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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 (2)







 4. 보야르


 보야르 (Boyar 혹은 Bolyar  러시아어 боя́ри ) 는 슬라브족에 속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및 발칸 반도 지역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등) 에서 공 (Prince knyaz 크냐지) 들의 바로 아래에 존재하는 토지 귀족들을 일컷는 말이었다. 이들은 초기 슬라브 공국들이 세워지는 서기 10 세기 부터 표트르 대제가 보야르 두마를 폐지하는 1711 년까지 존속했다.



(말에 탄 17 세기 보야르의 삽화   The collection of New York Public Library )  


 보야르의 기원은 크게 두가지로 생각된다. 본래 있었던 슬라브족의 호족들의 경우 관습에 의해서 반란등 중범죄만 저지르지 않으면 토지와 혈통에 관한 특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공들이 이들을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에 이들은 초기 슬라브 공국에 흡수되어 주요 귀족층을 형성한 것 같다. 두번째는 공들로 부터 토지를 받는 경우로 공과 관련된 혈족이나 공신들의 경우였다. 이 경우에도 토지는 세습되었으므로 토착 토지 귀족인 보야르에 낄 수 있었다.  


 키에프 루시 시절 보야르들은 대공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높은 고위 관리직을 차지하거나 혹은 의회의 초기 형태로도 볼 수 있는 두마 (Duma) 를 통해 대공을 보좌했다. 따라서 이 시기 두마를 보야르 두마 (Boyar Duma) 라고도 부른다. (이에 대비되는 민회라고 부를 수 있는 조직은 베체 (veche) 라고 불리웠는데 일반적으로 보야르 두마 만큼 큰 권한이 있진 않았지만 분령 시대의 노브고로드에선 예외였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는 키에프 대공국 시절에 형성된 보야르들은 이후에 공들의 힘이 약해진 분령시기와 몽골 지배 시기 더 성장했다.  일부 분령지에서는 보야르들이 스스로 공의 자리에 오르려는 시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맘루크 조 처럼 본래 주인을 갈아치우고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여전히 분령지들의 주인들은 류리크의 후예임을 자처하는 공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공국 역시 보야르들이 존재했다. 이들 역시 자신의 공인 모스크바 공과 대공들에게 충성했다. 물론 일부는 다른 분령지들이 하나씩 통합되거 매입되면서 흘러들어온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모스크바 대공국엔 보야르와 보야르 두마가 존재했으며 이들의 권한은 공이라도 함부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공국에 전례 없이 강력한 지배자가 등장하면서 이들의 권력은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 지배자는 바로 이반 3 세 (Ivan III Vasilyevich  Иван III Васильевич  ) 로 앞서 이야기했듯이 모든 러시아의 대공 ( Великий князь всея Руси ) 이라는 칭호를 받는 것도 성에 차지 않을 만큼 야심가였다. 그는 로마의 카이사르의 이름을 딴 칭호 차르 (Tsar) 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을 뿐 아니라 전제자 (samoderzhets) 등 이름만 들어도 이제는 모스크바 대공이 아니라 전제왕권을 지닌 절대 군주 같은 느낌이 뭍어나는 호칭들을 사용했다.


 사실 호칭만 그렇게 한게 아니라 이반 뇌제가 차리즘의 아버지라면 이반 3 세는 할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만큼 강력한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해외에서 기술자들을 불러 여러 대형 건축물을 건설해 새로운 전제 지배자의 면모를 과시했는데 그 중에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Kremlin) 을 재건축한 것도 있었다.  이탈리아 등지에서 데려온 숙련된 건축가들이 세운 거대한 성당인 성모승천 대성당(The Assumption Cathedral) 은 15 세기 러시아 건축의 걸작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물론 이런 거대 건축물을 건설한 이유는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강력한 전제 지배자가 탄생한 만큼 결국 기존의 귀족들의 권력은 제한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본래 보야르 두마는 현대의 의회같은 조직은 아니긴 했지만 점차 대공, 그리고 차르의 권력 앞에 작아졌다. 이와 같은 상황은 이반 3 세의 아들인 바실리 3 세 시절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바실리 3 세가 3살 된 아들 이반 뇌제 (이반 4세) 를 남기고 1533 년 죽게 되자 보야르들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권력을 잡기 위한 보야르들의 노력은 엄청난 피의 숙청으로 이어진다.  



 5. 이반 뇌제의 탄생


 이반 뇌제는 대제 (Ivan the Great) 라고 불린 이반 3 세의 손자이고 바실리 3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옐레나 글린스키 (Elena Vasilyevna Glinskaya Елена Васильевна Глинская 1510 - 1538) 였는데 사실 이반 뇌제는 축복받은 결혼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바실리 3 세에게는 본래 살로모니야 (Solomoniya Saburova) 라는 아내가 있었다. 나무랄 것 없는 아내였으나 불행히 그녀는 아들을 낳지 못했으므로 후계자를 간절히 바랬던 바실리 3세는 그녀와 이혼하고 (1525 년) 강제로 수녀원으로 보내버렸다. 사실 이혼은 당시의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바실리 3 세는 이혼을 강행하고 그 다음해 옐레나 글린스키를 새로운 신부로 받아들였다. 


 당시 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대주교는 바실리 3세가 악한 아들을 얻어서 나라는 공포와 눈물로 얼룩지며 피가 강처럼 흐르고 도시는 불탈 것이라고 저주했다고 한다. 당시 정말 그랬는지 아니면 후세의 창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뒤에 일어난 일은 비슷하긴 했다.


 이반 4세는 1530 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인 옐레나로써는 이반의 탄생으로 전처의 운명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으니 이반이 꽤 효자였을 것이다. 옐레나는 다시 2 년후 차남 유리를 낳았기 때문에 바실리 3 세는 꽤 만족했겠지만 나라안의 민심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우리로 치면 인현왕후를 몰아낸 희빈 장씨 처럼 아들을 낳았는데도 나라안의 민심은 계속 그녀에게 불리했다. 이즈음엔 그녀가 아이를 가지기 위해 핀란드에서 마녀들을 데려와 마법으로 그녀를 돕게 했다는 루머까지 떠돌았다. 




(옐레나 글린스키의 두상  Elena Glinskaya. Forensic facial reconstruction by S.Nikitin, 1999  CCL에 따라 복사 허용 저자 표시   저자   Shakko )


 따라서 1533 년 바실리 3세가 죽은 것은 그녀에겐 큰 위기이자 전환점이었다. 그녀에 대한 반감이 나라안에 적지 않았기 때문에 조심해서 처신하지 않으면 그녀는 물론이고 아들인 이반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바실리 3 세는 죽으면서 (농양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됨) 장남인 이반이 성인 (당시로써는 16세) 될때까지 러시아의 통치를 아내인 옐레나와 보야르 두마에게 맡겼는데 당시로써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만 불행히 둘 중 누구도 러시아 통치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이들이 모두 무능하고 탐욕스러웠으므로 곧 러시아는 엄청난 권력 투쟁에 휩싸이게 된다. 어린 차르 이반 4세는 이 와중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포함 수많은 사람들이 궁정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다음에 계속 : 


(참고 : 역사 관련 포스트만 모아서 보는 방법은 아래 고든의 역사 이야기를 클릭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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