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이반 뇌제의 즉위
이반 뇌제가 즉위한 1547 년은 사실 러시아 역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일들이 있었다. 첫번째로 이반 뇌제는 러시아 역사상 최초로 차르 (Tsar) 로 즉위했다. 사실 이미 왕좌에 오른 모스크바 대공이 차르를 자칭한 것은 그의 조부인 이반 3 세가 처음이었으나 즉위시 차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반 뇌제가 최초였다.
비록 이반 뇌제는 17 세에 불과했으나 매우 조숙한 소년이었으며 험난한 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정치적인 판단도 매우 예리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월에 확립한 왕권이 자신이 어린 틈을 타서 약화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모스크바 대공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여기에 불만을 품은 세력 (예를 들어 보야르들) 이 존재했다. 이들은 이반 뇌제의 소년 시절 서로 권력을 잡기 위한 투쟁을 벌였다.
당시 성년으로 간주되는 나이에 도달한 이반 뇌제는 강력한 통치자로 거듭나고자 했다. 따라서 아예 별도의 즉위식을 가지고 차르로 즉위했다. 사실 그는 1533 년부터 모스크바 대공이었다. 그런 그가 1547 년 1월 16 일 전 러시아의 차르 (Tsar of All the Russias) 로 즉위한 것은 이런 의미가 강하게 담겨있었다. 이반 뇌제는 더 이상 모스크바 대공이 아니라 전 러시아의 지배자였다. 물론 차르라는 단어에는 저 멀리 비잔티움 제국의 후예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써 러시아의 문화적 우월성과 차르의 권위를 더 높이고자 한 것이다.
(이반 뇌제의 초상화. 18 세기 작품. State Historical Museum )
같은 해 이반 뇌제는 황후를 맞이해 러시아 제국의 기틀을 다지고자 했다. 처음에는 외국과 결혼 동맹도 고려했으나 이반 뇌제는 대신에 신중하게 러시아의 보야르 가문 중에서 인기 있는 가문이었던 로마노프 (Romanov) 가문의 아나스타샤 (Anastasia Romanovna Zakharyina-Yurieva 1530 - 1560 년) 를 황후 (Tsaritsa) 로 간택했다. 이 선택은 치세 초기에 이반 뇌제가 했던 가장 현명한 선택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반 뇌제와 동갑내기인 아나스타샤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품의 소유자였으며 어린 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던 이반 뇌제에게 감정적으로 매우 큰 안정감과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이반 뇌제와의 사이에서 6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나중에 이반 뇌제에게 살해 당한 황태자 이반과 결국 이반 뇌제의 뒤를 이은 표도르 1 세 (Feodor I 혹은 테오도르 Theodore ) 가 그녀의 소생이었다.
1547 년에 일어난 러시아 역사상 두번째 중요한 일은 로마노프 가문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일이다. 이 가문에서 최초의 황후가 등장하므로써 차르 가문과 연관을 맺게 되었으며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 나중에 로마노프 왕조 최초의 차르가 되는 마하일 1 세 (Mikhail I Fyodorovich ) 는 아나스타샤의 동생인 니키타 로마노비치 (Nikita Romanovich) 의 손자이다.
하지만 1547 년 그해에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547 년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는 역사적인 대화재가 발생해 사실상 도시가 전소되다 시피했다. 크렘린도 일부 소실되었으며 80000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2700 - 3700 명 정도가 죽는 일대 참사가 발생했다. 이렇게 큰 화재가 발생한 것은 도시가 무계획적으로 커졌는데다 대부분 목재 건물이라 화재에 취약했기 때문이다. 졸지에 집과 가족을 잃은 시민들은 폭도로 돌변해서 차르의 외가인 글리스키 가문을 비난하고 이반 뇌제의 숙부인 유리 글린스키 (Yuri Glinski) 를 살해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이반 뇌제는 그해에 권력 기반을 다지고 실제적인 친정의 기틀을 마련했다. 사실상 부모가 모두 없는 상태인 현재 우리로 보면 고등학생 2 학년 정도 되는 청소년이었지만 이반 뇌제는 매우 총명하고 험난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잔인성과 더불어 냉철하고 현실적인 판단 능력도 같이 겸비하고 있었다.
9. 훌륭한 이반의 통치
이반 뇌제의 통치 전반기는 훌륭한 이반에 의한 통치라고 불릴 만큼 모범적인 통치기였다. 하지만 이반 뇌제 혼자서 모든 통치를 할 수는 없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뛰어난 지도자란 유능한 인재들을 사방에서 모으고 그들이 자신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법이다. 이반 뇌제 역시 러시아의 통치를 위해서 새로운 인재와 새로운 군대, 그리고 새로운 법률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이반 뇌제는 러시아 정교회의 수좌대주교인 마카리우스, 궁정 관리인 아다셰프 등 인재를 모아 우선 특선 평의회 (Izbrannaia rada) 라는 자문 기구를 만들었다. 이들은 이반 뇌제 치세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반 3 세와 바실리 3 세 시대까지 러시아는 영토를 크게 확장해서 러시아 모으기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시스템과 법률이 필요했다. 그리고 국민들의 지지와 참여도 필요했다.
이반 뇌제는 1549 년 젬스키 소보르 (Zemsky Sobor зе́мский собо́ 모든 땅의 의견을 모은다는 의미) 라는 일종의 서구의 신분제 의회 비슷한 모임을 소집했다. 이 모임의 전신은 1471 년 이반 3세가 노브고르드 원정을 앞두고 이반 3 세가 모스크바 국의 각개 각층을 모았던 것이라고 보지만 아무튼 젬스키 소보르를 체계화 시킨 것은 이반 뇌제였다. 이미 모스크바 국에는 보야르 두마라는 귀족들의 협의체가 있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전체 국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대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젬스키 소보르에는 적어도 3 개의 계층이 참여했는데 귀족과 고위 관료들 (보야르 두마의 인적 구성을 포함한다) 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었으며 그외에 정교회의 성직자가 또 다른 계층을 이루었다. 그리고 3 계급으로써 상인들과 도시민들이 참여했다.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1613 년 같은 경우 (이 때 미하일 로마노프가 새로운 차르로 선출되었다) 농민들도 독립 계급으로 참여한 바가 있었다. 이런 예외를 제외한다면 인적 구성에서 젬스키 소보르는 일종의 삼부회 (Estates Generals) 와 비슷한 기관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세르게이 이바노프의 젬스키 소보르. 현대적인 의회 보다는 삼부회 같은 신분제 의회였으나 의회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조직이다. 이러한 제도가 서구 뿐 아니라 러시아에서도 존재했다. public domain )
젬스키 소보르는 마치 의회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지만 그 의사 결정 방법은 현재의 의회와 달랐다. 이 회의에서 중요한 안건들이 결정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반 뇌제가 결정한 사안을 승인하고 각 계급들에게 설득하는 자리가 되는 경우가 흔했다. 이 신분제 의회의 표결은 주로 개인이 아니라 삼부회처럼 신분별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학자들은 두마와 마찬가지로 젬스키 소보르가 차르의 권력을 제한할 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동의는 종종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를 테면 미하일 1 세의 시절에는 젬스키 소보르의 동의 없이는 보조금이 새로 징수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 동란의 시기에는 차르의 선발 역시 젬스키 소보르를 통해 이루어졌다. 젬스키 소보르는 차르에 의해 비정기적으로 소환되어 차르의 의지를 신민들에게 전달하거나 혹은 러시아 국민의 동의가 필요한 사안 (이라고 해도 실제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농민은 제외되었다) 을 통과시키던 기구였다.
1549 년 젬스키 소보르에서 이반 뇌제는 새롭게 만들고 있던 법전의 동의를 구하고 지방 행정 조직 개편을 통과시켰다. 동시에 러시아 전역에서 대표들을 선발해 그들로 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들으므로써 전 러시아의 차르로써 필요한 정보와 의견을 듣기도 했다.
그 다음해인 1550 년에는 새로운 법전인 수데브닉 (Sudebnik Судебник ) 이 반포되어 러시아의 법과 사회가 보다 체계를 갖추게 된다. 수데브닉에는 농민 및 영주들의 권리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더불어 조세 방식, 대표를 선출하는 방법들에 대해서도 규정하고 있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시스템은 러시아를 보다 중앙 집권적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러시아가 공국들의 모임이 아닌 하나의 국가로 통합 될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반 뇌제 시절에 반포된 법률이 매우 중앙 집권적이고 전제적인 권력을 강조할 것으로 생각되지만 의외로 민주적인 요소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 보면 놀랍기도 하다. 이 법안에는 지방 행정에 일반인들을 참여시켜 권력 독단과 부정 부패를 줄이기 위해 노력한 구절이 있다. 심지어 지방민들은 자신의 지사를 탄핵할 수도 있었으며 일정한 액수의 세금을 내는 지역은 지방에서 관리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까지 부여했다. 물론 이를 통해 지사의 권력을 제한하고 세금을 더 효과적으로 거두려는 의도가 있었다.
(1550 년에 반포된 수데브닉 public domain )
한편 당시 러시아에서는 종교의 힘이 매우 막강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차르 못지 않은 힘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551 년 러시아 정교회는 100 개 조항 협의회 (Stoglav, Stoglavnyi sobor) 라는 교회 협의회를 만들고 각지에 퍼져 있는 교회조직을 정비했다. 이는 교회의 역할과 위상을 정하고 교회에 대해서 차르가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또 이반 뇌제의 명령에 따라 1553 년에는 러시아 최초의 출판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 인쇄소 (Moscow Print Yard Московский Печатный двор ) 가 만들어진다. 이후 전쟁등으로 전소되기도 했지만 수많은 서적을 인쇄한 것은 물론 18 세기 초에는 러시아 최초의 신문인 베도모스티 (Vedomosti) 을 창간하는 등 러시아 문화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1550 년대에 행해진 러시아 개혁 조치 중 한가지는 바로 군대 개혁이었다. 특히 스트렐치 (Streltsy Стрельцы́ 사수라는 의미. 소총병으로 번역되기도 함 ) 라는 상비군이 창설되어 1552 년 카잔 포위전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또 군대에 포병 및 공병 조직이 추가된다.
(스트렐치의 모습. 이들은 소총을 주무기로 삼았지만 당시 소총의 느린 장전 시간 때문에 근접전 무기 역시 같이 소지했다. 19 세기 삽화. public domain )
군대의 개편과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 부터 자세히 다룰 테지만 사실 러시아는 끊임없는 전쟁상태였다. 러시아의 넓은 국경선 밖에는 러시아를 만만한 약탈 상대로 생각하는 여러 타타르 한국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전쟁은 불가피했다. 또 북서쪽의 리보니아 기사단 및 서쪽의 대국 폴란드 - 리투아니아 역시 러시아와 공존할 수 없는 상대로 생각되었다. 결국 이반 뇌제의 치세는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끊임 없는 전쟁 상태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다음 이야기는 바로 이 전쟁 이야기다.
다음에 계속 : http://blog.naver.com/jjy0501/100175744249
(참고 : 역사 관련 포스트만 모아서 보는 방법은 아래 고든의 역사 이야기를 클릭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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