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후버댐, 그 비하인드 스토리





 비록 미국 댐이지만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한 이름이 있다. 바로 오늘 이야기할 후버 댐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 댐이 유독 우리에게 친숙한 이유는 이 댐이 뉴딜 정책의 상징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미국인 세 명중 한명이 실업자가 된 대공황 시기, 일자리 창출과 경기 활성화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의 대표 주자로써 후버 댐 (Hoover Dam) 은 오늘날의 경제 상황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이름 중에 하나이다.




 (웅장한 후버댐의 정면)



 그러나 솔직히 언젠가 필자는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뉴딜 정책의 상징이라면 루즈벨트 댐이 더 맞지 않을까? 왜 뉴딜 세력의 비난의 표적이 된 후버의 이름이 뉴딜 정책의 상징물이 된 이 거대한 댐의 이름으로 선택되었을까? 지금 부터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말해 본다.





 1. 허버트 후버와 후버


 일단 이 후버 댐을 이야기 하려면 절대 빠질 수 없는 인물이 바로 허버트 후버 (Herbert Clark Hoover) 일 것이다. 댐 이름의 원래 주인공이니 말이다. 허버트 후버는 미 공화당 소속이며 1917년 미 식량청장, 1921년 미 상무부 장관을 거쳐 1929년에서 33년 사이 미국 31대 대통령을 역임한 인물이다.





 (Herbert Clark Hoover, 미국 31대 대통령)



 문제의 발단은 후버가 1922년 상무부 장관 재임시절 추진되던 불더 계곡 계획 (Boulder Canyon Project) 이다. 당시 LA 를 비롯한 이 지역 일대와 근처에서 급성장하던 라스베가스 같은 도시들에 물과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 콜로라도 강 불더 계곡에 대형 다목적 댐을 건설하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었다. 이 불더 댐 (Boulder Canyon Dam) 이 바로 후버 댐의 전신인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흔히 알려지기로 후버 댐은 대공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댐의 계획이 시작된 건 대공황보다 7년전인 1922년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후버 댐 건설 계획은 대공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댐은 건조한 이 지역 일대에 수자원과 전력을 공급할 목적에서 시작된 계획이었다. 그런데 왜 뉴딜 정책 = 후버댐이 되는 지는 나중에 추가로 설명하겠다.


 아무튼 1922년 허버트 후버등이 이 계획을 추진하긴 했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특징상 상원과 하원의 승인이 필요했다. 후버댐 (당시엔 불더 캐넌 계획)의 건설 예산을 승인 받기 위해 이른바 Swing - Johnson  법안이 제안되지만 이 법안은 번번히 부결된다.


 무려 1928년에 이르러서야 이 법안이 통과되어 당시 대통령이던 캘빈 쿨리지에 의해 불더 캐넌 계획 (Boulder Canyon Project) 이 법안에 서명한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1929년 후버가 31대 미국 대통령으로 쿨리지의 뒤를 잇는다.




 2. 불더 계곡 계획 (Boulder Canyon Project)


 일단 의회의 승인이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바로 삽질이 시작된 건 아니었다. 일단 계획이 처음부터 변경된다. 댐의 건설 위치가 본래 위치인 불더 캐넌에서 13km 하류인 블랙 캐넌 (Black Caynon) 으로 변경된 것이다. 그러나 이름은 여전히 불더 댐으로 불렸다.





 (본래 댐 건설 예정지인 불더 계곡의 사진)



 이 댐은 네바다 주와 애리조나주가 만나는 콜로라도 강의 블랙 캐넌에 건설되었고, 가장 가까운 대도시인 라스 베거스와는 약 50km 떨어진 곳에 건설되었다. 그러나 주변에는 라스베거스 말고는 사람 사는 곳이 거의 없다시피한 사막이었다.


 (한가지 여담이지만 네이버에서 눈팅을 하다 라스베거스가 후버 댐을 만들면서 노동자들이 쉴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생겼다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다. 그러나 라스 베거스가 시로 승격된건 1911년 이었고 앞서 말했듯이 댐을 만든건 라스베거스 같은 도시들에 물과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댐 개발 계획으로 라스베거스가 대도시로 성장한 건 사실이다)



 이 거대한 댐의 계획은 당시로써는 공학적인 도전으로 생각되었다. 무려 333만 입방 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가 소모된 이 댐은 높이만 221미터이고 기저부는 200미터에 두께가 200 미터에 달하는 콘크리트 아치 중력 댐 (Concrete Arch Gravity Dam) 이었다. 제거된 돌의 무게만 900만 톤이며 저수량은 320억 입방미터에 달했고, 예상 전력 생산은 135만 kw 였다. 당시 건축사상 처음 시도되는 일이었고, 물론 당시에 세계 최대의 댐이었다.




 (후버댐 건설 도면)


 이 댐을 건설하는 동안 콜로라도 강의 물을 우회시키기 위해 17m 지름의 4개의 거대한 우회로가 건설될 예정이었다. 또 건설을 돕기 위해 라스베거스까지 50km 의 철도까지 건설하고, 건설 노동자들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도록 인근에 불더 시티 (Boulder City) 라는 위성도시까지 건설할 예정이었다.



 이 정도면 이 거대한 건설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 회사에서 이 건설을 모두 하기는 어려웠으며 6개 회사가 협력해서 이 거대한 토목 공사를 담당하기로 했다.




 3. 대공황과 후버 댐


 1931년 3월 마침내 오랜 준비가 끝나고 불더 댐이 역사적인 착공을 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인 후버는 자신이 상무부 장관 시절부터 공을 들인 이 댐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후버 댐이라는 명칭을 붙였다.자신의 가장 중요한 업적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 상황은 후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1929년 이후 발생한 대공황은 1930년에는 다소 회복되는 듯 하였으나 다시 미국 경제는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여 주가 수준은 결과적으로 10분의 1로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인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후버를 강력하게 비난했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국민들도 후버를 싫어했다. 결국 후버는 재선에 실패하고 1933년 루즈벨트가 뉴딜 정책을 내세우면서 집권하게 된다.



 흔히 최근의 녹색 뉴딜과 연관되어 뉴딜 정책하면 토목 공사와 연관이 깊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이것보다 더 복잡하게 여러가지 정부의 경기 부양 및 저 소득층 지원 계획을 포함한 것이었다. 물론 대규모 토목 공사 또한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당시의 뉴딜 세력은 테네시 종합 개발 계획과 같이 이 후버 댐 건설을 뉴딜 정책에 포함시키려 하였다. 이미 뉴딜 세력이 집권하기 전부터 후버 댐은 건설되고 있었다. 그러나 공사 규모가 워낙 클 뿐 아니라 암반이 단단해서 공사는 천천히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짐에 따라후버 댐 건설 계획은 일정이 매우 빨라지게 되었다.



이렇게 일정이 당겨지다 보니 여러가지 문제들도 있었다. 당시 5000 명이 넘는 노동자를 갑자기 고용함에 따라 노동자들은 사막에 세워진 천막에서 생활해야 했다. 불더 시티가 완성될 때 까지 말이다.




 (당시 노동자들은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했다)




 (불더 댐 건설 장소)




 (건설 노동자들이 16톤의 콘크리트가 든 바스켓을 옮기고 있다)




 (앞서 본 바스켓으로 막대한 양의 콘크리트를 댐 내부에 부었다. 자세히 보면 표면을 고르는 인부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의 크기와 비교하면 얼마나 큰 공사인지 알 수 있다)



 (거의 완성되가는 댐)



 (지름 17미터의 거대한 우회로 - 환기도 잘 안되는 터널에서 발파작업을 하고 내연기관을 쓰는 차량을 운영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폐렴등으로 사망했다)



 (우회로에 들어갈 거대한 파이프 조각 중 하나)



 (high scaling 작업중인 인부들 - 주변의 암석을 고르는 이 작업이 가장 위험했다고 함)




 대공황 시기 이 댐 건설은 수만개의 일자리를 제공했다. 물론 1500만명에 달하는 실업자에 비하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 이 일대의 개발을 가져온 점에서 이 건설은 미국의 대역사였다. 그래서 인지 1985년 미국 정부는 이 댐을 National Historic Landmark 로 지정한다.




 (후버 댐과 인공호인 미드 호)





 이 댐은 뉴딜 정책으로 인해 2년 정도 앞당겨진 1936년에 완공되며, 1935년의 개관식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직접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이름은 인기없는 전임 대통령의 이름에서 불더 댐으로 바뀐 상태였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정작 댐의 실제 건설 위치인 블랙 캐넌의 이름은 한번도 공식적으로 댐이름으로 불린 적이 없다는 것이다)




 4. 뉴딜 정책과 후버



 사실 전 후버 정권에 입장에서 보면 최소한 불더 댐만은 자신들의 공적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 댐과는 별 연관이 없던 루즈벨트 정부가 자신들의 정책인 뉴딜 정책과 같이 홍보를 하면서 이름까지 바꾼 것이었다. 당연히 억울함을 호소할 만했지만 당시 대공황에 책임이 있던 후버 정권에서는 그냥 침묵만 지킬 수 밖에 없었다.



 후버 대통령의 복권은 1947년 루즈벨트 정권이 끝나고 난 이후 이루어졌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이 댐의 이름을 다시 후버 댐으로 바꾸는데 찬성한 것이다. 그 이후 이 댐은 뉴딜 정책의 상징이면서 이름은 후버 댐인 기묘한 동거 관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지금 생각컨데 이 댐이 비록 뉴딜 정책과는 무관하게 기획되었어도 뉴딜 정책과 연관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당시 경제난으로 정부 예산이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댐 건설을 더 서두른 것은 분명 뉴딜 정책의 결과였다. 만약 후버 처럼 균형 재정을 유지하려 했다면 이 댐은 중단되었을 지도 모른다. 이 댐을 비롯한 대형 토목 공사가 유지될 수 있던 건 분명 뉴딜의 공이었다.



 하지만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이 댐이 추진되었다는 설명은 분명 오류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름이 뉴딜 댐이 되거나 루즈벨트 댐이 됐으리라. 아니 최소한 불더 댐이나 블랙 캐넌 댐이 되어야 하지 후버 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몰라도 상관은 없지만 이 비하인드 스토리가 바로 왜 뉴딜 정책의 상징이 뉴딜 세력의 공적 1호인후버의 이름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긴글 끝까지 읽어 주신 분 있다면 감사드린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R 스튜디오 설치 및 업데이트

 R을 설치한 후 기본으로 제공되는 R 콘솔창에서 코드를 입력해 작업을 수행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게 하기 보다는 가장 널리 사용되는 R 개발환경인 R 스튜디오가 널리 사용됩니다. 오픈 소스 무료 버전의 R 스튜디오는 누구나 설치가 가능하며 편리한 작업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에 R을 위한 IDE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어 있습니다. 아래 링크에서 다운로드 받습니다.    https://www.rstudio.com/  다운로드 R 이나 혹은 Powerful IDE for R로 들어가 일반 사용자 버전을 받습니다. 오픈 소스 버전과 상업용 버전, 그리고 데스크탑 버전과 서버 버전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오픈 소스 버전에 데스크탑 버전을 다운로드 받습니다. 상업 버전의 경우 데스크탑 버전의 경우 년간 995달러, 서버 버전은 9995달러를 받고 여러 가지 기술 지원 및 자문을 해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데스크탑 버전을 설치하는 과정은 매우 쉽기 때문에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스톨은 윈도우, 맥, 리눅스 (우분투/페도라)에 따라 설치 파일이 나뉘지만 설치가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라면 R은 사전에 반드시 따로 설치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R 스튜디오만 단독 설치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뭐 당연한 이야기죠.   설치된 R 스튜디오는 자동으로 업데이틀 체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업데이트를 위해서는 R 스튜디오에서 Help 로 들어가 업데이트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업데이트 할 내용이 없다면 최신 버전이라고 알려줄 것이고 업데이트가 있다면 업데이트를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R의 업데이트와 R 스튜디오의 업데이트는 모두 개별적이며 앞서 설명했듯이 R 업데이트는 사실 기존 버전과 병행해서 새로운 버전을 새롭게 설치하는 것입니다. R 스튜디오는 실제로 업데이트가 이뤄지기 때문에 구버전을 지워줄 필요는

R 패키지 설치 및 업데이트 오류 (1)

 R 패키지를 설치하거나 업데이트 하다보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 경우 아예 R을 재설치하는 것도 방법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해도 해결이 안되고 계속해서 사용자는 괴롭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중 하나를 소개합니다.  새로운 패키지를 설치, 혹은 업데이트 하는 과정에서 같이 설치하는 패키지 중 하나가 설치가 되지 않는다는 메세지가 계속 나왔는데, 사실은 백신 프로그램 때문이었던 경우입니다.   dplyr 패키지를 업데이트 하려고 했는데, 제대로 되지 않아 다시 설치를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일부 패키지가 제대로 설치되지 않는다는 메세지가 나왔습니다.  > install.packages("dplyr") Error in install.packages : Updating loaded packages > install.packages("dplyr") Installing package into ‘C:/Users/jjy05_000/Documents/R/win-library/3.4’ (as ‘lib’ is unspecified) also installing the dependencies ‘bindr’, ‘bindrcpp’, ‘Rcpp’, ‘rlang’, ‘plogr’ trying URL ' https://cran.rstudio.com/bin/windows/contrib/3.4/bindr_0.1.1.zip ' Content type 'application/zip' length 15285 bytes (14 KB) downloaded 14 KB trying URL ' https://cran.rstudio.com/bin/windows/contrib/3.4/bindrcpp_0.2.2.zip ' Content type 'application/zip' length 620344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