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러시아 서부의 상황 :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
사실 서구 사회의 영향력 때문에 우리에게 독일보다 더 동쪽의 동유럽사 (러시아는 제외) 는 생소한 편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반 뇌제의 중요한 적수가 되는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 (Polish–Lithuanian Union 혹은 United Kingdom of Poland and Lithuania ) 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어야 내용을 이해할 수 있기에 부득이 여기서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 그리고 리보니아 기사단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이야기를 계속 진행할 것이다.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10 세기 경에 시작되었다. 폴라니 (Polanie) 족들이 지금이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의 광대한 평원에 대규모 주거지를 건설한 10 세기, 폴란드 건국의 아버지인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 (Miezko I / 혹은 미에즈코 1 세, 재위 960 - 992) 는 피아스트 왕조 (Piast dynasty) 를 창건하고 향후 1000 년 이상 이어질 폴란드란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비록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폴란드의 유력 족장 집안 출신으로 시작 사실상 폴란드를 건국해 폴란드의 초대 왕으로 간주된다. 그는 30세의 젊은 나이에 권좌에 올라 폴란드의 미래를 내다본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미에슈코 1 세 의 초상화 . 물론 후세의 창작이다. 한손에는 십자가,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는 점이 그의 재위 기간을 요약하는 듯 하다. public domain )
우선 미에슈코 1 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군주로 인정받아 폴란드를 서방 카톨릭 (동구권으로 흔히 생각되나 사실 폴란드는 국민의 90% 가까이가 카톨릭 교도) 국가의 일원으로 포함시켰다. 이와 같은 조치는 무엇보다 서방의 강대국인 신성 로마 제국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는데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은 건국의 군주라고 할 수 있는 오토 1 세 (Otto I) 에 의해 크게 세력을 팽창하고 있었다.
이에 미에슈코 1 세는 대략 966 년경 세례를 받고 카톨릭교로 개종하였으며 서방 문화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물론 이교도란 이유로 신성 로마 제국이 침공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 목적 이상의 결과를 가져와, 위치적으로는 동유럽에 가까우면서도 카톨릭 문화를 비롯한 서방 문화의 영향을 받은 폴란드의 정체성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폴란드 전체의 개종은 미에슈코 1 세 시절에 다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향후 1000 년간 발전하게 될 폴란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중요한 결정은 바로 폴란드를 로마 교황청에 기증한 것이었다. 사실 이 역시 정치적인 노림수였는데, 일단 형식적인 교황령이 되므로써 (물론 교황청에 돈을 바치긴 했지만 거리상 로마 교황령이라는 것은 거의 형식적인 이야기고 실제로는 피아스트 왕조가 지배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폴란드를 합병하지 못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렇듯 폴란드는 역사 초기 부터 주변 강대국으로부터 합병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정책이었는데 지정학적으로 주변 강대국을 막아줄만한 지형이 없고 개방된 평야 지형이라는 것이 한가지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폴란드가 늘 수세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았다. 미에슈코 1 세는 재위 기간 동안 발트해로 접근하기 위해 포메라니아 (Pomerania) 를 복속시켰다. 사실 역으로 주변에 침공할 땅이 많은 것도 폴란드의 또 다른 특징이었다. 더 적극적인 영토 팽창은 미에슈코 1 세의 아들인 볼레스와프 1세 (Boleslaw I 재위 992 - 1025) 시절에 일어났는데 그는 신성로마 제국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서 루사티아, 마이센, 보헤미아의 모라비아와 현재의 슬로바키아 지역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2 세가 다시 체제를 정비하고 반격했기 때문에 상당 부분을 반납하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의 재위 기간동안 폴란드는 영토를 크게 팽창하며 짧은 전성기를 누렸다. 볼레스와프 1 세는 1024 년 최초로 폴란드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그 다음해 사망한다.
(초기 폴란드 영토 : 가장 짙은 분홍색이 미에슈코 1 세 즉위시 영토이고 굵은 붉은색이 992 년까지 확장한 영토이다. 클릭하면 원본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oznaniak )
(볼레스와프 1세 재위 기간 확장한 영토. 일부 신성 로마 제국 땅은 다시 반납하는 수 밖에 없었으니 지금의 폴란드 보다 더 큰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클릭하면 원본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oznaniak )
그러나 이후의 폴란드 역사는 지리멸렬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본론에서 너무 벗어나기 때문에 생략하지만 아무튼 재위를 다툰 내분과 외세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폴란드 영토는 더 축소되었고 피아스트 왕조는 신분도 박탈당해 다시 공작의 신분이 되었다. 특히 왕국이 사실상 왕자들에 의해 분할되면서 폴란드는 극심한 혼란상에 놓이게 되었다.
이 혼란을 틈타 13 세기에는 독일의 튜턴 기사단의 기사단장 헤르만 폰 살차 (Herman Von Salza) 가 폴란드 북부에 독일 기사단령을 건설했다. 이는 폴란드에 아주 큰 위협으로 작용했으며 수차례 폴란드의 독립을 위협하는 존재로 부상했다. 이 위기에서 폴란드를 구해낸 국가적 영웅이 바로 카시미르 대왕 (Casimir III the Great) 이었다. 그는 현명하게도 전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기 보다는 약화된 폴란드의 국력 범위안에서 외교적인 방법을 통해 주변국, 그리고 강대한 위협인 튜턴 기사단에 대응했다. 그 결과 풍전 등화 같던 폴란드의 독립은 유지될 수 있었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그가 아들 없이 사망해 파이스트 왕조가 단절되었다는 점이었다. 폴란드 왕위는 그의 조카인 헝가리왕 루이 1 세 (Louis the Great/ 로유슈 1세 ) 가 물려받아 잠시 동유럽에는 헝가리/크로아티아/폴란드를 합친 거대한 연합 왕국이 등장했으나 루이 1 세 역시 아들 없이 죽게되어 그 연합왕국 (혹은 동군 연합) 은 와해된다.
이후 폴란드 역사는 우연의 산물인지 필연이었는지 간에 동방의 부족인 리투아니아와 밀접하게 연계된다. 그 이유는 폴란드가 루이 1세의 딸인 야드비가 (Jadwiga) 를 여왕으로 옹립하고 새로 독립한 후 신흥 리투아니아의 지배자인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 (Jogaila/ 야기에우워) 와 결혼해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을 만들기 때문이다. (1386년) 이 시기 이후 폴란드는 야기에우워 왕조 (Jagiellon dynasty ) 로 불리우며 야기에우워는 브와디스와프 2세 (Władysław II ) 로 즉위했다.
폴란드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는 북방의 큰 위협이었던 독일 기사단 때문이었다. 당시 튜턴 기사단을 막을 만한 세력으로 동방에서 큰 힘을 떨치고 있던 것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이었다. 후에는 러시아의 일부가 되긴 하지만 그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모스크바와 힘을 겨룰 정도로 강력해졌다. 리투아니아 대공국 역시 독일 기사단이 큰 위협이었기 때문에 공동의 방위를 위해 이런 연합에 합의하게 된다. 그 결과는 매우 중대한 것으로써 이후 러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시의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현재의 같은 이름의 발트해 소국이 아니라 사실 꽤 큰 국가였다. 북쪽으로는 독일 기사단, 남쪽으로는 흑해 인근 지역, 동쪽으로는 모스크바 공국, 서쪽으로는 폴란드와 면하고 있었으며 지금의 러시아/우크라이나 공화국 영토를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었다. 그 당시 폴란드에 비해 훨씬 큰 국가였으므로 이둘의 결합은 결국 동유럽의 새로운 강대국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 1386 년에서 1434 년 사이 영토 팽창. 붉은 선이 1434 년 사이 최대 판도 클릭하면 원본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Poznaniak )
위의 지도를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는 사실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연합이 지금의 동유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대국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로써 독일 기사단의 침공에 대비할 만한 힘을 축적한 것은 물론 주변 국으로 진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사실 모스크바 국, 그리고 후에 러시아에게 서방의 가장 큰 위협은 바로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연합이었다. 연합은 1410 년 그룬발트 전투 (Battle of Grunwald, 독일에서는 1차 타넨베르크 전투라고 부름 First Battle of Tannenberg ) 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후 결국 15 세기에 독일 기사단을 몰락시키는데 성공했다.
16 세기에도 이 연합은 계속해서 살아남게 되는데 이반 뇌제의 시기에 이르러 동쪽의 골칫거리였던 카잔 한국과 아스트라한 한국을 정리한 이반 4세가 다시 주의를 서쪽으로 돌림에 따라 동유럽에는 새롭게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참고 : 역사 관련 포스트만 모아서 보는 방법은 아래 고든의 역사 이야기를 클릭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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