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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 (1)




 1. 들어가면서 


 이반 뇌제는 러시아에서는 이반 4세 바실리에비치 (Ivan IV Vasilyevich Ива́н Васи́льевич ) 혹은 이반 그로즈니 (Ivan Grozny Ива́н Гро́зный​ ) 라고 불린다. 국내에서는 일본에서 건너온 번역으로 알려진 뇌제 (雷帝) 는 이반 그로즈니의 영어식 번역인 Ivan the terrible 과 함께 폭군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이반 뇌제가 러시아를 만든 위대한 군주이고 차리즘의 아버지인 동시에 잔인한 통치의 대명사인 점은 확실하다. 이 점을 아니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즈니란 단어는 러시아에서 terrible 이나 뇌제라는 단어보다 더 복잡한 의미가 존재한다. 여기에는 무서움이란 뜻 이외에도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혹은 엄정한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뛰어난 러시아 지휘관에게도 그로즈니라는 표현이 사용되곤 했다. 그리고 이반 뇌제는 이 단어 이상으로 복잡한 인물이었다. 


 의심할 바 없이 이반 뇌제의 통치 후반기는 폭력과 억압의 정치였다. 훌륭한 이반에 의한 통치로 불리는 초반기에서 갑자기 이런 폭군으로 돌아선 이유에 대해서 가장 흔한 설명 가운데 하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본래 가지고 있던 정신 이상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증상이 매우 심해졌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일부에서는 의도된 권력 강화의 순서를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되기도 하는 등 이반 뇌제는 지금도 러시아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좋을지를 두고 늘 논란이 있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이 인물의 평가를 두고 이렇게 오랜 세월 의견이 갈렸다는 이야기는 이반 뇌제라는 인물의 복잡성과 동시에 치적 못지 않게 오점도 많이 만들었던 인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역사상 사실 이런 인물은 적지 않다. 비록 필자가 역사 전공도 아니고 더더구나 러시아사는 전혀 배운 바가 없지만 여기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에 이반 뇌제의 러시아 만들기와 인간으로써의 과오, 그리고 그 유산에 대해서 짧은 지식을 써보려고 한다. 다만 비전공자의 한계 및 지식의 제한으로 인한 오류의 가능성이나 혹은 내용의 미비한 점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은 미리 알려드리며 만약 참고하거나 혹은 인용할 경우 반드시 주의를 요구한다. 




 2. 모스크바 공국의 탄생


 이반 뇌제 그러니까 이반 바실리에비치는 류리크 (Rurik or Riurik  Рюрик ) 왕조의 후예이자 일원이었다. 이 류리크란 인물은 바랑기아인 (Varangian ) 의 족장으로 바랑기아인은 당시 슬라브인들이나 그리스  인 (비잔티움) 들이 바이킹 (노르만족) 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에서 바랑기아인은 용맹한 호위병으로 자주 등장한다. 


 아무튼 이 류리크란 인물은 반쯤은 신화적인 인물로 진짜 실존인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후세의 키에프 대공들은 물론 모스크바 대공들도 류리크의 후예임을 자처했기 때문에 이 왕조들은 류리크 왕조 (Rurik Dynasty) 로 불린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이 노르만 기원설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고 있으나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므로 넘어간다. 



(신화적인 노르만 족 류리크와 그의 형제들이 라구나에 상륙한 상상화. 훗날 그들은 노브고로드 를 지배했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Apollinary Vasnetsov (1856-1933). Arrival of Rurik to Ladoga.  )     


 이 신화적인 러시아 건국의 아버지들은 바랑기아 인들 가운데서도 루시 (Varangian Russes) 인들로 불리웠는데 루시가 러시아 (Russia  즉 루시인들의 땅) 이라는 어원이 되었다 전해진다. 류리크 보다 더 직접적인 러시아의 시조는 류리크의 아들이라고 주장되는 이고르 (Igor) 로 바랑기아 인의 지도자인 올레그란 인물이 키에프에 거점을 마련하고 그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한다.


 이것이 키에프 루시 (Kievan Rus. 일부 키에프 루스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영어식으로 읽은 것이고 루시 쪽이 러시아어에 가깝다고 함) 의 기원으로 오늘날 러시아의 직접적인 기원으로 생각되지만 이 역시 10세기 말까지는 다소 역사가 분명치 않은 부분이 존재한다. 아무튼 9세기에서 10 세기까지 키에프가 강력한 도시로 성장한 것은 사실이며 블라디미르 대공 (Vladimir Sviatoslavich the Great  Володимѣръ Свѧтославичь ) 이 980 년 즉위 후 988 년 역사적인 기독교 개종을 통해 키에프 공국은 느슨한긴 하지만 하나의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11 세기 키에프 공국의 영역. 모스크바는 본래 변두리에 속하던 지역이었고 사실 키에프 공국 시절 주요 도시로 표시조차 되지 않던 지역이었다. 클릭하면 원본  Map of the Kievan Rus' realm, 1015-1113 CE, of the medieval Rus' culture in Eastern Europe. Original version (russian): Koryakov Yuri  )  


 키에프 공국의 역사 역시 여기서는 그다지 중요하진 않은 내용이지만 한가지 언급할 점은 키에프 루시는 물론 러시아 역사에서 한가지 특징은 강을 따라서 도시들이 발전했다는 점이다. 수로를 따라 남쪽의 비잔티움 제국등 부유한 지역과 북방의 산물을 주고 받는 무역이 발전했으며 키에프 역시 그렇게 성장한 도시였다. 따라서 저 북쪽의 모스크바는 사실 키에프의 전성기에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설령 존재했다고 해도 작은 시골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1147 년에 이르러서야 모스크바라는 단어가 문헌상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다지 중요하게 언급되지 않는다. 


 아마도 12 세기 들어 모스크바라는 작은 도시는 규모가 커지면서 성벽도 생기고 자체적으로 통치하는 지도자 - 공 (Prince  - knyaz 크냐지) - 의 지배를 받는 작은 분령지가 되었던 것 같다. 당시 키에프 러시아는 대공들의 자식들이 토지를 나누어 받아 통치를 하는 분령지라는 작은 영지로 조각이 나던 중이었는데 이들에게는 장자가 모든 영토를 상속하는 장자 상속제가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스크바는 이런 작은 분령지의 하나였으며 사실 13 세기에 발생한 외부적인 사건 - 즉 몽골 제국의 러시아 침공 - 이 없었다면 나중에 그렇게 크게 성장할 기회를 얻지는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초창기 모스크바 공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었고 자주 교체되었기 때문에 기록이 불안정 하지만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한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공 (Alexander Nevsky. 노보고르드 공, 블라디미르 대공) 의 자손 가운데 이반 1세라는 인물이 14 세기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1157 년에서 1598 년 사이 류리크 왕조의 계승도. 여기에서는 분령 시기에 중요한 공들만 표시하고 있으며 사실 아래 부분은 모스크바 대공과 짜르 들이다. 클릭하면 원본  CCL 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Mark J (talk)  )   



3. 이반 1 세 이후의 모스크바 공국


 이반 1 세 (Ivan I Daniilovich Kalita ) 는 이반 칼리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데 이는 이반 돈주머니라는 의미이다. 사실 그는 돈주머니라는 별명 보다는 위험했던 몽골 (당시 러시아에서는 킵차크 한국) 과의 관계를 잘 이용한 것으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이반 1 세는 그의 형인 유리 1 세 (Yuri I) 로 부터 공국을 물려받았는데 그의 형과 아버지 시절부터 모스크바는 다른 유력 도시인 트베리 (Tver) 와 누가 상대를 병합하느냐를 두고 오랜 다툼 중이었다. 


 대략 1317  - 1318 년 사이 킵차크 칸의 누이와 결혼한 유리 1세는 대공으로 임명받았는데 이 기세를 몰아 트베리의 미하일 대공과 싸움을 벌였으나 결과는 대패였다. 아내마저 포로로 잡혔다가 죽자 유리 1 세는 이를 이용해서 킵차크 한국이 미하일 대공을 처형하도록 일을 꾸몄다. 이렇게 당시 러시아의 공들과 대공들은 사실 킵차크 한국의 속령 형태로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의 고려 역시 마찬가지긴 했지만 특히 러시아의 분령지들은 서로 간에 다툼이 심했으므로 킵차크 한국의 눈에 들려는 경향이 더 강했다. 


 본래 유리 1 세의 의도는 트베리를 합병하려는 것이었으나 강력한 대공이 들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던 킵차크 한국은 미하일 대공의 아들 드미트리를 새로운 대공으로 임명했다. 이번에도 유리 1 세는 음모를 꾸몄으나 결과는 유리 1세와 드미트리가 동귀 어진 하는 것이었다. 트베리를 합병하려는 시도는 당장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결국 드미트리의 동생 알렉산드르가 킵차크 한국의 눈에 거슬린 후 트베리가 초토화 되고 이후 약해지면서 나중에 이루어지게 된다. 


 유리 1세의 동생 이반 1 세는 이런 시대에 자신이 성공하려면 역시 킵차크 한국과의 돈독한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킵차크 한국에 많은 공물을 받치면서 자신의 중요성을 어필했다. 그 결과 그는 대공으로써 다른 러시아의 공들로 부터 더 많은 공물을 거두는 세금 징수원의 역할을 맏아 이반 돈주머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이 돈으로 킵차크 한국의 주머니만 불린 것은 아니었다.



(이반 1 세 돈주머니의 초상. 돈주머니는 그다지 고상한 별명은 아니지만 돈의 힘이야 말로 모스크바 공국을 끌어올린 원동력 이었다.   public domain ) 


 이렇게 징수되는 돈의 일부는 이반 1세의 부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해 이반 1 세는 땅을 사들이는 방식으로 영토를 몇 배로 늘렸다. 또 몽골인들에게 잡혀간 러시아인들을 다시 돈을 주고 사와서 그 땅에 정착시켰다. 돈의 위대함이란 역시 시대를 초월하는 법이라서 곧 모스크바 공국의 힘은 크게 강해졌다. 이반 1 세는 1341 년 서거할 때 까지 더 부강해진 모스크바 공국을 아들인 시메온 1 세 (Simeon I) 에게 넘겼다. 


 거만한 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시메온 1 세 고르디  (Simeon Ivanovich Gordyi ) 는 1353 년에 흑사병으로 죽을 때 까지 부친의 정책을 그대로 계승했다. 그를 계승한 것은 유약한 이반 2세  (Ivan II Ivanovich the Fair ) 였는데 그 아들이 그 유명한 드미트리 1 세, 즉 드미트리 돈스코이 (Dmitry Ivanovich Donskoy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Донско́й ) 다. 그는 1350 년에 집권해서 1389 년 죽을 때 까지 진정한 의미에서 러시아에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란 1380 년의 쿨리코보 전투 (Battle of Kulikovo) 를 의미하는데 이는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큰 쾌거 중 하나로 마마이 (Mamai) 가 이 이끄는 10만 정도 되는 킵차크 한국의 대군을 그 절반이 안되는 모스크바 대공군이 격파한 사건이다. 사실 킵차크 한국은 14 세기 후반에 극심한 내분으로 힘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로 알려진 압제에서 벋어날 순간만을 기다려왔다.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공국은 몽골의 앞잡이에서 러시아의 구세주로 다시 평가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타타르의 멍에는 그렇게 쉽게 던저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2 년 뒤인 1382 년 토크타미시 (Tokhtamysh ) 는 다시 러시아를 성공적으로 침공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이후 몽골과 모스크바는 서로를 인정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 지었는데 물론 몽골 칸의 종주권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쿨리코보 전투는 몽골인들에게 러시아인들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일깨운 사건이었다. 



(쿨리코보 전투의 상상화. 가운데가 드미트리 돈스코이   The Battle of Kulikovo (1850). Huge canvas from the Grand Kremlin Palace.  )    


 드미트리 1세의 아들인 바실리 1 세는 (Vasiliy I Dmitriyevich ) 신중하게 몽골과 새롭게 등장한 티무르, 그리고 리투아니아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했다. 이후 다소간의 혼란을 겪은 적도 있지만 모스크바 공국은 순조롭게 몽골의 영향력에서 멀어지면서 서서히 러시아의 근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대략 드미트리 1세의 시대로 부터 100 년 후인 1462 년에 즉위한 이반 3세 (Ivan III Vasilyevich  Иван III Васильевич  ) 는 1505 년까지 이어진 그의 긴 제위 기간 동안 단순히 모스크바 대공이 아니라 모든 러시아의 대공 ( Великий князь всея Руси ) 으로 추대되었다. 사실상 이 시대는 모스크바 공국이 아니라 러시아라고 부르는 게 옳은 시기였다. 러시아 땅 모으기라고 불리우는 영토 확장은 이 시기에 계속되어 많은 분령지가 구입되거나 혹은 점령되었다. 모스크바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트베리와 노브고르드도 이 시기에 완전히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다른 말로 이것은 아마 나중에 이반 뇌제 시기에 언급하게 될 러시아의 강력한 경쟁 상대인 리투아니아와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반 3 세 때에는 킵차크 한국이 거의 몰락하던 시기로 이 시기에 이르러 타타르의 멍에는 완전히 벋었다고 할 수 있다. 이반 3 세는 1472 년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의 공주인 소피아 (혹은 조예 팔레올로기아 Zoe Palaiologina  ) 와 결혼하여 스스로를 비잔티움 제국과 연관시켰다. 이 시기 비잔티움의 쌍두 독수리가 이반 3세 가문의 문장인 성 게오르기에 덧붙여졌다. 


 차르 (Tsar) 라는 칭호가 사용된 것도 이 시기가 처음이었다. 이 칭호는 물론 카이사르에서 유래된 것으로 로마의 최고 통치자를 지칭하는 칭호 가운데 하나였다. 이 단어는 손자인 이반 뇌제에 의해서 완전히 러시아 통치자의 명칭으로 굳어지게 된다.


 1505 년 이반 3세가 죽은 후 아들인 바실리 3 세 (Vasili III Ivanovich Василий III Иванович ) 는 아버지의 정책을 계승해 프스코프, 라쟌 등을 병합했으며 리투아니아와 전쟁을 통해 스몰렌스크도 점령했다. 이 시기는 사실상 러시아 역사에서 분령 시기가 막을 내린 시점이었으며 러시아는 전제 군주제도가 어느 정도 확립되어 가던 시기였다.


 다만 다른 왕조 국가가 그러하듯이 봉건적인 특권 귀족층 - 러시아에서는 보야르 (boyar : 공 아래의 귀족 계급으로 10 - 17 세기 사이 존재했던 봉건 귀족. 보야르시치나 라는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보야르스카야 두마 라는 의회의 구성원으로 큰 권한을 누렸으나 이반 4세의 시기에 철퇴를 맞게 된다. )  - 들이 존재했고 이들은 강력한 차르의 등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1533 년 바실리 3 세가 아직 3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이반 뇌제를 남기고 죽게 되자 이 갈등은 더 극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다음에 계속 


 (참고 : 역사 관련 포스트만 모아서 보는 방법은 아래 고든의 역사 이야기를 클릭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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