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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3일 일요일

이반 뇌제 (9)










  17. 리보니아 전쟁의 시작 (1558 년) 


 리보니아 전쟁이 최종적으로 종료되고 리보니아 (지금의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지역) 연방이 완전히 분할 되는 것은 1583 년 이후이다. 리보니아 전쟁은 이반 뇌제의 치세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기 때문에 비중있게 이야기하긴 하겠지만 이 부분만 서술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일단 몇번에 걸쳐 나누어 설명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내용 자체가 이반 뇌제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반 4세는 리보니아 연방의 주요 항구 - 대표적으로 리가 (Riga) - 와 주요 도시를 발트해를 통한 서방과의 무역 창구로 삼고자 했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이다. 하지만 이는 당연히 러시아의 팽창이 매우 신경쓰이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의 군주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  Sigismund II Augustus I 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런 위기 국면에 리보니아 연방은 사실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보면 본래 리보니아 기사단과 리보니아 연방의 주 지배층이 독일계로 현지 토착 주민들을 지배하는 형태이었으므로 리보니아 주민들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 지배층이 누가 되든 큰 차이가 없게 느껴졌다. 더구나 리보니아 연방 자체도 당시 종교 개혁에 영향을 받아 신구교간 갈등이 점화되고 있었고 본래가 잘 통일된 정치조직이 아니었으므로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 지 전쟁 직전까지도 의견이 통일되었다고 보기 힘들었다. 오히려 종교 문제로 자기들끼리 치고 박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내분 상황은 외세의 개입을 용이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1557 년 지기문스트 아우구스투스는 리보니아 연방 문제에 개입해 포즈볼 조약 (Treaty of Pozvol) 을 맺는데, 이 일련의 조약들은 결국 리보니아 연방이 다시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 손을 잡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1554 년 러시아와 조약을 맺을 때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 협력하지 않겠다고 이야기지 하지 않았던가 ? 


 1557 년에 스웨덴과의 전초전을 끝낸 모스크바의 이반 4 세가 이 사실을 알고 격분한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미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이 군대를 동원해서 리보니아 연방 문제에 개입한 이상 러시아도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1558 년 러시아가 군대를 파견해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정하므로써 마침내 25 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리보니아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러시아를 포함 당시 여기에 관련된 모든 국가들이 리보니아 문제가 이렇게 질질 끄는 문제가 될 것이라곤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러시아는 궁극적으로 리보니아 전쟁과 관련해서 전쟁 자체는 물론이고 이와 파생된 문제로 상당한 피를 댓가로 치뤘다. 당시 리보니아 연방의 면적은 남한 면적 남짓한 크기였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 리보니아 연방은 아주 만만한 상대였을 것이다. 특히 동방의 숙적인 타타르 한국들을 정복한 이반 뇌제에게는 더 만만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문제는 리보니아 연방을 노리는 주변 강대국들이 만만하지 않은 상대라는 점과 리보니아 연방도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는 점이다. 



 18. 리보니아 전쟁의 초반 전세 (1558 - 1559 년)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초반에는 전황이 러시아에 매우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리보니아의 주민들은 독일계 지배자들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그들에게 충성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상당수 리보니아 진지와 요새들이 사실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했다. 이대로 서쪽으로 진격해서 리보니아의 가장 중요한 항구 도시인 리가 (Riga - 리가 대주교는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지도자였다) 와 나머지 해안 도시들을 점령하면 전쟁이 금방 러시아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 전망까지 보였다. 


 그렇게 되면 1550 년대에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점령한 이래 이반 뇌제의 가장 빛나는 승리가 되었을 것이며 발트해 무역에 러시아가 보다 빠르게 참여했을 것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만약 러시아가 르네상스 시절부터 서방과 직접 무역과 교류를 하면서 그 문화를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 그랬다면 러시아의 발전이 더 빨라졌고 더 궁극적으로는 러시아가 빠른 산업화로 공산화라는 20 세기 최대의 실험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까 ? 


 사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그렇게 까지 큰 영향은 미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좌절된 것이 러시아 역사에 꼭 작은 영향이었다곤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표트르 대제가 하려고 했던 일이 150 년전에 시작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부분은 결론 같은 걸 내릴 수 없는 가정일 뿐이므로 여기서 그만 본론으로 넘어가겠다.  





(1558 년에서 1561 년 사이 리보니아 전쟁의 진행 상황. 붉은색은 러시아군 진격 방향, 녹색은 리투아니아 군 진격 상황  Map showing the campaigns in Livonia, 1558–1560. Green arrows indicate Lithuanian campaigns, red arrows Russian campaigns. Lietuvos istorijos atlasas, Vilnius: Vaga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Livonian_war_map_(1558-1560).svg  )
 

 전쟁이 시작되자 리보니아 기사단은 이대로 러시아에 정복당할 순 없다는 분위기가 퍼져 있었다. 그들도 1558 년에 아직 오지 않은 폴란드 - 리투아니아 군을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다. 현지 주민들은 그다지 독일 지배층에 충성스럽진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독일 본토에서 16 세기 당시 명성을 떨친 용병들인 란츠크네흐트 (Landsknecht / 복수는 란츠크네히테 Landsknechte) 1200 명을 고용했다. 란츠크네흐트들은 주로 장창으로 무장했으며 화려한 복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들은 스위스 용병 전술을 모방한 독일 용병들로 특히 돈만 주면 누구에게든 충성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부대였다.




(란츠크네흐트의 다양한  모습.  “Die funf Landsknechte“, Radierung von Daniel Hopfer, um 1530 ) 


 여기에 소총병 100 명등을 더해 병력을 보강한 리보니아 기사단은 반격을 시작했다. 본래 러시아 군의 침공은 1558 년 1월에 시작되었다. 북쪽으로 침공한 러시아군은 리보니아 연방의 주요 도시인 베센베르크 (Wesenberg, Rakvere) 를 점령하고 다시 더 서쪽에 있는 레발 (Reval) 까지 포위해 리보니아 북방을 정리하는 듯 싶었다. 그러나 보강된 병력을 바탕으로 반격에 나선 리보니아 군은 1558 년이 지나기 전에 베센베르크를 수복하는 것은 물론 주변 요새까지 다시 점령해 리보니아 전쟁을 조기에 마무리 지으려는 이반 뇌제의 계획을 완전히 수포로 돌렸다. 


 당시 러시아군 선발대를 이끌고 있던 것은 다소 의외일지 모르지만 카시모프 (카심) 칸 (Khan of Kasimov) 였다. 그는 타타르 군주 둘과 러시아 보야르들과 그의 병사들, 타타르 기병대, 코삭 (cossack) 등 아주 다채로운 인종과 경력을 가진 병력으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있었다.  


 사실 여기서 부터 이미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는데 러시아 군은 당시 유럽에서 수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전투기술과 무기를 계속해서 개량한 서방 군대에 뒤처져 있을 뿐 아니라 인종적으로 매우 다양했으며 서로간 언어가 통하지 않거나 설령 통하더라도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러시아 군대가 이런 식으로 편성된 이유는 타타르 정복을 후 새롭게 러시아에 충성하겠다는 타타르 족들을 대거 포함시켰기 때문이긴 했지만 이반 뇌제는 상대를 너무 얕잡아 본 셈이었다.


 결국 이 혼성 군대는 전쟁 초반에 저항이 미약한 시점에서는 큰 성과를 거두는 듯 했으나 리보니아 기사단의 조직적인 반격이 시작되자 곧 그 무능함을 드러내고 말았다. 마치 겨울 전쟁 (1940 년) 당시의 소련 군처럼 우세한 병력에도 금방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비록 다른 주요 도시인 도르파트 (Dorpat) 를 점령하는데 성공하긴 했어도 이런 내륙의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이 전쟁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1558 년이 전황은 완전히 러시아의 실패였다. 당시엔 리보니아 연방의 국론이 분열되어 있고 주민들이 독일계 지배층을 따를 의사가 없으며 폴란드 - 리투아니아를 비롯해서 주변 강대국들이 미처 개입하지 못할 아주 유리한 시점이었다. 이 때 러시아가 빠르게 전쟁을 마무리 짓지 못하므로써 앞으로 지루한 장기전으로써의 길이 열린 셈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잘 몰랐던 이반 뇌제는 1559 년 다시 병력을 보강해서 리보니아 전쟁을 그 다음해에 마무리 지으려고 결정했다. 국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반 뇌제는 반드시 승리해서 발트해 진출의 염원을 이룰 셈이었다. 다시 1559 년 1월 리보니아 연방에 재 침공한 러시아 군은 연방 측의 가장 중요한 도시인 리가 (Riga) 를 점령하려고 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그해 5월 이반 뇌제는 크림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는 타타르 족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물리는 수 밖에 없었다. 일단 6 개월 정전 조약이 발효되었고 1560 년까지 전쟁은 중단된다. 


 결국 러시아 군은 2 년 동안 누구의 지원도 받지 않은 분열된 소국 리보니아 연방을 정복하는 것 마저 실패한 셈이었다. 따라서 이 전쟁의 결과가 어찌 될지는 이미 징조가 보인다고 할 수 있었다. 한편 각자의 사정으로 리보니아 문제에 직접 개입을 꺼렸던 주변 강국이 슬슬 이 난장판에 끼어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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