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에서는 리처드 3 세 (Richard III) 의 유해로 보이는 유골이 발견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리처드 3 세는 1483 년 조카들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으나 26 개월만에 새로운 경쟁자인 헨리 튜더 (Henry Tudor : Henry VII) 에게 보스워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결국 전투에서 죽은 마지막 영국왕이라는 기록을 세우고 단명한 인물입니다. 여기서 이긴 헨리 튜더는 장미 전쟁을 종식시키고 튜더조를 창건하게 됩니다. 리처드 3 세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됩니다.
(리처드 3 세의 초상화 Portrait of Richard III of England, painted c. 1520 (approximate date from tree-rings on panel), after a lost original, for the Paston family, owned by the Society of Antiquaries, London, since 1828. )
리처드 3 세는 기본적으로 패배자의 포지션이기 때문에 역사에서 좋게 묘사될 수 없는 인물입니다. 특히 권력을 장악한 과정 부터가 악인으로 후세에 묘사되기 충분한 이유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는 요크공 리처드 플랜태저넷 (Richard Plantagenet, Duke of York) 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척추 기형 (흔히 그는 꼽추라고 묘사됨) 및 한쪽 다리를 저는 모습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막내인 그가 권좌에 오르게 된 것은 형인 에드워드 4 세 (Edward IV) 가 죽으면서 아들인 12살의 에드워드 5 세 (Edward V) 가 왕좌에 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린 왕을 보좌하기 위해 삼촌인 리처드 3 세 (당시에는 글로스터 공 Duke of Gloucester) 은 호국경 (Lord Protector) 의 자리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지만 갑자기 왕자들 (에드워드 5 세 및 동생인 요크공 리처드) 을 런던탑에 유폐하고 2 달 뒤 선왕 에드워드 4 세와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 (Elizabeth Woodville) 의 결혼이 무효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대신 왕위에 올라 리처드 3 세가 됩니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강력한 국민적 저항과 반발이 따를 수 밖에 없었는데 선왕과 엘리자베스 왕비 사이의 아이들인 에드워드 5 세와 리처드 왕자는 런던탑에 유폐되어 살해당했다는 설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설득력 있게 이야기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정황이 당시에 알려지지 않아서 오랜 세월 전해내려지는 런던탑의 왕자들 (Princes in the Tower) 전설이 탄생했습니다. 이는 수많은 문학 작품이나 혹은 회화들의 소재가 되었는데 상당수는 꽤 미소년으로 묘사된 왕자들이 사악한 삼촌에 의해 살해당하는 내용입니다.
(런던 탑의 왕자들 1878 년 작 Royal Holloway collection)
이 사건을 소재로한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시 세익스피어의 희곡 리처드 3 세일 것입니다. 리처드 3 세에서 세익스피어는 새로운 형태의 악당으로 리처드 3 세를 재탄생시켜 권선징악이 주된 내용이 되는 중세극과는 또 다른 현대적 악인의 해석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리처드 3 세는 항상 선이 승리하는 중세 전통극이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의 세속적 인간관에 맞춘 새로운 희극이었습니다. 리처드 3 세의 뒤틀린 욕망과 정해진 듯 한 파멸의 길로 접어드는 과정은 중세 도덕극에서는 보기 힘든 요소였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 세는 리처드 3세를 불구이자 잔학과 음모의 화신이고 전형적인 폭군으로 묘사한 토머스 모어의 원전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입니다. 하지만 후세에 과연 진짜 리처드 3 세가 그렇게 악인이고 폭군이기만 했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소 엇갈리고 있습니다.
사실 리처드 3 세가 형이 죽은 후 호국경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냥 왕의 동생이어서가 아니라 실제 장미 전쟁에서 보여준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써의 자질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1470 년 부터 형을 도와 랭커스터가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그는 헨리 7 세와 그가 개창한 튜더 왕조의 공적 1 호 였기 때문에 이후 역사에서는 불구, 탐욕의 화신,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인간 등으로 주로 묘사되었습니다. 아무튼 짧은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후세에 널리 알려진 - 주로는 물론 세익스피어의 리처드 3 세와 런던 탑의 왕자 전설 덕 - 리처드 3 세의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영국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흥미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이 유골은 2012 년 레스터 대학 (University of Leicester ) 의 고고학자들이 2012 년 부터 발굴한 것으로 당시 보스워스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Greyfriars 교회 터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주자창으로 사용되는 곳입니다. 연구팀은 여기서 척추가 심하게 휘어진 유골을 발견했는데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으로 500 년 정도 된 것이고 10 개 이상의 인위적인 상처를 유골에서 발견해서 유골의 주인공이 무기로 살해당했음을 입증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증거는 어머니쪽 혈통 (그의 대에서 왕조가 끊겼고 자식들은 후사를 남기지 못했음) 의 후손들에서 발견된 DNA 였습니다. 이 DNA 를 서로 대조하므로써 연구팀은 이 유골이 리처드 3 세의 것임을 증명했습니다.
(발굴된 리처드 3 세의 유골. 척추가 심하게 휘어진 것으로 봐서 적어도 당대의 묘사 중 척추 기형이었다는 이야기는 사실로 판명되었음. The complete skeleton showing the curve of the spine. (Credit: Copyright University of Leicester) )
사실 리처드 3 세처럼 전투중 사망해 어디 매장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 이렇게 유골을 발견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최신의 고고학적 기법과 DNA 대조를 통해 이렇게 알아낸 것은 나름 천운이라고 해야겠죠. 다만 유골의 주인공은 그다지 운이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아무튼 이 발견은 꽤 흥미로운 뉴스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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