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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17일 월요일

간략히 보는 크림 반도의 역사 (4)


 5. 크림 전쟁
크림 전쟁은 러시아에서는 동방전쟁 (Eastern War : Восточная война)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실 전쟁 자체가 흑해와 카프카스 지방, 아나톨리아 지방, 발트해, 백해 등에서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크림 전쟁은 다소 정확하지 않은 명칭일 수도 있으나 가장 중요한 육상 전투가 벌어진 지역이 크림 반도 특히 세바스토폴 요새라는 점을 생각하면 적당한 명칭이다. 
 기본적으로 크림 전쟁은 러시아 남진 정책과 이에 반대하는 열강들의 전쟁이었으나 처음 시작은 매우 엉뚱하게도 흑해에서 한참 떨어진 예루살렘이었다. 1851 년 프랑스 제국의 황제인 나폴레옹 3 세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영토인 팔레스타인에서 카톨릭 교도의 특권을 인정하게 하는 내용의 조약을 오스만 제국과 맺는다. 
 이와 같은 조약 내용은 즉시 동방 정교회의 수호자임을 자처했던 차르 니콜라이 1 세 (Nicholas I (Николай I Павлович) 재위 1825 - 1855) 를 자극하게 된다. 니콜라이 1 세는 오스만 제국이 제국 영내의 동방 정교회의 특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이 오스만 제국내 1200 만 동방 정교도들의 보호자임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전자는 그렇다쳐도 후자는 사실상 내정 간섭이나 다를바 없었으므로 오스만 제국은 이를 거절했는데 프랑스, 영국의 지지를 뒤에 업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의 경찰을 자처하면서 유럽의 힘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남진 정책이라는 영토적 야망 역시 숨기지 않았다. 따라서 니콜라이 1 세는 오스만 투르크를 합병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단독으로 추진하기에는 유럽 열강들의 반대가 문제였으므로 영국을 상대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폴란드 처럼 분할하는 협상을 했던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입장은 반대였다. 오스만 투르크 분할은 결국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허용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러시아가 더 남쪽에 있는 영국 세력권까지 넘보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방해하고 전세계에 걸친 대영 제국의 식민지들와 그 세력권을 보호하는 것은 19 세기 영국의 외교/식민 정책의 기본 방향이기도 했다. 따라서 영국은 러시아의 분할 제의에 대해서 오스만 제국이 급속도로 붕괴하는 만약의 경우만을 가정하고 이런 사태가 생기면 추후 상의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이런 느슨한 합의가 러시아의 입맛에 맞을리는 없었다. 결국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1853 년 러시아는 동방 정교도의 보호를 명분으로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왈라키아 (Wallachia) 및 몰다비아 (Moldavia) 에 군대를 파견한다. 크림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한가지 재미있는 점이라면 그 때와 현재의 유사점이다. 당시 오스만 제국 영토내의 동방 정교도들이 큰 위기 상황이었냐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점은 2014 년 크림 반도내의 러시아 인들이 위기에 처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일단 영토 확장에 대한 야심이 앞서다 보니 이런 점은 부차적인 문제였을 뿐이다. 
 니콜라이 1 세가 오판한 부분이 있다면 아마도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을 도와주기 위해서 참전은 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모두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자신들의 이권을 침해받지 않기를 원했으며 전쟁  자체에 대해서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에 1854 년 이 전쟁에 끼어들면서 크림 전쟁은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와 이를 저지하려는 열강들의 전쟁으로 비화하게 된다. (참고로 샤를데냐 왕국도 이 전쟁에 연합군 측으로 끼어들었다)

(크림 전쟁의 개요. Koryakov Yuri at wikipedia )
 초반에는 전세가 러시아측에 유리한 듯 싶었다. 1853 년 7월 다뉴브 강 유역의 영토를 유린당하고도 오스만 제국은 선전포고조차 하지 못했다. 잘하면 이대로 러시아가 영토만 합병하고 전쟁이 끝날 수 있을 것 처럼 보였지만 이면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약속받은 오스만 제국은 그해 10월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아직 영국, 프랑스가 본격 참전하기 이전이라 육지와 바다 모두에서 러시아의 우세가 지속되었다. 니콜라이 1 세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철군하라는 영국, 프랑스의 최후 통첩을 무시했다.  
 1853 년 11월 30일에는 지금의 터키 북쪽에 있는 해안 도시인 시놉에서 시놉 전투 (Battle of Sinop) 가 벌어져 러시아가 크게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러시아 해군은 오스만 해군에 괴멸적인 피해를 안기면서도 경미한 피해만을 입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흑해의 제해권이 가져오면서 이대로 러시아의 승리가 굳어지는 듯 했다.


​(러시아에서 나온 시놉 전투 승리 150 주년 기념 우표. "Синопский бой. 18 ноября 1853 года" (1860 г)  Andrei Sdobnikov at wikipedia  )
 그러나 이 전투 이후 서방에서는 반 러시아 정서가 강해지고 영국과 프랑스가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기에 이르러 결국 본격적인 참전의 계기로 발전하게 된다. 즉 전투 자체는 이겼는데 전쟁에서는 지게 되어 있는 수순을 밝기 시작한 것이다. 1854 년 흑해로 영국, 프랑스 함대가 진입하자 러시아 흑해 함대는 곧 이들의 적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사실 영국, 프랑스 연합군은 백해, 발트해, 흑해, 카프카스 지방등 모든 지역에서 러시아 제국을 압박했다. 그런데 러시아가 점령하려 했던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는 1854 년 갑작스럽게 어부지리를 얻고자 했던 오스트리아 제국이 막대한 병력을 동원해 압박해 들어왔으므로 다뉴브 전선에서는 전쟁이 갑자기 소강상태에 이르게 된다. 
 러시아 제국은 은근히 이 지역에 있던 동방 정교도들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반란을 일으켜 주기 희망했지만 이들은 여기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들 입장에서는 독립을 하는 게 아니라면 오스만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이나 모두 외세일 뿐이었다. 니콜라이 1 세는 이들의 보호자임을 자청했지만 사실 이들은 러시아의 보호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영국 프랑스에 이어 오스트리아 제국과 전쟁이 부담스러웠던 니콜라이 1 세는 정작 1854 년에 7월 26일 러시아 군을 모두 철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렇게 되자 '동방 정교도 보호' 라는 전쟁 명분 조차 애매해진 상황이었다.

 한편 북해나 백해는 오스만 제국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고 카프카스 산맥은 산세가 매우 험해서 전쟁을 벌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여기에 러시아군이 왈라키아와 몰다비아에서 철군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전쟁의 중심은 흑해가 되었다. 그리고 1854 년 가을이 되기도 전에 러시아 해군은 최신식 군함으로 무장한 영국 해군에게 난타 당해 대부분 흑해 바다로 가라앉았다. 러시아군의 전근대성과 낙후됨은 당시 러시아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영국, 프랑스의 궁극적인 목적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려는 것이므로 처음 요구했던 왈라키아, 몰다비아의 철군 만으로는 전쟁이 종료되지 않았다. 연합군은 러시아의 남진 의지를 완전히 좌절시키기 위해 러시아의 가장 중요한 남진 거점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을 결전의 장소로 잡았다. 여기에 있는 세바스토폴 요새가 함락되면 러시아 흑해 함대는 기지를 잃게 되고 러시아의 흑해 연안 군사력은 크게 약화될 것이었다.
 이런 판단하에 영국, 프랑스, 오스만 연합군은 엄청난 인명이 희생될 예정인 크림반도에 1854 년 9월 발을 내딛게 된다. 1854 년 10월까지 6만 7000 명의 병력이 크림반도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적의 요새화된 기지인 세바스토폴을 피해 약  56 km 떨어진 유파토리아 (Eupatoria) 에서 상륙한 후 세바스토폴까지 승리의 행진을 하려 했지만 그 56 km 를 돌파하는데 1 년의 시간과 연합군과 러시아군 모두에서 10 만명이 넘는 엄청난 인명의 희생이 동반되었다. 양측이 이 손실을 메꾸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계속 추가 병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1855 년 7월에는 연합군 병력만 17만 5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세바스토폴 요새 포위전  Valentin Ramirez at wikipedia ) ​
 자세한 내용은 글의 주제와 약간 대치되므로 생략하지만 아무튼 이렇게 막대한 희생자가 나온 이유는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라 부상과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군 기록에 의하면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이 10240 명, 부상으로 사망한 사람이 2 만명,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7만 5000 명이었으며 영국군은 그나마 이보다 적은 희생을 치뤘으나 질병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은 점은 동일했다. (참고로 이 크림 전쟁이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전쟁이기도 하다)
 이런 엄청난 희생을 치루면서 1855 년 9월 세바스토폴이 함락되자 러시아의 패색은 짙어졌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니콜라이 1 세는 그해 3 월 숨을 거두고 알렉산드르 2세가 재위를 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 결과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 불리해진 전황을 보고 그 결과를 미리 알수 있었을 것이다.
 러시아 군의 소총과 대포는 모두 서방측에 비해서 성능이 열세였으며 러시아의 나쁜 도로 사정과 교통으로 인해 보급도 제때 이뤄지지 않아 대개 농노 출신인 병사들은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 악전고투할 수 밖에 없었다. 비록 그들 가운데는 영웅적인 전투를 보여준 이들도 있었지만 러시아의 전근대성과 낙후성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1856 년 굴욕적인 파리 조약 (Treaty of Paris) 이 맺어졌다. 여기서 러시아는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다시 오스만 제국에게 돌려주는데 합의 (라고 하지만 사실 이 지역에서 오스만의 지배는 약화되고 이들은 독립적인 지역이 된다)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흑해에 군함을 파견할 수 없게 되었다. 즉 흑해에서 완전히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가 그렇게 희망하던 부동항은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버렸다. 
 이 전쟁을 통해서 러시아는 50 만의 병력을 손실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잘 훈련되지 않은 농노 출신으로써 열악한 보급과 무기로, 그리고 질병으로 인해 희생되었다. 물론 서방의 제재와 전쟁 수행으로 인해서 러시아 경제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유럽의 경찰을 자처하던 러시아의 외교적 지위 역시 추락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결과는 가장 보수적인 러시아인 조차 러시아의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이와는 별개로 크림 반도의 역사는 20 세기 초반까지 특기할 내용이 많지 않다. 다음 이야기는 20 세기 크림 반도의 역사다.          ​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207639191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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