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2 차 대전 시기의 크림 반도
2 차 대전 시기에도 의심할 바 없이 크림 반도의 전략적 가치는 매우 컸다. 일단 흑해함대의 본부가 있는 곳으로써 소련의 주요 전략 기지였기 때문에 독일군이 이를 점령하지 않고는 더 동쪽으로 진출하기는 위험했다. 소련을 기습 침공한 독일군은 빠른 속도로 주변 지역을 장악했고 1941 년 겨울이 오기전 크림 반도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단 한곳, 흑해 함대의 기지이자 소련이 자랑하는 요새인 세바스토폴 (Sevastopol) 을 점령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1941 년 당시의 독일군이 기세 등등하고 소련군이 공황상태였다곤 해도 세바스토폴은 워낙 요새화가 잘 되어 있어 독일군도 간단하게 점령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크림 전쟁 이후 가장 격렬한 요새 포위전이 바로 이 세바스토폴 전투이지만 여기에서 대해서 상세하게 기술하는 것은 포스트의 제목과는 대치되는 일이고 시간을 많이 할애하기 힘들어 간단하게만 서술하고 넘어가겠다.
1941 년 바바로사 작전 이후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 (Oberkommando des Heeres, OKH) 와 히틀러 총통은 한가지 가능성에 매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은 세바스토폴에 주둔하고 있는 붉은 군대의 항공기와 선박들이 루마니아에 있는 유전과 정유 시설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유전은 독일군에게 매우 중요했는데 석탄에서 만드는 합성연료를 제외하면 독일군이 사용하는 석유의 상당 부분이 여기서 나왔다.
이 와 같은 우려는 단순히 기우가 아니었던 것이 개전초에 실제 크림 반도에서 발진한 소련 폭격기가 정유 시설을 공습해 11000 톤의 연료를 손실하는 피해를 입혔던 것이다. 따라서 히틀러는 크림 반도 점령 과제를 포함한 명령 33 호를 내렸다. 히틀러는 크림 반도를 흑해의 항공 모함이라고 불렀다.
크림 반도, 특히 세바스토폴을 점령하는 임무는 독일군 최고의 명장 가운데 하나인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ch von Manstein) 에게 떨어졌다. 만슈타인은 1941 년 9 월 17 일 독일 11 군 (11. Armee) 의 지휘봉을 넘겨받아 일주일 만에 크림 반도로의 진격을 개시했다. 그해 11월 1일 수도인 심페로폴이 점령되고 11월 16 일에는 아조프 해의 관문인 케르치까지 점령해서 세바스토폴 이외의 모든 지역이 점령되었다.
하지만 마지막 세바스토폴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였다.
하지만 마지막 세바스토폴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견고한 요새였다.
(파괴된 막심 고리키 해안포 Sowjetunion, Krim, Sewastopol.- Zerstörungen in der Festung Maxim Gorki, schwere Zwillingsgeschütze. Source : Deutsches Bundesarchiv )
결국 독일군이 세바스토폴을 함락한 건 1942 년 6월 30 - 7월 4일 사이였다. 독일군 수뇌부와 장병, 그리고 히틀러까지 이 요새의 견고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소련군은 44 군, 47 군, 51 군에 소속된 21 개 사단 17 만명의 병력이 죽거나 포로로 잡히는 큰 손실을 입었지만 독일군을 반년이나 묶어 두는데 성공했다. 이 일로 세바스토폴은 나중에 영웅 도시 (Hero City : город-герой) 의 칭호를 받게 된다.
9. 크림 타타르족의 추방
하지만 역사적인 세바스토폴 공방전보다 크림 반도의 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은 아마도 크림 타타르들의 탈출과 추방이었을 것이다. 크림 타타르족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기와 대숙청 시절 엄청난 희생을 치뤘다. 이에 상당수 크림 타타르들은 독일군을 오히려 환영했을 뿐 아니라 일부는 친위대 (SS) 에서 타타르 부대에 소속되어 소련군과 싸웠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친위대 및 다른 독일군에서 복무한 크림 타타르족은 9225 명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이 패배하고 소련군이 다시 들어올 무렵 스탈린의 보복을 예상하고 먼저 몸을 피신한 이들도 있었으나 모두가 그럴 순 없었다. 과연 소련군이 다시 크림 반도를 장악하자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독일군에 협력 여부와 관계없이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인 보복이 시행되었다.
1944 년 5월 18일부터 스탈린의 명령으로 32000 명의 엔케베데 (NKVD) 병력이 총 193,865 명의 크림 타타르를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소련 내륙의 여러 곳으로 강제 수송했다. 강제 추방 과정에서 각자에게 30 분 정도만 짐을 쌀 시간을 주었고 수송은 가축을 실어나르는 열차칸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충분한 식량도 없이 황무지로 쫓겨났다는 사실이다.
그해 11월이 되기까지 1 만명 이상의 크림 타타르가 기아로 사망했다. 생존자 중 상당수는 굴락 (GULAG) 에서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충분히 못한 식량과 강제 노동, 열악한 주거환경 및 질병 등으로 인해서 약 10 만명에 달하는 크림 타타르가 1947 년까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상당수는 독일군에 협력한 일이 없는데도 그냥 크림 타타르이기 때문에 죽거나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훗날 크림 타타르 운동가들은 이를 인종 말살 정책 (genocide) 로 규정했는데 비록 크림 타타르족이 일부 살아남긴 했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은 표현이었다. 이 결과 크림 반도에는 거의 타타르족이 자취를 감추고 러시아인이 처음으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인종이 되었다. 오늘날 크림 반도에 사는 타타르족은 스탈린 사후나 구소련 붕괴 이후 다시 돌아온 이들이다.
(1939 년 인구 조사 때 크림 타타르의 분포 Percentage of Crimean Tatars by region in Crimea accroding to 1939 census. http://en.wikipedia.org/wiki/File:Crimean_Tatar_1939-num.png )
(2001 년 인구 조사 때 크림 타타르의 분포 Crimean Tatars in Crimea per cent according to Ukrainian Census 2001. http://en.wikipedia.org/wiki/File:Crimean_Tatar_2001-num.svg )
과거 스탈린 통치 시절 여러가지 목적에서 소수 인종 말살 정책 (그런데 사실 스탈린도 소수인종이랄 수 있는 조지아 (그루지아) 출신이다. 따라서 초기엔 사실 소수 민족 문제 전문가를 자처하기도 했던 스탈린이었다. 보통 이 전문가가 내놓은 소수 민족 문제 해결법은 모두 말살하든지 아니면 강제로 이주시켜 반란의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었다) 이 행해졌는데 크림 타타르족 역시 그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크림 타타르의 조상들이 노예 무역에 종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 후손들이 이런 억압과 인종 청소를 받아도 정당하다는 이야기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스탈린의 조치는 과거사 보다는 독일군에 협력한 댓가 였으나 (스탈린 시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독일군에 협력하지 않은 이들까지 마구잡이로 숙청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 점은 스탈린의 대규모 인종 이주 정책 및 숙청 정책의 결과이다. 본래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 소수 민족들이 살던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대거 이주해 새로운 도시들을 건설했다. 앞서 이야기한 신 러시아도 그 사례 중 하나이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인과 현지인들이 갈등의 소지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스탈린 시절 이후에는 본래 있던 민족이 대거 이주 당하거나 숙청당해 숫자가 줄어들고 그 자리에 러시아인 처럼 다른 인종이 가장 우세를 점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이것이 나중에 구소련 붕괴이후 다양한 민족문제를 만들게 된다. 물론 크림 반도는 그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10. 현대의 크림 반도
2 차 대전이 끝나고 난 후 크림 반도는 러시아인이 가장 우세한 인구 집단이 되었으며 크림 타타르는 수년 만에 거의 자취를 감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두번째로 우세한 인구 집단은 우크라이나 인이었다. 1944 년의 대대적인 이주 정책으로 이 크림 반도에 있었던 크림 자치공은 사실상 붕괴되고 이 지역은 이제 크림 주 (Crimean Oblast) 라고 불리게 된다. 1945 년 설립된 크림주는 사실 소비에트 내에서 러시아 연방의 일부였으나 1954 년 역사적인 크림주의 우크라이나 이양이 벌어진다.
사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크림 반도와는 가장 연관성이 적었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가 독립적인 국가를 설립했을 때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인 크림 반도를 노렸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소비에트 최고회의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이양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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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 년에 행해진 이 조치는 사실 페레야슬라브 조약 (Treaty of Pereyaslav) 300 주년을 기념하는 퍼포먼스를 겸하고 있었다. 이 조약으로 인해 우크라이나 땅 가운데 드네프르강 좌안이라고 불리는 땅이 러시아 땅이 되었다. 이 조약을 체결한 주체는 코사크 라다 (Cossack Rada) 로 이들은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초기에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으나 러시아 제국이 팽창하면서 그와 같은 권리는 사라졌으며 스탈린 시절에는 집단 농장화와 더불어 대대적인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아무튼 이 조약은 우크라이나가 과거에는 폴란드의 일부이다가 결국 러시아의 일부가 된 역사적인 사건이므로 전 소비에트의 화합을 상징하는 사건처럼 기념되었다. 물론 실제로는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가 우크라이나 독립 정부를 전복하는 과정과 이후 대숙청, 홀로모도르 과정에서 엄청난 우크라이나 인이 희생되므로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는 가릴 수 없을 만큼 큰 앙금과 상처가 남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화합의 퍼포먼스는 더 필요한 법이었다.
(영원히 함께. 페레야슬라브 조약 300 주년 기념 포스터로 1954 년 크림 반도 이양시에 나왔던 포스터이다.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의 민속 복장을 한 사내들이 다정하게 방패를 들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스탈린 통치 시절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인 사이에는 지울 수 없는 앙금이 남게 되었다. Eternally Together a Soviet poster made for the 300th anniversary of the Pereyaslav Rada. Public domain image )
이 이양 조치는 소비에트 최고 회의에서 의결된 것이지만 그 중심에는 당시 공산당 서기장인 니키타 흐루시초프 (Nikita Sergeyevich Khrushchev) 가 있었다. 흐루시초프는 1938 년 우크라이나 공산당의 수장이 되어 이 지역을 지배했는데 처음 한 조치는 반역자들을 찾아내 숙청하는 것이었다. 이미 전임자들이 무수한 반역자와 스파이들을 처단했으나 그것이 흐루시초프 숙청의지를 꺽을 수는 없었다. 결국 우크라이나 고위 정치인과 군대 지휘자 대부분이 교체되고 상당수는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1944 년 우크라이나로 돌아온 흐루시쵸프는 우크리이나 재건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숙청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아 1945 년에서 1952 년사이 60 만명이 체포되고 그 중 1/3 은 처형되었다. 그러나 그는 거의 황폐화된 우크라이나의 농업 부분을 재건한 공로로 스탈린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외부에는 잘 알져지지 않은 사실도 숨어 있었다.
2 차 대전 직후 황폐화된 동구권 국가들 (폴란드, 동독,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 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들은 소련으로 부터 적지 않은 원조를 받았다. 그런데 소련도 분명 식량이 부족했을 텐데 이 식량이 어디서 나왔을까 ? 결론 부터 말하면 집단 농장에서 강제로 징발을 해간 것이었는데 우크라이나 역시 예외는 될 수 없었다. 2 차 대전 직후 우크라이나는 다시 기근에 시달렸다. 수년이 지난 후에야 우크라이나는 평온을 되찾았다.
이런 과거사를 생각할 때 흐루시쵸프 (그는 스탈린과는 달리 러시아인이다) 가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귀속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쉽게 이해를 하기 어려운 조치였다. 당시 우크라이나 인의 주된 불만은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1/2 차 대전 당시 나타난 사실 가운데 하나는 우크라이나가 소비에트에서 독립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물론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그 대신이라고 하기엔 크림 반도 이양은 좀 엉뚱한 조치였다. 왜냐하면 당시 소비에트의 '독립' 공화국인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도 스탈린이 임명한 사람이 와서 폭압적 정치를 행했기 때문이다. 크림 반도가 어느 공화국에 속하는지는 소련이 건재할 당시에는 아무 차이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소련이 붕괴하자 이는 큰 문제가 된다. 크림반도와 흑해 함대의 귀속권을 놓고 러시아 - 우크라이나가 첨예하게 갈등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우크라이나는 이 지역에 다시 크림 자치 공화국 (Autonomous Republc of Crimea) 을 인정하게 되고 세바스토폴은 러시아에 귀속시키는 임시 방편을 취하게 된다.
(크림 자치 공화국의 영토 Map of the Autonomous Republic of Crimea and of Sevastopol, Ukraine. http://en.wikipedia.org/wiki/File:Crimea_republic_map.png )
하지만 이 시기에는 이미 러시아인이 크림 반도 인구의 60% 를 차지하는 반면 우크라이나인은 1/4 에 불과하다는 새로운 문제가 부각될 수 밖에 없었다. (2001 년 인구 조사에서 러시아계는 58%, 우크라이나계는 24%, 타타르계는 12%, 기타 6%) 러시아가 다시 힘을 회복하고 주변에 있는 구소련의 여러 독립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이는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고 2014 년 마침내 우크라이나 혁명의 혼란을 틈타 크림 반도의 다수를 점한 러시아계가 주도해서 크림 공화국을 우크라이나에서 분리하고 러시아와의 통합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합병 서명에 서명하는 러시아 및 크림 자치공 수뇌부. 왼쪽에서 부터 Sergey Aksyonov, Vladimir Konstantinov, Vladimir Putin, and Aleksei Chalyi Source : Kremlin.ru)
향후 역사가 어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팽창 주의와 주변 소수 민족의 민족주의는 수백년간 갈등의 대상이 되어왔다. 크림 반도는 전략적인 가치 때문와 복잡한 인종 구성으로 인해 주인이 매우 자주 바뀌는 지역이기도 한데 2014 년에도 이와 같은 일이 다시 발생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날 것인가이다. 남오세아티아와 압하지아, 트란스니스트리아에서 볼 수 있듯이 과거 러시아 제국과 스탈린의 유산으로 여기저기 러시아계가 다수를 점하는 지역들이 산재해 있으며 이들은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에게는 개입의 명분이 된다. 또 주변 국가에서의 인종 분쟁에 러시아가 끼어들 수 도 있다. 반면 국가 경제의 상당부분을 천연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미래는 알기 어려운 것이지만 과거에서 유추해 본다면 상대의 의중을 잘 못 판단해 의도치 않게 큰 전쟁이나 분쟁으로 비화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러시아 및 서방 정치 지도자들의 신중한 판단을 기대할 뿐이다.
(여기까지인데 지금까지 읽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글쓴이는 역사 쪽으로는 전혀 전공한 바가 없기 때문에 다소 확실치 않거나 오류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은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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