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이반 뇌제 (5)






 10. 차르 러시아 (Tsardom of Russia) 의 영토 팽창 


 이반 4 세 (이반 뇌제) 가 차르로 즉위한 1547 년부터 표트르 대제가 러시아 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라는 칭호를 쓰는 1721 년 사이는 차르 러시아 (Tsardom of Russia, / Tsardom of Rus  Русское царство ) 라고 불리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는 모스크바 공국이 러시아로 변모하는 시기로 차르의 권력이 강화되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의 영토가 마침내 우랄 산맥을 넘어서기 시작했다. 1550 년 에서 1700 년 사이 러시아는 매년 평균 3 만 5000 제곱 킬로미터 만큼 영토가 증가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보다 약간 작은 영토가 매년 추가되었다는 의미이고 3 년에 남한 만한 면적의 영토가 증가했다는 의미였다. 


 이와 같은 러시아 영토의 증가는 사실 상당 부분 전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다양한 인종을 포함하는 제국으로 태어났는데 물론 역사적으로는 엄청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달성한 영토라고 할 수 있다. 이반 뇌제는 조부인 이반 3 세와 부친인 바실리 3 세의 키에프 러시아 재건 계획. 즉 러시아 모으기가 거의 끝나는 시점에 모스크바 공국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이반 뇌제가 친정을 시작한 시점부터 시작되는 차르 러시아 시기는 결국 과거 키에프 러시아의 영토 - 단 키에프 러시아는 단일화된 지배 체계를 갖춘 국가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 넘어서 우리가 러시아라고 생각하는 영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11세기 키에프 루시의 영역. 클릭하면 원본    Source :  http://en.wikipedia.org/wiki/File:Kievan_Rus_en.jpg  ) 


(러시아의 팽창. Territory of the Tsardom of Russia in
  •    AD 1500
  •    AD 1600 
  •    AD 1700
Sources:
Atlas historyczny dla szkoł średnich, wyd. PPWK/Nowa Era, ISBN 83-7409-138-X
"The World 1500-1600" and "The World 1600-1700" in: Atlas of World History (2007). ) 



 이반 4 세, 즉 이반 뇌제에게는 아마도 큰 야심이 존재했을 것이다. 이미 그의 조부 이반 3 세는 비잔티움 제국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차르라는 명칭과 쌍두 독수리 문양을 가져왔다. 이반 뇌제 때에 이르면 차르는 러시아의 통치자의 공식 칭호가 되었을 뿐 아니라 쌍두 독수리는 러시아 제국 시절을 거쳐 현재에도 사용되는 러시아의 문장이 되었다. 이는 러시아가 과거 로마 제국이나 전성기의 비잔티움 제국 같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제국이 되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부에서는 이를 제 3 로마 (Third Rome) 이라고 칭하기도 했는데 최초의 로마 제국과 2 번째  로마 제국인 중세 비잔티움 및 서방 (신성 로마 제국) 제국에 이은 세번째 로마 제국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토만 제국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러시아는 특히 혈통적으로 (앞서 설명했듯이  
비잔티움 제국의 공주인 소피아와 이반 3세가 결혼 했다) 그리고 문화/종교적으로 이와 같은 주장을 해왔다. 따라서 러시아인들은 이에 대해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으로 부터 건너온 쌍두 독수리를 얹은 러시아 제국의 문양. 사실 쌍두 독수리 자체는 누구의 문장이라고 부르기도 힘들 만큼 여러 왕국과 제국, 그리고 현대 국가들에서 사용되고 있다.   Public domain image ) 


 하지만 이반 뇌제가 즉위했을 당시의 러시아는 외부에 그렇게 잘 알려진 제국은 아니었으며 문화와 과학 수준도 당시 르네상스를 거치며 빠른 발전을 거듭하는 서방에 비해 뒤쳐져 있었다. 또 팽창을 거듭한 러시아의 국경선이 매우 길어지면서 러시아는 침공이 쉬운 나라가 되가고 있었다. 여러 나라, 여러 민족과 국경선을 마주하고 있다 보니 이를 동시에 다 방어하기 쉽지가 않았으며 침공하는 입장에서는 공격하기는 쉬울 수 밖에 없었다. 타타르 족이 침공할 때 항상 이반 뇌제는 내부 치안 및 동방의 대국 (폴란드 왕국 - 리투아니아 공국) 을 경계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전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다. 


 16 세기의 러시아의 영토 팽창을 이야기 하려면 러시아가 동서로 마주하는 주변국 - 모두 사실상 적국이었다 - 을 이야기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리보니아 기사단, 폴란드 왕국 - 리투아니아 공국과 그 이후 등장하는 루블린 동맹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일단 1550 년대 러시아의 주적인 타타르 족 이야기 부터 먼저 시작할 것이다.  



 11. 카잔 한국 (Kazan Khanate) 


 과거 킵차크 한국 (Kipchak Khanate 혹은 황금 군단 Golden Horde) 은 15 세기에 이르러 와해되기에 이르렀다. 이 중에 우르그 무함마드 (Ulugh Muhammed 혹은 Olugh Mokhammad ) 는 지금의 볼가강 중류의 타타르스탄 (Tatarstan) 지역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현재 타타르스탄 공화국의 수도인 카잔을 수도로 삼았다. 이 국가는 후에 카잔 한국으로 알려져 있는데 1438 년에 건국된 이후로 16 세기에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대략 1500 년 경 쯤 카잔 한국의 위치. 당시 서쪽 경계가 러시아 동쪽 경계와 겹치는데 사실 당시에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러시아의 팽창에 반비례 해서 영토가 줄어들다 결국 이반 뇌제 시기에 합병된다.  Locator map of the Kazan Khanate, c. 1500. (Partially based on Atlas of World History (2007) - The World 1400-1500, map)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Gabagool )  


 사실 카잔 한국은 러시아와 오랜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카잔 한국이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한 전쟁은 아니었다. 카잔 한국은 과거 킵차크 한국처럼 러시아에서 조공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신 러시아 국경을 침범해서 한바탕 약탈을 한 후 귀국했다. 


 16 세기 카잔과 러시아의 전쟁은 사실 누구 하나는 없어져야 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러시아 카잔 전쟁 (Russo - Kazan Wars) 는 카잔 한국이 처음 세워졌을 당시 부터 시작되었는데 카잔 한국의 첫번째 칸인 우르그 무함마드는 특히 1445 년의 공격으로 모스크바 공국에 지대한 피해를 입히는 데 성공한 바 있다. 당시 모스크바 대공인 바실리 2 세는 이를 성공적으로 저지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저 멀리 카잔에 근거지를 마련한 카잔 한국 역시 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었으므로 전쟁은 주기적으로 계속되었다.


 이반 3세 시절 카잔 한국과의 평화 조약이 깨지면서 카심 전쟁 (Qasim War 1467 - 1469) 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칸이었던 이브라힘을 끌어내리기 위해 경쟁자 카심을 이반 3 세가 지원하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결과는 결국 1469 년 이반 3 세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이반 3 세의 시기에는 대략적으로 모스크바 공국이 카잔 한국을 압도한 시기였지만 그럼에도 카잔 한국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반 3 세 시절 모스크바 공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듯 했던 카잔 한국은 1505 년에 다시 반기를 들었다. 이시기 이반 3 세가 죽고 바실리 3 세가 모스크바 공국을 물려받았는데 시기적으로 카잔 한국과 그 동맹국들의 전쟁에서 불리한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아르스크 평원 전투 (Battle of Arsk Field 1506) 에서 카잔 한국의 새로운 칸 모사맛 아민 (Moxammat Amin) 은 가장 큰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유리한 상태에서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 


 사실 이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이 평화는 오래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카잔 한국을 합병하려 들었고 카잔 한국은 여기에 저항하면서 러시아의 긴 국경선 어디로든 침범해서 재물을 약탈했기 때문이다. 1524 년에는 이반 벨스키 공 (Prince Ivan Belsky) 이 15 만의 보병을 이끌고 카잔 성벽에 도달해 전투를 벌였으머 1530 년에도 다시 카잔을 침공했지만 이번에도 완전히 카잔 한국을 굴복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카잔 한국은 1522 년부터 시작해서 1533 년, 1537 년, 1538 년, 1539년, 1540 년, 1541 년 러시아 국경선을 넘어와 재물을 약탈했는데 그들의 먼 친적인 크림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과 힘을 함칠 때도 있었다. 사실 1530 년대의 러시아는 반쯤 무정부 상태라 이점을 노린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국력 자체가 이미 러시아가 이 타타르 한국들을 넘어서는 상태였다. 


 이반 뇌제가 1547 년 이후로 친정을 시작하면서 역점을 두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스트렐치라는 소총병 상비군을 창설하고 포병과 공병등 새로운 병과를 통합하면서 러시아의 군제 개혁을 실시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러시아의 두통 거리가 되온 카잔 한국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물론 카잔 한국을 합병하고 타타르 세력을 완전히 뿌리 뽑아 동쪽 국경선을 안정화 시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목적이 물론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카잔 한국의 합병과 다른 타타르 한국에 대한 압박은 러시아를 시베리아 쪽으로 팽창하게 만들었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76805893


(참고 : 역사 관련 포스트만 모아서 보는 방법은 아래 고든의 역사 이야기를 클릭하면 됩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통계 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사실 저도 통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주제로 글을 쓰기가 다소 애매하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려봅니다. 통계학, 특히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통계학을 공부하게 되는 계기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아마도 비교적 흔하고 난감한 경우는 논문을 써야 하는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학문적 연구는 집단간 혹은 방법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려면 불가피하게 통계적인 방법을 쓸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분야와 주제에 따라서는 아닌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 논문에서는 통계학이 들어가게 됩니다.   문제는 데이터를 처리하고 분석하는 방법을 익히는 데도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학과에서 통계 수업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대학 학부 과정에서는 대부분 논문 제출이 필요없거나 필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지만, 대학원 이상 과정에서는 SCI/SCIE 급 논문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 논문을 작성하는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논문을 계속해서 쓰게 될 경우 통계 문제는 항상 나를 따라다니면서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간혹 통계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는 질문이 들어옵니다. 사실 저는 통계 전문가라고 하기에는 실력은 모자라지만, 대신 앞서서 삽질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조언을 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입문자를 위한 책을 추천해달라  사실 예습을 위해서 미리 공부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통계는 학과별로 다르지 않더라도 주로 쓰는 분석방법은 분야별로 상당한 차이가 있을 수 있어 결국은 자신이 주로 하는 부분을 잘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과 커리큘럼에 들어있는 통계 수업을 듣는 것이 더 유리합니다. 잘 쓰지도 않을 방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은 아무래도 효율

150년 만에 다시 울린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

  ( The katydid Prophalangopsis obscura has been lost since it was first collected, with new evidence suggesting cold areas of Northern India and Tibet may be the species' habitat. Credit: Charlie Woodrow, licensed under CC BY 4.0 ) ( The Museum's specimen of P. obscura is the only confirmed member of the species in existence. Image . Credit: The Trustees of the Natural History Museum, London )  과학자들이 1869년 처음 보고된 후 지금까지 소식이 끊긴 오래 전 희귀 곤충의 울음 소리를 재현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프로팔랑곱시스 옵스큐라 ( Prophalangopsis obscura)는 이상한 이름만큼이나 이상한 곤충으로 매우 희귀한 메뚜기목 곤충입니다. 친척인 여치나 메뚜기와는 오래전 갈라진 독자 그룹으로 매우 큰 날개를 지니고 있으며 인도와 티벳의 고산 지대에 사는 것으로 보입니다.   유일한 표본은 수컷 성체로 2005년에 암컷으로 생각되는 2마리가 추가로 발견되긴 했으나 정확히 같은 종인지는 다소 미지수인 상태입니다. 현재까지 확실한 표본은 수컷 성체 한 마리가 전부인 미스터리 곤충인 셈입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그 형태를 볼 때 이들 역시 울음 소리를 통해 짝짓기에서 암컷을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높은 고산 지대에서 먼 거리를 이동하는 곤충이기 때문에 낮은 피치의 울음 소리를 냈을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이런 소리는 암컷 만이 아니라 박쥐도 잘 듣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중생대 쥐라기 부터 존재했던 그룹으로 당시에는 박쥐가 없어 이런 방식이 잘 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생대에 박쥐가 등장하면서 플로팔랑곱

9000년 전 소녀의 모습을 복원하다.

( The final reconstruction. Credit: Oscar Nilsson )  그리스 아테나 대학과 스웨덴 연구자들이 1993년 발견된 선사 시대 소녀의 모습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유골은 그리스의 테살리아 지역의 테오페트라 동굴 ( Theopetra Cave )에서 발견된 것으로 연대는 90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유골의 주인공은 15-18세 사이의 소녀로 정확한 사인은 알 수 없으나 괴혈병, 빈혈, 관절 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소녀가 살았던 시기는 유럽 지역에서 수렵 채집인이 초기 농경으로 이전하는 시기였습니다. 다른 시기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사람들도 젊은 시절에 다양한 질환에 시달렸을 것이며 평균 수명 역시 매우 짧았을 것입니다.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이런 경우가 드물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죠.   아무튼 문명의 새벽에 해당하는 시점에 살았기 때문에 이 소녀는 Dawn (그리스어로는  Avgi)라고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연구팀은 유골에 대한 상세한 스캔과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서 살아있을 당시의 모습을 매우 현실적으로 복원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나타난 모습은.... 당시의 거친 환경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긴 턱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 대부분 그랬듯이 질긴 먹이를 오래 씹기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강하고 억센 10대 소녀(?)의 모습은 당시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야 했다는 점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이렇게 억세보이는 주인공이라도 당시에는 전염병이나 혹은 기아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평균 수명은 길지 못했겠죠. 외모 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겠지만, 당시의 거친 시대상을 보여주는 듯 해 흥미롭습니다.   참고  https://phys.org/news/2018-01-teenage-girl-years-reconstructed.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