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옐레나의 최후
이반 뇌제의 어린 시절은 정상적인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그의 인생이 정상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지게 된 것은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컸다. 글린스키 가문의 옐레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러시아의 통치에는 전혀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으나 바실리 3 세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 인해 최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약 바실리 3 세가 10 년 정도 이상 더 살았다면 이후 이반 4세의 치세는 변했을까 ? 역시 그 부분은 답하기 곤란한 질문일 것이다. 다만 옐레나의 잘못된 통치가 아들의 재위에 먹구름을 몰고 왔다는 해석 정도는 부담없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옐레나 글린스키는 1510 년생으로 사실 최고 권력에 자리에 올랐을 때 23 살 정도에 불과했다. 정치적 경험이 미숙한 것은 물론 - 사실 그녀는 그런 기준으로 황후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얻기 위해 후처자리로 온 것이었다 - 성품이 거만하고 독단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녀는 집권하자마자 바실리 3세의 동생인 드미트로프의 유리 (Yury of Dmitrov) 및 스타리트샤의 안드레이 (Andrey of Staritsa) 의 도전을 받았는데, 친족인 글린스키 가문의 도움을 받아 이들을 1534 년과 1537 년에 투옥 시키므로써 권력 투쟁에서 우위에 서는 듯 했다.
그렇다면 태후로써의 위엄을 과시하면서 (혹은 당시 명칭으로는 대공비) 그녀의 권력의 기반이랄 수 있는 이반 뇌제의 앞날을 탄탄히 다지는 것이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의 친족인 글린스키 가문 사람을 요직에 앉히고 믿을 수 있는 보야르 들을 포섭해서 러시아에 강력한 통치자가 사라진 틈을 타서 이전의 권력을 되찾으려는 유력 보야르들을 견제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녀를 도와준 숙부 글린스키 공의 사후 권력의 요직을 차지한 것은 잘생긴 젊은 보야르 텔렙네프 - 오볼렌스키 ( Ivan Feodorovich Ovchina-Telepnev-Obolensky ) 였다. 별 정치적인 기반이나 수완이 없는 그가 갑자기 중요한 자리에 오른 것은 옐레나와의 부적절한 관계 (즉 그는 옐레나의 정부였다) 덕분이었다.
이와 같은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반대파가 많은 옐레나에게 더 많은 정적을 만들 수 있는 구실을 제공했을 것이다. 1538 년 한창 젊은 나이의 옐레나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의학이 발전 하기 전 시절이라 젊은 사람이라도 갑자기 죽는 일은 흔했지만 옐레나의 죽음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독살설이 매우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사건의 진상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슈이스키 (Shuisky) 가문이 독살을 사주했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옐레나는 사실 살아있을 때도 만약을 대비해서 아들인 이반 뇌제의 권력을 보좌할 시스템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5 년이라는 시간이 있었으므로 이 시기에 국가 요직에 자신과 글린스키 가문, 그리고 이반 뇌제의 미래를 위해 자기 사람들을 심어놓을 시간은 충분했다. 또 슈이스키와 벨스키 같은 유력 보야르 가문들이 권력을 넘보지 못하게 제압할 시간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도 못했다.
옐레나가 그런 조치들을 미리 해놓는 대신 젊고 잘생긴 연인을 만들어 청춘을 만끽한 대가로 아들인 이반 뇌제와 동생인 유리 공 (Yuri) 은 매우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7. 이반 뇌제의 소년기
이반 뇌제가 8 살일 때 어머니인 옐레나는 아마도 독살에 의해서 사망했다. 어린 소년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게 분명하지만 이반 뇌제에게는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이유가 존재했다. 1538 년에서 그가 본격적으로 친정을 시작하는 1547 년사이 까지 두 유력 보야르 집안인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Belsky ) 가문이 권력을 잡기 위해 엄청난 유혈극을 벌였기 때문이었다.
슈이스키 집안은 그 본류로 거슬러 올러가면 류리크 왕조의 후예로 알렉산더 네프스키의 형제인 안드레이 야로슬라비치 (Andrey Yaroslavich) 와 블라디미르 - 수즈달의 대공 드미트리 콘스탄티노비치 ( Grand Duke Dmitry Konstantinovich of Vladimir-Suzdal ) 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이 슈이스키 (Shuysky) 가문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이유는 1403 년에 슈야 (Shuya) 라는 얻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반 3 세 시절부터 대공들 보좌하면서 큰 권력을 형성했다.
경쟁자인 벨스키 (Belsky) 가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 혈통의 후예로 바실리 3 세 시절에는 여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드미트리 페오도로비치 벨스키 (Dmitry Feodorovich Belsky (1499–1551) ) 는 몽골 (그들은 타타르라고 부른) 의 잔재라고 할 수 있는 카잔의 칸과 크리미아 반도의 칸들과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그의 동생인 이반 페오도로비치 벨스키 (Ivan Feodorovich Belsky ) 는 그가 20 대였던 1524 년에 15만에 달하는 러시아 병력을 이끌고 카잔과 유리한 전쟁을 벌였다.
벨스키 가문의 형제들은 바실리 3세의 형제인 드미트로프의 유리와 친한 관계였기 때문에 그가 옐레나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하자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반 벨스키는 감옥에 투옥되고 이반의 동생인 시메온 페오도로비치 벨스키 (Simeon Feodorovich Belsky ) 는 망명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538 년 옐레나가 죽자 이들은 다시 권력의 무대에 복귀했다. 이들은 슈이스키 가문에 도전하여 섭정 자리를 노렸으며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1541 년에는 권력이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봐서는 슈이스키 가문쪽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슈이스키 가문의 바실리 (Vasily Vasilievich "Nemoy" ) 는 이전부터 구축한 강대한 권력을 바탕으로 1538 년 옐레나 사후 섭정 자리를 주장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다음해에 죽었으므로 권력 투쟁은 그의 동생인 이반 바실리에비치 슈이스키 (Ivan Vasilievich Shuysky ) 의 몫이었다. 이반은 권력 투쟁에서 더 유리한 위치에 서기 위해 투옥된 그의 사촌 안드레이 미하일로비치 슈이스키 (Andrey Mikhailovich Shuysky ) 를 석방시켰는데 이들은 곧 러시아의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들은 어린 이반 뇌제를 조종해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데 그다지 세련되지 못한 수법을 사용하므로써 미래의 화를 자초하게 된다. 즉 이들은 공개 석상에서는 이반 뇌제에 대해서 공손하게 대하다가도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는 태도를 돌변하여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 이반 뇌제는 쿠르브스키 공 (Prince Kurbsky) 에게 보낸 편지에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더러운 신발을 자신에 침대위에 올려놓은 일을 고통스럽게 기록했다.
대략 10 세를 전후한 시기의 이반 뇌제는 매우 총명한 어린이었던 것 같다. 그는 글 읽는 법을 일찍 배웠고 교회 문헌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을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에게 무슨일이 생겼는지를 필연적으로 알게 되었다. 두 유력 보야르들은 이반 뇌제의 권력을 제한할 의도로 그에게서 친족들과 친구들을 떨어뜨려 놓으려고 했는데 이 과정까지 포함해서 이반 뇌제의 가슴속에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자리잡게 되었던 것 같다.
어린 이반 뇌제는 힘없는 동물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놀이를 즐겼는데 이는 미래 그가 자신의 반대파들을 잔인하게 숙청할 것임을 암시하는 일이기도 했다. 이반 뇌제는 어린 시절 적지 않은 권력 투쟁과 살인, 음모들을 실제 보고 자랐기 때문에 살인에 대해서 아무런 거부감이 없었다. 사실상 부모 없이 자란 이 어린 권력자가 나중에 왜 그런 잔인한 숙청을 벌였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설이 존재하지만 이반 뇌제의 어린 시절을 고려하면 이 모든 일이 뜻밖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반 뇌제의 이런 잔인한 성향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것은 그가 13 살 때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을 모독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방심한 틈을 타 자신의 종복들에게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체포한 후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하도록 했다. (그는 굶주린 개들이 있는 방에 가두어져 최후를 맞이했다. 1543년) 이반 뇌제를 아직 어린 아이로만 생각하고 방심한 틈을 노린 것이지만 13 살에 나이에 이렇게 잔인하게 정적을 살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반 뇌제가 자란 특수한 환경이 아니라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옐레나가 사망한 1538 년부터 이반 뇌제가 차르로 즉위하는 1547 년까지를 보야르의 통치기 (boiarskoe pravlenie) 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통치기라기 보다는 혼란기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하지만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어떤 한 유력가문이나 인물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반 뇌제가 정상적으로 차르로 즉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 권력을 독점하고 차르를 허수아비로 만들었다면 이반 뇌제가 1547 년 이후에도 제대로 권좌에 올라 차르로써 권력을 행사하기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소년은 결국 성장하게 마련이다. 1547 년이 되자 이반 뇌제는 16 세가 넘었고 이는 당시에는 성인으로 간주되던 시기였다. 이 때 이반 뇌제는 이후 역사에 남을 결정을 하게 되는데 바로 모스크바 대공이 아니라 아예 즉위부터 차르 (Tsar) 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비록 불행한 소년기를 거쳤지만 차르 이반 4세의 초기 치세는 상대적으로 평온하고 이성적인 통치로 시작했다.
다음에 계속 http://blog.naver.com/jjy0501/100175150971
(참고 : 역사 관련 포스트만 모아서 보는 방법은 아래 고든의 역사 이야기를 클릭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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