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560 년 전후의 상황
단지 이반 4 세의 시절 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국가가 된 이후 러시아가 처한 안보상의 문제는 바로 국경선이 너무 길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러시아와 적대적인 세력과 아주 긴 국경선을 접하고 있었고 이 국경선 사이를 방해할 지리상의 장애물도 없는 경우가 흔했다. 예를 들어 미국 같은 경우 동부와 서부는 바다를 접하고 있고 북쪽에는 캐나다가 남쪽에는 멕시코가 있는 정도라 나라 크기가 커도 방어는 용이한 편이었다. 예외라면 캐나다가 영국 식민지이던 시절 영국과 전쟁을 벌인 정도였다.
그러나 당시 러시아는 그렇지 않았다. 북극권에 가까운 북쪽을 빼면 서쪽으로는 러시아의 만만치 않은 숙적인 폴란드 - 리투아니아가 존재했고 남쪽으로는 오스만 제국과 그 지원을 받는 크림 한국이 존재했다. 단 동쪽의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복한 점 때문에 동쪽 국경선은 다소 안전해진 편이라는게 이반 4 세 치세 중기의 상황이었다.
남서쪽의 경우 크림 반도에 있는 크림 한국의 힘은 그다지 강하진 않았으나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는다는 게 가장 큰 골치거리였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유럽을 위협할 만큼의 강대국으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고 그 위성 국가인 크림 한국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 있었다. 이런 든든한 배경 덕에 크림 한국은 러시아 영토를 침범해 재물을 약탈하고 근거지로 돌아가곤 했다. 또 흑해의 북쪽의 주요 상업 루트에 위치한 것 역시 크림 한국이 오래 버틸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1600 년 경 크림 한국의 영토 )
1559 년에 러시아가 리보니아 연방에 관심이 집중된 시점에 크림 한국의 타타르 족들은 다시 러시아 영토에서 재물을 약탈할 목적으로 기습을 감행했다. 봄철만 되면 타타르 족들의 침공이 예상되었으므로 러시아는 이 시기 쯤 되면 남쪽으로 병력을 증원하는 것이 연례 행사처럼 되어 있었다. 따라서 크림 한국을 정복하는 것 역시 러시아 안보상 중요한 이유였으나 당시 이반 뇌제는 서방으로의 창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흑해 보단 발트해로의 창을 확보하는데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러시아의 군사력이 리보니아 연방이 집중된 상황은 물론 타타르족에게는 절호의 기회 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리보니아 전장에서 러시아는 잠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곧 다시 복귀했고 1560 년대 초반에는 다른 국가들의 간섭만 없었다면 리보니아 연방을 점령할 만한 결정적인 승리도 거두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국가들의 간섭이 본격화 되었다는 점이었다.
일단 리보니아 기사단 측이 먼저 외부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 첫번째 대상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 (Ferdinand I) 로 리보니아에 관여하기에는 거리가 멀긴 했지만 아무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다. 그러나 다른 복잡한 문제가 많던 황제는 리보니아 까지 병력을 파견하기 힘들었고 사실 그럴만한 동기도 없었다.
결국 리보니아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인 케틀러 (Gotthard Kettler) 는 내키지는 않더라도 실제로 병력을 파견할 가능성이 훨씬 높은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인 지기스문트 2세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 Sigismund II Augustus I ) 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 전쟁에서 폴란드가 승리를 거두게 되면 그 다음 리보니아 자체를 점령하려고 시도할 가능성이 높았다. 외세를 끌어들이면 항상 생기는 문제가운데 하나로 케틀러 역시 그점을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별로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고트하르트 폰 케틀러 Gotthard von Kettler. 리보니아 기사단 450 년 역사의 마지막 단장이다. Gotthard Kettler, ab 1561 erster Herzog von Kurland und Semgallen. )
마침내 1559 년 첫번째 빌니우스 조약 (Treaty of Vilnius) 가 맺어지는데 이를 통해 리보니아 기사단과 폴란드 - 리투아니아는 군사적 동맹관계가 되었다. 그러나 케틀러가 우려한 리보니아 기사단의 최후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20. 리보니아 기사단의 와해
리보니아 기사단은 본래 숫적으로는 러시아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열세였다. 더구나 자국 영토인 리보니아 연방 내에서 조차 외국인 지배자 취급을 받아 지역 주민들의 충성심을 기대할 수 도 없는 형편이었다. 따라서 1560 년까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계속해서 자신들을 방어하는데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들은 러시아 군과는 달리 매우 정예한 군사 엘리트들이고 조직도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와는 달리 만약 한번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 그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완전히 와해될 수 밖에 없는 소수였다.
그 전해에 빌니우스 조약을 맺었지만 1560 년 리보니아에는 아직 폴란드 군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 이유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특수한 사정에 의한 것으로 이 느슨한 연방 국가는 국왕의 중앙 집권적인 권력이 강하지 못하고 여러 귀족들과 세임 (Sejm : 현재는 폴란드 하원을 의미함) 이라는 의회의 힘이 막강한 탓이었다.
세임의 힘은 막강해서 실질적으로 법을 통과시키고 주요 안건을 처리했다. 세임은 동시대의 유럽 신분제 의회에 비해 훨씬 막강한 권한을 누렸다. 이런 점에서 폴란드 - 리투아니아는 공화제 + 왕정 국가였는데 잘만 기능했으면 입헌 군주제를 발전시킨 성공 사례로 교과서에서도 등장했겠지만 폴란드는 대영 제국이 아니었다. 물론 좀 더 공정하게 평가하면 세임은 16 세기 당시에는 꽤 순기능을 많이 했고 폴란드는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1560 년에 세임은 빌니우스 조약을 승인하지 않았다. 세임은 리보니아 문제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러는 사이 리보니아 기사단의 운명의 시간은 다가왔다. 1560 년 8월, 그 때까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러시아 군은 에르메스 전투 (Battle of Ermes 혹은 Battle of Ergeme) 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에 치명상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이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의 기사 대부분인 330 명이 출전했다 사상자 261 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물론 기사단에는 기사 뿐 아니라 종자와 용병을 비롯한 보조 병력이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 수의 기사를 잃어버린 것은 리보니아 기사단의 간판을 내려야 할 만큼 큰 손실이었다.
단장인 케틀러는 이제 기사단의 간판을 내려야 할 때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더 꾸물거리다간 나머지 영토를 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남지 않을 판이었다. 지금와서 러시아에 투항하는 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케틀러는 다시 2 차 빌니우스 조약을 맺고 (1561 년) 지기스문트 2세에 투항했다. 그 댓가로 남은 영토에서 케틀러는 쿠를란드와 세미갈리아 공작 (Duchy of Courland and Semigallia) 가 되었다. 물론 폴란드 리투아니아 국왕의 신하가 되는 조건이었다. 이 조약에 의해 본래 이반 뇌제가 얻으려고 했던 발트해 해안가의 땅들이 줄줄이 지기스문트 2 세의 손에 넘어갔다. 뒤늦게 리보니아 연방에 투입된 리투아니아 군은 자신의 몫을 챙겼다.
(1740 년대의 쿠를란드, 세미갈리아 공작령. 그래도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 제국이 리가 만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http://en.wikipedia.org/wiki/File:Duchy_of_Courland_%26_Semigallia_1740.svg )
1561년 리보니아 연방은 해체 되었고 차르에 반기를 든 리보니아 기사단도 무너졌지만 이반 뇌제가 원했던 정 반대의 일이 발생했으므로 본래도 걸핏하면 화를 냈던 이반 뇌제의 분노는 주체를 하기 힘든 수준이었을 것이다. 리보니아 내륙의 얼마 안되는 영토를 얻기 위해 이 고생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얼마 되지 않는 리보니아 기사단을 와해시키는데 상당한 시간과 병력이 투입된 것 역시 굴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실 이반 뇌제에게는 1560 년에 이보다 더 충격적인 일이 있었다. 사랑하던 아내 아나스타샤 로마노프나가 1560 년 8월에 죽은 것이었다.
21. 아나스타샤의 죽음과 이반 뇌제
황후인 아나스타샤 (Anastasia Romanovna Zakharyina-Yurieva 1530 - 1560 년) 는 이전에도 설명했듯이 로마노프 가문을 러시아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킨 인물이다. 그녀는 이반 뇌제의 불운한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는 여러가지 부정적인 성격 - 잔인하고 냉혹하며 의심이 많고 불같이 화를 내는 점 - 을 감소시키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이반 4 세의 통치 기간은 훌륭한 이반의 통치기로 불렸으며 러시아의 다양한 계층과 보야르와의 갈등도 완화될 수 있었다.
아나스타샤는 첫째인 안나, 둘째 마리아, 셋째 드미트리를 낳았지만 당시 영아 사망률이 매우 높던 시절이라 모두 어려서 죽고 장성한 아이는 넷째인 이반 (Tsarevich Ivan Ivanovich) 과 여섯째 페도르 (Tsar Feodor I) 뿐이었다. 다섯번째 아이인 유도시아 역시 어려서 죽었다. 넷째인 이반은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결국 이반 뇌제의 손에 죽은 불운한 황태자였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르가 된 것은 페도르 였다.
기록에 의하면 1560 년 여름 이반 뇌제는 아내의 병세가 자꾸 위독해져 매우 심리적으로 고통스러워 했다고 한다. 결국 그녀가 죽고 난 후 이반 뇌제의 의심많고 잔인한 성격은 고삐 풀린 망아지 처럼 누구의 제제도 받지 않고 러시아 전역을 피로 물들이게 만들었다.
이후 이반 뇌제는 마리아 테류코브나 (Maria Temryukovna) 에서 부터 마리아 나가야 (Maria Nagaya) 에 이르는 일곱 아내를 차례로 두었는데 (즉 아나스타샤를 포함 8 명의 아내가 있었다) 4 번째 아내인 안나 콜토브스카야와 8 번째 아내인 마리아 나가야 외에는 대부분 제명에 곱게 죽지 못했다. 마치 동화속의 푸른 수염 처럼 이반 뇌제와 결혼하면 꽃다운 젊은 처녀들이 관으로 실려나가는 식이었다. 일부는 차르 손에 죽기도 했지만 상당수는 병으로 요절했는데 그럴 때는 이반 뇌제의 편집증적 의심이 발동해서 황후를 살해한 반역자를 처단한다면서 줄초상이 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여기서 간단히 이반 뇌제의 가장 흥미로운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부분에 도달했는데 왜 그가 어렸을 때 부터 죽는 순간 까지 잔인한 폭력적 성향과 끝도 없는 편집증적 의심을 보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아나스타샤는 상냥한 성격으로 이 광인 황제를 보살핀 것을 볼 때 보통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녀가 죽은 후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가 살아있을 당시에도 이반 뇌제는 종종 잔인한 성격과 끊임없는 의심을 보였으며 사실 그녀를 만나기전 어린 시절에도 남다른 잔인성을 보인 바가 있다. 왜 그랬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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