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기엔 리처드 1세가 적이 좀 많다는 것이다. 리처드 1세는 1193년 3월에 레오폴드 5세의 상위 군주인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 (프리드리히 1세 바바로사의 아들) 에게로 넘겨져 스피어로 이송되었다.
당시 하인리히 6세는 다시 이탈리아에 대해서 영향력을 강화하여 교황을 굴복시키기 위해 절치 부심하고 있었다. 당시 호엔 슈타우펜 제국은 세계 제국 계획이라는 원대한 꿈을 품고 일단 이탈리아부터 평정하려 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막대한 전쟁 비용이 필요했다. 그가 리처드 1세의 신병을 인도받은 것은 다름이 아닌 전쟁 비용을 몸값으로 뜯어 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리처드 1세가 몸값을 받고 풀려나면 왕위 찬탈을 노리고 있는 동생 존이나 무능한 잉글랜드 국왕을 즉위시키려 노력 중인 프랑스 국왕 필립 2세 모두 불리한 상황이 되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반대했다. 특히 존은 이 시기에 왕위를 찬탈하려 노력했지만 결국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하인리히 6세가 요구한 몸값은 무려 15만 마르크로 당시 은으로 환산하면 6만 5천 파운드라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이는 당시 플랜테저넷 왕조의 연 수입의 2-3배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사태가 이지경에 이르자 리처드 1세의 어머니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직접 뛰어 들어 수도원과 수녀원까지 이 비용을 부담하게 해서 결국 비용을 마련하게 된다.
반면 동생인 존과 필립 2세는 급히 8만 마르크의 거금을 모아 성 미카엘 축일 (9월 29일) 까지 리처드를 붙잡아 주기를 하인리히 6세에 간청했다. 결과적으로 하인리히 6세에게 돈을 먼저 전달한 쪽이 엘레오노르 였으므로 리처드 1세는 1194년 2월 4일 석방된다.
훗날 이 이야기는 꽤 윤색되게 되는데 로빈 훗이나 아이반호에서는 무능한 폭군 존의 지배에 신음하던 영국 국민들이 이에 저항하고 있었고 리처드 1세는 혈혈단신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폭정에서 국민들을 해방시킨다. 이 이야기에서 진실은 존이 무능하다는 정도다. 실제로 영국 국민들이 신음하고 도적때가 활개를 친 이유는 리처드가 매긴 무거운 세금 때문이었다.
이후 리처드 1세는 노르망디를 비롯 적에게 빼앗긴 영토와 반기를 든 영주들을 하나씩 진압해 나갔으며 계속되는 전쟁과 몸값마련으로 인해 국민들은 무거운 세금을 감당해야 했다. 계속되는 전쟁터에서 역시 리처드 1세는 전방에 있었다. 그리고 1199년 리모주 근방에서 적이 쏜 화살에 맞은 상처가 곯은 것이 원인이되어 사자심왕은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한때 영웅으로 세상을 떠들썩 하게 만든 리처드 1세의 최후치곤 허망한 마지막이었다. 그가 마지막 했던 일은 리모주 자작령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대기 작가들은 사자가 개미 때문에 죽었다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 사자의 것이라고 불린 그의 심장은 루앙 (Rouen) 에, 내장은 리모주의 살루스(Châlus)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몸의 부분은 퐁테브라드 사원 (Fontevraud Abbey)에 안장되었다.
(퐁테브라드 사원 (Fontevraud Abbey)에 안장된 리처드 1세 This work has been released into thepublic domain by its author, AYArktos. This applies worldwide.)
한때 꽤 미화되었던 리처드 1세 이지만 현재는 그 평가가 다소 변했다. 전쟁에서는 사자의 심장이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은 용맹과 힘으로 경탄을 자아냈던 리처드 1세 이지만 통치에선 좋지 못한 성과를 남긴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큰 실책은 존과 같은 무능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바로 그랬기 때문에 마그나카르타가 가능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마 상대가 리처드 1세였다면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고 영국 민주주의 시작은 그만큼 더 늦어졌을 것이다. 오히려 무능함으로 역사의 발달을 앞당긴 인물들 가운데 존은 후세의 루이 16세와 더불어 영원히 기억될 인물이다.
(존왕, 그 이후 누구도 John 이라는 흔한 이름을 왕명으로 사용하지 않아서 존왕이라는 명칭 자체가 고유 명사로 정해졌다. This image (or other media file) is in the public domain because its copyright has expired.)
(다음에는 살라딘의 마지막과 살라딘의 유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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