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빅뱅 이론이 있기전
우주의 시작에 대한 이론은 20세기 전까지 대개 종교의 영역이었다. 과학 혁명의 세기라는 17, 18세기에도 과학자들은 이런 종교적 설명에 별 의문을 품지 않았다.
반면 신학자들 중에는 천지 창조의 순간이 언제인지 알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북아일랜드의 아마의 대주교인 제임스 어셔 (James Ussher) 는 이 중에서도 가장 정밀하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계산을 한 사람이다. 그는 오랜 고문서와 성경의 연구를 토대로 바빌론의 네브카드네자르 (혹은 느부갓네살) 의 죽음이 구약성경에 언급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하고 그의 사망시기로 부터 대략적은 시간을 역산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밝혀낸 천지 창조의 시간은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오후 6시였다. 이 날짜는 1710년 영국 국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았고, 19세기전까지는 과학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치였다.
그런데 19세기에 이르러 지질학과 생물학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지금 같은 지형이 생기고 또 생명체가 진화하는 데는 수백만년에서 수억년이 필요하다는 이론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찰스 다윈이나 혹은 지질학의 아버지인 찰스 라이엘은 지구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후 과학이 발달하고 또 20세기에 이르러 방사선 연대 측정이 가능해 지면서 지구의 나이가 기존에 생각했던 보다 매우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많은 과학자들은 우주 자체의 나이는 이보더 더 오래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곧 우주의 나이가 얼마인지 모두가 궁금해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개의 과학자들은 그런 호기심보다 훨씬 편리한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것은 우주에는 시작이나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모습은 항상 정적이고 영속적인 것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의 아낙시만데르 같은 철학자들의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무한하고 정적인 우주 모델은 시작이나 끝이 없기 때문에 우주의 탄생이나 진화에 대해서 연구할 필요가 없다는 매우 큰 장점이 있었다. 따라서 20세기 초반까지 우주의 창조나 나이에 대해 궁금해 하는 과학자들이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2. 빅뱅 이론의 시작
빅뱅 이론은 사실 우연치 않게 비주류로부터 시작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이 이론의 단초를 제공한 것은 20세기 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인 알버트 아인슈타인 이었다. 아인슈타인은 1905년에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이후 1917년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은 우주의 네가지 힘 - 강한 핵력, 약한 핵력, 전자기력, 중력 - 가운데 중력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뉴튼의 만유인력의 법칙보다 적용범위가 더 큰 이론으로써 20세기 과학의 가장 혁명적인 성과였다. 특히 작용 범위가 큰 중력을 다루기 때문에 우주를 연구하는데 매우 필수적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하고 난 이후 그의 위대한 선배인 아이작 뉴튼경과 비슷한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아이작 뉴튼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표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뉴튼의 만유인력 (혹은 중력법칙) 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주의 모든 물체들 사이에는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이 작용하며, 그 인력의 크기는 물제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뉴튼경은 이 이론에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아챘다. 그것은 무엇일까?
(아이작 뉴튼 경)
이 이론에는 물체들 사이에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밖에 작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나무에 매달린 사과가 지구로 끌려오듯, 우주의 모든 물체들이 서로 잡아당겨 결국 한점에 모이게 된다는 것이다.
뉴튼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한이 넓으면서 대칭적인 우주를 생각했다. 우주의 어느 방향에서든 같은 힘으로 서로를 잡아당긴다면 우주는 균형을 이루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 보자. 내 주변에 두명의 사람이 나를 좌우에서 팔을 잡고 당긴다. 나 역시 두 사람을 잡아당긴다. 그러면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다시 그 두사람 좌우에 둘이 똑 같은 행동을 하고 또 그 사람 좌우에서 누군가가 당긴다면? 이것이 무한이 반복되면 서로 모두 잡아당기지만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그러나 이 생각에도 문제는 있는데, 만약 누가 하나 넘어지면 그 다음엔 도미노 처럼 서로 쓰러지게 될 것이란 점이다. 예를 들어 은하 2개가 서로 충돌해서 합쳐지면 한쪽의 중력이 커지면서 인근 은하들을 모두 흡수하지 않을까?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뉴튼은 신께서 개입해서 이런 문제를 없앤다고 믿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도 결국은 인력만 있었기 때문에 똑같은 딜레마에 봉착한 것이다. 하지만 20세기의 아인슈타인은 신앙심으로만 문제를 해결할 순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보다 수학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스스로가 생애 최대의 실수라고 말한 우주 상수 (cosmological constant) 였다.
문제의 핵심은 물체사이에 서로 잡아당기는 인력만 존재한다는데 있다. 그러면 서로 밀어내는 척력이 존재한다면 문제가 해결된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중력 법칙에 우주 상수를 포함시켜 일종의 반중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척력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척력은 우주 거리가 클때는 의미있는 힘을 발휘하지만 좁은 거리에서는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 그렇다면 태양계나 지구 주변의 가까운 별들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이론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우주의 붕괴를 막을 수 있다. 얼마나 훌륭한 수학적 설명인가!
물론 사실 우주의 붕괴를 막아야 하는 것 말고는 우주 상수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당시엔 없었다. 사실 이것은 어찌 보면 프톨레마이오스가 행성들의 복잡한 운동을 명쾌하게 설명하는 지동설을 배제하고 천동설을 설명하기 위해 복잡한 주전원을 도입한 것과도 닮아있었다. 행성들이 이렇게 복잡한 운동을 하는 이유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설명하기 위한 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세의 과학자들에게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는 그래야 될 이유도 없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괴물이었다.
사실 아인슈타인 본인도 이 우주 상수를 가르켜 자신의 이론의 아름다움을 심하게 훼손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비록 많은 학자들이 이 의견에 동조했지만 그들 역시 우주가 한점으로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정도 추함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하지만 일부의 과학자들은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알렉산더 프리드만)
최초로 우주 상수를 배제한 이론을 내세운 사람은 러시아의 수학자인 알렉산더 프리드만 (Alexander Friedmann) 이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 다양한 우주 상수를 가진 우주의 모델에 대한 수학적 연구를 수행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우주 상수가 0인 모델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사실 상 우주 상수가 없는 우주 모델이기 때문이다.
우주 상수가 0일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는 앞서 이야기 했다. 그것은 우주가 중력에 의해서 한점으로 붕괴되는 것이다. 그런데 프리드만은 독특한 우주 모델을 제시했다. 그것은 우주 상수가 0 이지만 초기에 팽창으로 시작되는 우주였다. 이 우주는 초기의 팽창력으로 중력을 이겨내고 팽창하는 우주 모델이었다.
이런 우주 모델에서는 세가지 가능한 시나리오가 있었다. 첫째는 우주에 많은 물질이 있고, 이들의 중력이 팽창력을 압도하여 결국 중력의 힘으로 한점으로 수축하는 우주이다. 둘째는 우주에 물질이적고, 이들의 중력이 팽창력에 압도당해서 결국 무한히 팽창하는 우주다. 셋째는 이 두가지 힘이 균형을 이루어 수축도 팽창도 하지 않게되는 우주이다.
이 이론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바로 우주의 팽창이라는 아이디어 이다. 이것은 우주 상수가 0인 우주가 왜 바로 붕괴되지 않고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을 뿐 아니라 현재의 우주가 지금보다 더 작았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 이 생각을 발전시키면 우주가 아주 작은 점이었을 때가 있을 수 있고, 이것은 결국 빅뱅 이론을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드만은 자신의 이론을 가다듬어 빅뱅이론의 창시자로 대우받지는 못했다. 또 빅뱅이론이 주류가 될 때까지 오래 살지도 못했다. 그는 37세의 젊은 나이로 1925년 병으로 사망했다. 사망하기전 우주 상수를 배제한 우주 모델로 아인슈타인의 공격까지 받았기 때문에 그는 잘 알려지지도 못했고, 또 명예를 누리지도 못했다.
빅뱅이론의 실제적인 아버지라고 불릴 만한 인물은 벨기에의 카톨릭 신부이자 물리학자라는 이채로운 경력을 가진 조르주 르메트르 (풀네임 - Monsignor Georges Henri Joseph Édouard Lemaître) 였다.
(신부복을 입고 물리학을 강의하는 르메트르)
이 인물은 1923년 카톨릭 신부로 서품을 받은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을 거쳐 미국의 MIT 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음 고든 프리맨 박사와 같다) 이후 유럽으로 건너와 루뱅 대학에서 교수직을 얻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근거를 둔 우주 모델을 연구했다.
그가 연구한 우주 모델은 과거 프리드만이 연구한 것 보다 한단계 진보된 것이었다. 그는 우주의 운명 뿐 아니라 창조와 진화에 대해서도 이론을 발전시켰다. 만약 우주가 팽창한다면 과거에는 지금 보다 작았을 것이고, 제일 처음에는 하나의 원자 같은 우주에서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르메트르는 이것을 원시 원자라고 불렀다.
르메트르가 원시 원자 가설이란 논문을 발표한 직후인 1927년 마침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솔베이 학회가 열렸다. 이 때 르메트르는 아인슈타인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아인슈타인에게 자신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론을 설명하자 아인슈타인은 이미 프리드만으로 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으로 논문을 검색할 수 없던 시절이라 잘 알려지지 않은 논문인 경우 이미 자신과 같은 아이디어를 누가 발표했다면 모를 수 도 있던 시기였다.
(르메트르와 아인슈타인)
아무튼 이 만남에서 아인슈타인은 르메트르에게 "축하합니다. 당신이 빅뱅이론을 발견했군요!" 라고 하진 않았다. 대신 "당신의 계산은 정확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물리는 혐오스럽습니다" 라고 말했다. 아무런 뒷받침할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당대 최고 과학자로 부터 거절 받자 르메트르는 더 이상 자신의 원시 우주 이론을 발전시킬 의욕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다음의 발견이 없었다면 그는 다시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3. 팽창하는 우주
에드윈 허블은 건장한 체력과 뛰어난 두뇌를 동시에 겸비한 인물이었다. 이 두가지 재능은 특히 초창기 천문학자들에게 중요한 재능이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이런 허블이 법률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그는 옥스퍼드 대학에서까지 법률을 공부했다.
(에드윈 허블)
아버지의 사후 허블은 전공을 바꿔 천문학으로 전향했다. 그는 1919년 윌슨산 천문대에 취직했고, 이곳에서 곧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밤중에 윌슨산 천문대에서 일하는 것은 고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추위와 졸음을 견디고, 몸이 떨리는 것을 억제해가며 관측하는 작업은 건강하고 끈기있는 허블의 장기였다.
허블은 1923 - 1924년에, 새로 만든 윌슨 산의 100인치 망원경을 사용하여, 안드로메다 은하에서 일정한 밝기를 지닌 케페이드 변광성을 찾아냈다. 이 변광성을 이용하면 간접적으로 거리를 잴 수 있다. 안드로메다 은하는 적어도 90만 광년 이상 떨어져 있었다. (실제로는 250만 광년) 당시까지 과학자들은 안드로메다의 정확한 거리를 몰랐다. 그래서 안드로메드는 은하가 아니라 성운으로 불리고 있었다. 이 발견으로 마침내 안드로메다 은하가 된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때까지 모든 천체가 은하계 안에 있는지, 아니면 우리 은하계 밖에도 다른 은하가 있는지 잘 몰랐는데, 허블의 발견으로 우리 은하계가 여러 은하계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된 것이다. 따라서 허블의 발견은 20세기 초반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였다. 우주에 대한 인간의 생각을 크게 변하게 만든 발견이었다.
그러나 허블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좋은 망원경인 윌슨 산의 100인치 망원경을 사용해서 20세기 우주에 대한 생각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킨 놀라운 과학적 발견을 이루었다.
당시 빛의 파장을 분석하는 분광 기술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과학자들은 교통 경찰이 이용하는 속도계와 마찬가지 기술을 이용해 도플러 효과를 이용 움직이는 별의 속도를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해 냈다. 도플러 효과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보자.
물체가 한쪽 방향으로 이동하면 이동하는 방향에서 보면 파장이 짧아지며, 멀어지는 방향에서는 파장이 느려진다. 이를 빛에 적용시켜 말하면 파장이 짧아지는 것은 파랗게 보이는 쪽으로 이동하는 것 (즉 청색 편이) 이고, 반대로 파장이 길어지는 것은 붉게 보이는 것 (즉 적색 편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위의 그림을 보자 젤 위에 있는 은하는 그냥 가만이 있는 은하이다. 이 은하는 파장의 편이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2번째 에 있는 은하는 지구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러면 이 은하는 붉은 색 쪽으로 파장이 이동해서 적색 편이가 나타나게 된다. (내부의 검은 막대가 빨간색 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자) 반대로 3번째 은하는 우리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면 청색 편이를 나타내게 된다 (내부의 검은 막대가 파란색 쪽으로 이동한 것을 보자)
(그런데 여담이지만 이글을 쓸 때 참조한 사이먼 싱의 빅뱅에 이런 유머가 있다. 어느날 한 천문학자가 신호 위반으로 경찰 단속에 걸렸다. 이 천문학자는 자신이 너무 빨리 차를 모는 바람에 신호등으로 부터 청색 편이가 일어나 빨간색 신호등이 파란색으로 보였다고 주장했다. 경찰들은 당황했지만 이 천문학자의 전문성을 존중하여 신호 위반 딱지를 떼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속도 위반 딱지를 뗐다. 왜냐하면 그런 청색 편이가 나타나려면 차를 시속 2억 킬로미터로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처음에는 별의 움직임을 알기 위해 이 기술을 사용했으나 곧 은하에 대해서 적용했다. 그러나 많은 은하들이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으며 그 중 대부분은 우리에게서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는 정적인 우주를 믿었던 과학자들에게 충격이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온갖 이론들이 나왔으나 어느 것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당시 세계에서 제일 좋은 망원경과 관측 기술을 가진 에드윈 허블에게 이것은 자신이 해결해야할 문제로 생각되었다.
1929년, 허블과 그의 조수인 휴메이슨은 중대한 발표를 했다. 그들은 은하들의 적색 편이와 거리를 도표로 정리했는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 대부분의 은하가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는데 그 속도는 거리에 비례했다. 우리우주에서 2배 멀리 떨어진 은하는 2배 빨리 멀어지고, 3 배 멀리 떨어진 은하는 3배 빨리 멀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허블은 이 상관 관계를 허블의 법칙으로 정리했다.
Vr = Hr
( Vr : 은하의 후퇴속도 [km/s], r : 은하까지의 거리 [Mpc], H :(허블 상수) [km/s/Mpc] )
즉, 은하의 후퇴속도는 은하까지의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우주가 팽창한다는 증거가 되는가? 다음의 그림을 보고 생각해보자.
여기 않에다가 건포도를 넣은 빵 반죽이 있다. 반죽은 우주이고, 반죽안에 건포도는 바로 은하이다. 자 위의 그림을 보자. 반죽의 한 건포도 (바로 우리 위치) 에서 볼때, 빵을 구워서 본래 크기에 2배 부풀어 오를 때 5cm 떨어진 건포도는 10cm 거리로 멀어졌지만 10cm 거리에 있던 건포도는 20cm 거리로 멀어졌다. 즉 5cm 떨어진 건포도는 5cm 멀어졌지만 10cm 있던 건포도는 10cm 멀어진 셈이다. 멀리 떨어진 건포도일 수록 거리에 비례해 멀어지는 속도가 증가했다. 이것은 모든 건포도들에게 해당되는 이론이다. 즉 빵은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우주에 적용시키면 우주가 팽창하고 있는 것이다.
(혹시 이래도 이해 안되실 분을 위해 추가 설명을 한다면 - 여기 10cm 고무줄이 있다. 한쪽 끝을 고정시키고 지구라고 하자, 그리고 5cm, 10cm 지점에 표시를 해서 은하라고 하자. 이 고무줄을 20cm로 늘리면5cm, 10cm 에 표시된 점들은 각각 지구에서 5cm, 10cm 씩 멀어졌다. 거리가 2배가 되면 멀어지는 속도가 2배가 된다. 물론 우주에 해당되는 고무줄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허블과 휴메이슨이 다시 1931년에 더 자세한 관측 결과를 통해 이 사실을 더욱 뒷받침하자 이제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이야기는 우주가 과거에는 이보다 작았으며, 더 나아가 한점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이것은 르메트르의 이론에 완전히 부합되는 것이었다.
1931년 윌슨 산 천문대에 방문한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인정했다. 우주 상수를 넣어서 만들려고 했던 정적이고 무한한 우주는 없었고, 대신 동적이고 팽창하는 우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야 말로 자신의 가장 큰 실수라고 주장했다. 아인슈타인은 그런 보기 흉한 것이 자연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가 없다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의 공개적인 지지로 1933년에 이르러 르메트르와 프리드만의 생각은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아는 빅뱅이론으로 발전하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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