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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25일 월요일

이반 뇌제 (12)








 24. 리보니아 전쟁 - 주변국의 간섭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했듯이 리보니아 전쟁은 시작부터 러시아와 이반 뇌제의 뜻과는 반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미 카잔 정복으로 자신의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평가하게 된 이반 뇌제는 당연히 여기에 격분해서 계속해서 병력을 투입해서 끝장을 보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만만하지 못해서 주로는 리보니아의 내륙 지역에 대한 소규모 약탈과 공격만 성과를 거뒀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무의미한 손실을 치루면서도 차르의 군대는 리보니아의 주요 해안가 도시인 리가 (Riga) 나 레발 (Reval), 페르나우 (Pernua) 같은 도시를 함락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러는 와중에 어부지리를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폴란드 - 리투아니아에 신경이 집중된 러시아를 피해 리보니아에 자신의 세력을 침투시키고자 한 스웨덴의 새로운 국왕 에릭 14 세 (Eric IXV) 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에릭 14 세는 1560 년에 아버지인 구스타브 1 세 바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는데 집권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것은 물론 군사력 강화에 힘을 쏟아 발트해 최강의 해군과 더불어 그보다 인상적이진 않지만 아무튼 강화된 육군을 가지게 되었다.       



(에릭 14 세, 바사 왕조의 두번째 국왕으로 시대의 풍운아라고 할 수 있다.  Domenicus Verwilt 작 ) 


 스웨덴 역시 사실 내외적으로 다른 문제가 많아서 나중에 뛰어들었을 뿐 발트해 연안의 국가 - 특히 리보니아 연방 - 에 관심이 많았다. 이 지역은 근세 초에 가장 활발한 무역 루트로 각종 원자재와 곡물, 공산품, 군수 물자들이 활발하게 교역되던 장소였다. 또 국가 안보상 이 지역을 장악해서 발트해를 스웨덴의 호수로 만들 수 있다면 앞으로 스웨덴의 상당한 군사 방어상의 이점이 생기게 된다. 무역로를 장악해서 생기는 경제적 이점은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다만 덴마크 - 노르웨이가 이를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고 러시아와 폴란드 역시 이 지역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스웨덴이 이 지역에 진출하는 데는 상당한 애로 사항이 있었다.


 하지만 하늘이 에릭 14세를 돕는지 - 물론 이반 뇌제에게는 꽤 황당하게도 - 거의 피한 방울 흘리지 않은 스웨덴이 러시아가 막대한 손실을 보면서 공략한 북부 리보니아 지역을 가로채는 사태가 발생한다. 지금의 에스토니아에 해당하는 리보니아 연방 북부 지역과 레발 같은 주요 도시가 이반 뇌제의 통치를 받느니 차라리 스웨덴 국왕의 통치를 받기로 결정하고 에스토니아 공작령 (Duchy of Estonia  1561 - 1721 년  혹은 스웨덴령 에스토니아) 을 출범시킨 것이었다.      



(17 세기 스웨덴 제국의 발트해 동쪽 연안 지역   Based on various sources, though mainly Sveriges historia intill tjugonde seklet by Emil Hildebrand from 1906.  Thomas Blomberg   ) 


 이와 같은 사태 전개는 이반 뇌제의 분노를 더 폭발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스웨덴 역시 적지 않은 댓가를 지불하고 발트해 동부 지역의 지배를 확립하게 된다.  



 한편 덴마크 - 노르웨이 국왕인 프레데릭 2 세 ( 이 인물은 천문 관측에 지대한 관심으로 티코 브라헤에게 막대한 지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 케플러의 업적과 근대 천문학의 발전에 본의 아니게 (?) 크게 기여했다. 또 햄릿의 무대인 크론보르(kronborg)성의 건축을 지시하기도 했다) 은 이미 1559 년에 외젤-비크 주교구(Bishopric of Osel-Wiek, 위의 지도에서 왼쪽에 있는 섬) 를 3 만 탈러 (Thaler) 라는 거금을 주고 구입한 바 있다. 


 프레데릭 2 세나 에릭 14 세가 매우 편리하게 별 손실 없이 (특히 에릭 14 세는 당시 시점에서는 아주 수지 맞는 장사를 했다. 이 시점까지는 거의 로또 당첨되는 수준으로 들인 돈 거의 없이 꽤 많은 영토를 거저 얻었기 때문에) 영토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당시부터 폭군의 이미지로 불리기 시작한 이반 뇌제 덕이었다. 리보니아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반 뇌제에 지배를 받느니 그냥 이보다 나아 보이는 서방측 지배자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본래 주민들에게는 어차피 독일계 지배자가 다른 지배자로 바뀌는 정도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나빠 보이는 통치자를 피하는게 대부분의 바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차피 땅은 유한하고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게 마련이라서 이런 식의 영토 분할은 특히 덴마크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영토를 늘려나가고 군대를 강화하면 스웨덴이 덴마크 - 노르웨이가 통제하기 힘든 제국이 될 가능성 있었다. 결국 이번에는 덴마크 - 폴란드 - 뤼베크가 힘을 합쳐 스웨덴을 공격하니 북유럽 7 년 전쟁 (Northern Seven Years' War  1563 - 1570 년, 7 년전쟁과 혼동하지 말 것 ) 이 발발해 러시아의 패배로 확정되는 듯 하던 리보니아 전쟁은 다시 동부 및 북 유럽 강대국간의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게 된다.  


 북유럽 7 년 전쟁이나 다른 발트해 강대국간의 이야기는 여기서 다룰 핵심은 아니고 일단 이반 뇌제와 그의 신민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오자. 



 25. 러시아의 반격과 좌절  


 발트해 주변 국가들의 사정이 이렇게 혼전 양상으로 확전되자 이반 뇌제는 새로운 희망을 느꼈는지 1562 년 공격을 다시 재개한다. 1561 년 이반 뇌제는 잠시 공격을 멈추고 일단 폴란드 - 리투아니아와 휴전 협상을 맺기는 했지만 이것은 내부적인 정비와 더불어 리투아니아 내부의 친 러시아파를 회유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이 시기 다시 리보니아 방면 군을 강화한 차르는 1562 년 대 스웨덴 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와의 평화 협정을 더 연장하고 싶어하는 폴란드 국왕 지기스문트 2세  (지기스문트 아우구스투스  Sigismund II Augustus I ) 의 요청을 거절하고 심지어 리보니아는 물론 리투아니아 영토까지 침공했다. 


 차르의 원대한 꿈 가운데 하나는 본래 과거 키에프 루시 시절 러시아의 일부라고 여겨지기도 했던 리투아니아를 러시아에 통합하는 것이었다. 선대 모스크바 대공들의 러시아 모으기는 어느 정도 완료되었으나 가장 중요한 키에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땅이 빠져있었다. 따라서 아예 이번 기회에 리보니아는 물론 리투아니아 영토까지 얻겠다면 더 좋은 일이었다. 또 어떻게 되든 간에 이미 리보니아 전쟁 자체가 폴란드 - 리투아니아 대 러시아의 전쟁으로 확전되었으므로 반드시 공격 목표가 리보니아 영토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사실 문제는 리투아니아를 같이 침공한 것 보다도 이반 뇌제가 당시 러시아 군의 능력을 너무 과대 평가한데 있다. 





(1558 년에서 1561 년 사이 리보니아 전쟁의 진행 상황이지만 적당한 지도가 없어 이로 대체. 붉은색은 러시아군 진격 방향, 녹색은 리투아니아 군 진격 상황  Map showing the campaigns in Livonia, 1558–1560. Green arrows indicate Lithuanian campaigns, red arrows Russian campaigns. Lietuvos istorijos atlasas, Vilnius: Vaga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File:Livonian_war_map_(1558-1560).svg  ) 


 처음에 러시아 군은 공세적인 위치에서 비텝스크 (Vitebsk) 를 공격하고 폴로츠크 (Polotsk) 를 1563 년에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곧 러시아의 공세는 한계에 부딪히고 만다. 1564 년 울라 전투 (Battle of Ula 혹은 Battle of Chashniki  1월 26 일) 는 비텝스크 근방에서 일어난 전투인데 당시 다수의 러시아군이 소수의 리투아니아 군에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게 된다. 


 러시아 지휘관인 표트르 이바노비치 슈이스키 (Pyotr Ivanovich Shuysky ) 는 대략 17000 명에서 24000 명 정도의 군대를 이끌고 폴로츠크 보다 더 리투아니아 내륙에 있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 빌니우스 (Vilnius) 방향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또 다른 러시아 지휘관인 표트르 세메노비치 세레브랴니 - 오볼렌스키 (Pyotr Semenovich Serebryany-Obolensky ) 와는 이미 합류해서 적인 리투아니아 군에 비해 우세한 병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큰 걱정 없이 진격했지만 이들은 대략 4000 - 6000 명 에 불과한 리투아니군의 기습에 대패하는 굴욕을 겪었다. 


 이 전투에서 슈이스키는 전사하고  세명의 다른 보야르는 포로로 잡혔다. 세레브랴니 - 오볼렌스키는 나머지 병력을 가지고 후퇴했는데 마침 운나쁘게도 소수의 리투아니아 병력에 공격을 리투아니아 군 주력의 공격으로 오인해서 더 급하게 후퇴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변명의 여지라고는 있을 수 없는 러시아군의 치욕적인 패배였다.  


 이 비극적인 소식 와중에도 한가지 러시아 군에게 좋은 소식이라면 울라 전투이후 리투아니아 군이 아직 폴로츠크를 되찾기에는 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즉 아직 러시아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건 아니었다. 또 1563 년 부터는 북유럽 7 년 전쟁이 시작되어 다른 나라들이 두패로 나뉘어 싸우고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는 러시아에 희망이 보이는 시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러시아는 전쟁으로 인한 막대한 희생을 치른 것은 물론 남쪽 국경선이 허술해지면서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생각했던 타타르 족의 약탈적인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여기에 기근과 가뭄, 리보니아 전쟁의 여파로 인한 무역로 봉쇄등은 러시아 경제를 빈사상태로 만들었다. 이에 수많은 러시아 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야르, 그리고 류리크 왕조에 속하는 공 (Prince, Knyaz) 들까지 불만이 높아졌다. 일부 귀족들과 고위 관료는 점차 숙청의 기세를 올리고 있는 차르를 피해 적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한편 울라 전투 이후 이반 뇌제의 정신은 더 불안정해 졌는데 자신의 군대가 치욕스런 패배를 당하는 것은 신하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음모를 꾸몄기 때문이라는 믿음이 더 강해졌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차르의 의심은 1564 년 한 전설적인 인물의 배신으로 확고한 믿음으로 바뀌게 된다. 


 본래 류리크 왕조의 일원인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쿠릅스키 공 (Knyaz Andrey Mikhailovich Kurbsky Андрей Михайлович Курбский; 1528–1583) 은 카잔 정복전에서도 뛰어난 공을 세운 러시아 지휘관이었다. 또 그는 보야르들의 반란을 진압한 차르의 충실한 신하였다. 여기에 리보니아 전쟁에서는 초기에 리보니아 연방 내륙의 주요 도시인 도르파트 (Dorpat) 를 점령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차르의 의심이 자신에게까지 미쳤다고 생각하자 쿠릅스키 공은 1564 년 4월 30일 리투아니아에 투항한다. 


 쿠릅스키 공은 이반 뇌제의 측근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 이반 뇌제가 점차 과거의 공신들을 의심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일단 차르가 의심하면 실제 죄가 있든 없든 간에 그들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거짓 자백을 하고 처형당하거나 혹은 고문중에 사망했다. 따라서 차르의 의심이 자신에게 미친다고 생각하자 쿠릅스키 공은 살기 위해 과거의 적인 지기스문트 2 세에 항복했다. 그리고 그해 폴란드 리투아니아 군을 이끈 쿠릅스키 군은 러시아군에 대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쿠릅스키 공의 이러한 행동은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몰라도 이반 뇌제를 더 광기로 몰아넣는 기폭제가 되었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85818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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