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이반 뇌제 (6)






 12. 스트렐치


 앞서 이야기 했듯이 어린 이반 4세가 차르로 즉위하기 전까지의 혼란 상황은 카잔 한국과 기타 타타르 한국들에게 러시아를 약탈할 절호의 찬스로 생각되었다. 1540 년 12월에는 거의 모스크바 공국까지 진격하는데 성공하는 등 카잔 한국은 이제 러시아로써는 반드시 정복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대로 발전했다. 


 본격적으로 차르로 즉위하기도 전이었던 1545 년 이반 뇌제는 볼가강으로 진출하여 카잔 한국을 압박하고 카잔 내의 러시아파를 지원했다. 그러나 1547-48 년 사이 그리고 1549 년에서 1550 년 사이 카잔과의 전쟁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카잔 한국 역시 근 100 년에 걸친 러시아와의 항쟁 끝에 자신들에게 가장 위험한 상대는 러시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에 대응하기 위해 수도인 카잔 주변에 성벽을 강화하고 주변 지역을 요새화 시켰다. 또 다른 타타르 한국인 아스트라한 한국과 크림 한국과의 공동 전선을 펼쳐 러시아 남쪽과 동쪽 국경에서 공동 방위 체제를 만들었다. 오랜 세월 대 러시아 전쟁에서 살아남은 카잔 한국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런 사실은 물론 이반 뇌제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잔 한국을 정복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의 영토 팽창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 동남쪽의 러시아 국경의 안전 역시 담보할 수 없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러시아와 카잔 한국 중 하나는 반드시 없어져야 할 상황이었다. 


 이반 뇌제는 카잔 한국 및 주변국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새로운 군사 조직을 편성했다. 앞서 이야기 했던 스트렐치 (Streltsy   Стрельцы́ ) 가 그것이다. 이 단어는 사수라는 의미로 머스킷병 (Musketeer) 로 변역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머스킷을 무기로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당시 16 세기 총기의 한계로 근접 무장을 항상 휴대하는 근접 보병 + 소총병이었다. 이들은 일종의 상비군 같은 개념으로 차르의 근위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17 세기 경 스트렐치의 삽화   Source :   Одежды Русского государства  )


 처음 창설되었을 당시 스트렐치는 주로 자유민 가운데 모집했고 지휘는 귀족들이 담당했다. 각 부대는 500 명이었고 최초에는 3000 명 정도로 시작해서 16 세기 말에는 20000 - 25000 명, 1682 년 경에는 55000 명까지 병력이 불어나 있었다. 스트렐치들은 처음에는 급료를 받는 직업 군인이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돈이 모자랐기 때문에 토지등을 대신 받는 경우도 있었다. 이에 따라 스트렐치 자체가 세습화 하여 토지처럼 아들에게 물려주는 식으로 계급화했다. 이들은 세금을 면제 받는 등의 특권도 있었다. 


 스트렐치는 크게 복무 지역에 따라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었는데 첫번째는 수도 방위군 개념으로 모스크바의 크렘린 방어와 차르의 경비를 담당하는 vyborniye (выборные) 가 있었고 다른 지방 도시에 배치되는  gorodskiye (городские) 스트렐치가 있었다. 


 스트렐치는 종종 경찰의 임무도 겸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소방 임무도 맡았다. 이들은 이를 위해 건물을 부수거나 목재를 베기 위한 도끼를 비롯한 장비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몇몇 서방측 기록자에 의하면 화재 진압을 위해 물을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당시의 소방 업무란 불이 번지지 않은 나무나 건물을 베거나 파괴시키는 일이었다. 러시아가 목재 건물이 많고 땅이 넓어 물을 실어나르기 힘든 점을 생각하면 납득이 되는 이야기였다. 


 초기 스트렐치의 개념은 엘리트 정예 병사의 의미였다. 따라서 그 병력 자체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복무 기간이 사실상 거의 평생이었고 선택의 여지 없이 선발되는데다 병력이 많아지면서 시간이 갈수록 나타해지고 훈련의 질도 떨어졌다. 따라서 표트르 대제의 시기에 이르게 되면 폐지해야할 구습으로 생각되기에 이르지만 아무튼 이반 뇌제의 시기에는 정예 소총병 부대였다.


 스트렐치는 부대별로 동일한 색깔의 유니폼을 착용했는데 붉은색, 푸른색, 녹색 코트를 입었고 부츠는 노란색을 신었다. 그리고 머스킷 (musket) 이나 아쿼버스 (arquebus) - 둘다 근세에 주로 사용된 전장식 총기로 머스킷이 더 무겁고 총신이 길며 사정거리가 길다. 아쿼버스가 더 초창기 총기이며 17 세기 이후는 머스킷이 소총의 주력이 됨 - 같은 총기를 주 무기로 사용했다. 다만 이반 뇌제가 스트렐치를 창설하던 1545 년에서 1550 년 사이에는 주로는 아쿼버스가 사용되었을 것이다. 


 근접전 무기로 들고 다는 것은 소총 (머스킷이든 아쿼버스든), 같은 색 유니폼, 수염과 같이 스트렐치의 상징으로 생각되는 도끼인 바디쉬 ( bardiche) 였다. 이 도끼는 특히 아주 긴 초승달 모양의 도끼날이 특징이었다. 도끼의 자루부분은 1.5 미터, 날 부분은 60 cm 에 달했다. 이 바디쉬는 땅에 고정 시킨 다음 소총 거치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스트렐치의 기본 전술은 원거리에서는 소총을 쏘다가 적이 근접하면 바디쉬를 휘두르며 돌격해서 근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 바디쉬의 길이가 그렇게 길지는 못해서 보병이 아닌 기병을 상대할 때는 효과적인 무기라고 할 수는 없었다. 다만 스트렐치라고 해서 다 보병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병대도 있었다. 



(바디쉬의 실물.  Bardiches in History Museum in Suzdal.  ) 



(노란색 부츠, 색깔 있는 코트, 수염, 소총 (머스킷 or 아쿼버스), 그리고 바디쉬가 스트렐치의 상징이었다.   public domain image) 



 스트렐치는 동시대에 유럽에서 보는 보병들과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들만의 매우 독특한 전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나중에 설명할 카잔 포위전에서 처음 선보인 전술이 바로 이동하는 요새라는 의미의 굴라이 고로트 (Gulyay-gorod) 였다. 이들은 바퀴나 혹은 썰매가 달린 나무판으로 당시의 원시적인 총기나 타타르 족이 주로 사용하는 화살을 막을 수 있었다. 이 나무판에는 구멍이 있어 스트렐치들은 여기를 통해 총을 발사했다. 이 독특한 무기는 특히 카잔 포위전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굴라이 고로트의 복원. 측면에서 굴리는 것도 있었고 정면에서 굴릴 수도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각형의 움직이는 나무 참호를 만들 수도 있었다.  public domain image 


 스트렐치가 처음 그 명성을 알리기 된 계기는 1552 년의 카잔 포위전이었다. 



 13. 카잔 포위전 (Siege of Kazan)


 1545 년에서 1550 년의 공세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던 이반 뇌제는 다시 절치 부심 카잔 한국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철저한 준비를 했다. 1550 년대 초반이 되자 러시아의 전 병력과 러시아의 속국 상태였던 카심 한국 (Qasim Khanate ) 의 병력을 집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런 움직임은 이미 카잔 한국에도 알려졌으므로 카잔 한국 역시 각지의 요새를 정비함과 동시에 다른 동맹 한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특히 카잔의 성벽은 매우 견고하게 요새화되었다. 


 이반 뇌제는 카잔을 함락시키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전의 실패에서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후에 이반고로드 (Ivangorod) 로 알려진 스비야즈스크 (Sviyazhsk) 요새를 카심에서 수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볼가 강변에 건설하고 이를 전진기지로 삼아 장기전에 대비했다. 이 요새는 1551 년 완성되었다. 


 그 다음해 마침내 러시아의 대병력이 카잔을 향해 출발했다. 병력은 기록에 의하면 15 만 이상의 대병력이었다. 이 전투에서 소문의 스트렐치가 처음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구력으로 1552 년 8월 22일 러시아군은 카잔의 성벽에 나타나기 시작해서 29 일에는 포위를 마치고 카잔의 성벽을 향해 대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러시아군의 대포는 모두 150 문에 달했다. 



(카잔 포위전에서 러시아 군 (붉은색) 의 배치와 타타르 군의 배치 (푸른색) Source   http://www.xenophon-mil.org/ruscity/volga/kazan/kazan1l.htm )


 그러나 카잔의 성벽은 매우 견고했다. 그 동안 심혈을 기울여 요새화한 보람을 지금 찾으려는 듯 거듭된 공격에도 성벽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스트렐치의 움직이는 요새 역시 당장에 성벽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전황은 러시아와 이반 뇌제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552 년 8월 30일 에서 9월 6일 사이 알렉산드르 고르바티 슈이스키 (Prince Alexander Borisovich Gorbatyi-Shuisky (Александр Борисович Горбатый-Шуйский) ) 공이 이끄는 부대가 포위를 풀려는 타타르 기병대를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위 지도에서 오른쪽의 파란색) 또 안드레이 쿠릅스키 (Andrey Mikhailovich Kurbsky Андрей Михайлович Курбский ) 공 역시 크림 한국에서 온 원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므로써 (지도에서 왼쪽) 포위를 풀고자 하는 카잔 한국의 초기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전황은 러시아측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여기에 러시아측은 식수를 끊기 위해 지하수를 차단하는 작전까지 실행에 옮겼다. 


 하지만 공성전에 가장 큰 도움 되었던 것은 서방으로 부터 들여온 신기술들이였다. 여기에는 신형 대포와 더불어 대형 공성 타워도 포함되었다. 그럼에도 카잔의 성벽은 거의 6 주를 버텨냈다. 그러나 마침내 10월 2일에 이르러 공병대가 화약으로 성벽의 일부를 파괴시는데 성공하자 (이를 지휘한 것은 서방에서 들어온 영국 기술자 Rozmysl 였다고 알려져 있다) 카잔의 운명도 최후를 맞이했다. 러시아의 대병력에 대한 영웅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 카잔 한국은 멸망했다. 



    
(카잔 성벽에서의 이반 뇌제   public domain image) 


 그러나 사실 카잔 한국을 완전히 점령하는데 추가적으로 5 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무튼 러시아 동쪽 국경의 큰 두통거리였던 카잔 한국은 정복되었고 러시아의 동쪽 문이 활짝 열리면서 이후 시베리아 진출의 기반은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카잔 정복은 좋은 이반의 통치 시절 가장 큰 치적으로 손꼽힐 만한 사건이었다. 이를 통해 러시아 동부 국민들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볼가강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게 되어 러시아의 발전과 팽창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러시아가 볼가강 중류를 장악한 카잔 한국을 점령한 이후 다음 희생양이 된 것은 볼가강 하류의 아스트라한 한국이었다. 1554 년 아스트라한 한국에 자신이 내세운 이를 칸으로 임명한 이반뇌제는 1556 년에 이들이 크림 한국과 연합하려 하자 아예 아스트라한 한국을 러시아에 합병했다. 이로써 볼가강 대부분 지역이 러시아의 손에 들어왔다.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인 크림 한국은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생각보다 오래 버티긴 했지만 아무튼 더 이상 러시아의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었다. 


 비록 크림 한국이 1554 년, 1557 년, 1558 년에 러시아를 침공하지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고  오히려 크림 한국이 더 위험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으나 크림 한국의 뒤에는 오스만 제국이 있었으므로 크림 한국은 아무튼 18 세기 까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만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크림 한국은 이반 4 세의 치세 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러시아의 큰 두통거리가 되었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78703924


(참고 : 역사 관련 포스트만 모아서 보는 방법은 아래 고든의 역사 이야기를 클릭하면 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생대에 박쥐가 등장하면서 플로팔랑곱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enage-girl-years-reconstruct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