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십자군 운동이 동서 교류를 촉진했는가 ?
십자군 운동의 의도하지 않은 여러가지 결과 중 하나는 당시 상대적으로 고립된 문명이었던 서유럽이 선진적인 다른 문화권과 접촉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전에도 접촉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의 결과로 접촉이 많아지고 교류가 촉진되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 것이다.
1차 십자군 이후 십자군 국가들이 건설되고 난 이후 현지에서는 좋든 싫든 간에 서방에서 온 지식인들이나 혹은 상인들이 당시 절정에 이른 발달된 이슬람 문명을 접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수학이나 화학, 그리고 고전 문명 (그리스, 로마, 헬레니즘 문명) 에 대한 이해도에 있어 이슬람 문화권은 훨씬 앞서 있었다. 이들은 단지 고대 문화에 대한 이해도에 있어서 서방보다 앞선 것 뿐만이 아니라 이 내용을 더 발전시켜 나갔다.
십자군 원정의 간접적인 결과로 서유럽은 동방에서 대수학, 광학, 화학 (당시에는 연금술을 포함) 의 지식을 전파 받았다. 그리고 그 내용들은 12 - 13 세기 설립되고 발전 중이던 중세의 대학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이런 내용들이 르네상스와 이후의 과학혁명을 일으킨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중요한 요인이 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서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암흑기로 불리는 문명의 혼돈기를 겪고 고대 문명의 지식의 상당부분을 잃었던 서유럽 문명은 이를 통해서 급속하게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아랍어로 쓰인 대수학 교재인 Al-Kitāb al-mukhtaṣar fī hīsāb al-ğabr wa’l-muqābala (복원과 대비의 계산) 은 대략 서기 820 년경 이슬람의 위대한 수학자 무하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Muḥammad ibn Mūsā al-Khwārizmī) 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일차 방정식과 이차 방정식, 그리고 제곱근등에 대한 내용이 설명된 중세 수학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아라비아 기수법을 뜻하는 알고리즘 (Algorism) 이라는 단어는 알콰리즈미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책에서 al-gabr (복원) 이라는 단어가 후세의 대수학 Albegra 라는 단어가 되었다. 인도 - 아라비아 숫자와 계산법을 설명한 그의 저서가 12세기 경 서양에 전해지면서 차츰 서구에서 아라비아 숫자와 우리가 아는 계산식이 사용된 점은 서구 문명 역사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또 그는 사인 함수 및 탄젠트 함수를 계산하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그의 수학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수학과 인도에서 유입된 수학을 집대성하고 더 발전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아랍의 수학 지식은 유럽에 전파되어 유럽의 과학 혁명의 기초가 된다. 서구의 과학 혁명 역시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것이 아니다. 출처 John L. Esposito. The Oxford History of Islam. Oxford University Press )
물론 십자군 전쟁 하나만이 유럽과 아랍의 문명 교류의 창은 아니었다. 아랍 문명은 스페인이나 시칠리아 같이 유럽 - 아랍 문명의 접경 지역에서도 들어왔다. 하지만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 역시 선진 아랍 문명이 유럽으로 소개되는 중요한 창이었을 것이다.
십자군 운동의 의도하지 않았던 두번째 효과는 (물론 의도한 효과는 성지 회복이다) 동서 무역을 촉진한 것이다. 이미 본론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예루살렘 왕국의 초창기부터 베네치아나 제노바는 무역에서 특권을 노리고 예루살렘 왕국을 도왔다. 이들은 아크레 함락 시점까지도 아크레에 거류지를 만들고 이슬람 권과 직접 무역을 했다.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의 활약을 생각해보면 반드시 십자군 전쟁이 없었다고 해서 이들이 이슬람 권과 무역을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의 결과 보다 수월하게 무역로를 개척하고 무역 거점을 건설할 수 있었다. 특히 4차 십자군의 결과는 의심할 바 없이 베네치아의 상업루트 개척에 큰 도움이 되었다. 12-13 세기 십자군 원정의 결과는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의 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지만 반대로 이들의 발전이 십자군 원정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았다.
(15 - 16 세기의 전성기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토와 무역루트. 이와 같은 상업 네트워크와 무역 루트의 건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것인데 이 중에는 십자군 전쟁 당시 획득한 영토들이 상당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지중해 동부의 여러 섬들이 있다. Territories of the Republic of Venice: in dark red the territories conquered at the start of the 15th century, in red the territories at the start of 16th century, in pink the territories conquered temporarily, in yellow the sea dominated by Venetian fleet during the 15th century, in orange the main routes, purple squares are the main emporiums and commercial colonies Transferred from it.wikipedia; transferred to Commons by User:ZioNicco using CommonsHelper CC-BY-SA-3.0,2.5,2.0,1.0; Released under the GNU Free Documentation License.)
즉 이들이 유럽에서 아크레, 티레 등 팔레스타인 해안도시에 이르는 해상 루트를 개척한 것은 기본적으로 무역을 위해서였지만 당연히 이 루트를 타고 인적 교류가 왕성해 질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성지를 순례하려 온 많은 유럽인들이 해상 루트를 타고 성지까지 왔다. 또 사실상 3 차 십자군 이후에는 십자군들 역시 해상 루트를 통해 성지에 도달했다.
4차 십자군에서 보듯이 이미 13 세기에 이르면 팔레스타인까지 가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방법은 바다를 통한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것은 베네치아 같은 이탈리아 해상 도시 국가들이었다. 결국 십자군 원정을 통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발전한 것 못지 않게 이탈리아 도시들이 십자군 원정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십자군 국가들이 유지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건설된 지중해의 동서 무역 루트는 십자군 전쟁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속했고 중세 말기 상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발전한 이탈리아 상업 도시들이 르네상스에 기초가 된다.
세번째로 십자군 운동의 결과로 현재의 중동 지방과 유럽만 교류가 된 것이 아니라 더 멀리 몽골 제국 및 중국까지 교류가 넓어졌다. 몽골 제국과의 교류가 서구 문명에 미친 영향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지만 아무튼 서양 문명에 세계에 대한 인식이 크게 넓어지는 계기가 된 것 만은 확실하다. 사실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운동 후반기인 13세기 후반기에 몽골 제국과 서유럽의 교류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깊었다. 무엇보다 맘루크조라는 공통된 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결국 프랑크 - 몽골 연합은 의미있는 수준의 군사적 협력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 과정에서 서로간의 왕래가 크게 촉진되었다.
(루이 9세의 명으로 아크레에서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까지 왕래한 루브룩의 윌리엄 (William of Rubruck) 의 행적. 1253 - 1255 년 사이 이미 프랑스 왕국은 몽골 궁정까지 사절을 파견했다. 의도한 군사적 협력은 실패했지만 대신 유럽인의 지리적 인식이 크게 넓어지는 계기가 된다. public domain image )
(쿠빌라이 칸의 서신을 받아든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이때 서신을 전한 니콜로 폴로 (Niccolo Polo) 와 마페오 폴로 (Maffeo Polo) 는 다시 역사상 유명한 마르코 폴로를 데리고 원나라로 향한다. public domain image)
마르코 폴로 (Marco polo) 의 동방 견문록도 이 결과로 나온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교류는 서유럽이 인도나 중국 등 아시아의 존재에 대해서 깨닫는 계기가 되었고 더 나아가 훗날 유럽인이 신항로를 개척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 서유럽인의 지리적 지식은 중동과 동유럽이 세상의 끝이었다면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이들의 지식이 저 멀리 동아시아까지 넓어지게 된 셈이다.
이상에서 십자군 운동이 당대의 초래한 많은 부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서구 문명의 발달에 상당히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십자군 원정이 없었다면 서구의 르네상스나 근대화는 불가능했다라곤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이 서구의 르네상스 및 근대화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의 상대편인 이슬람 문명권은 그다지 긍정적인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물론 십자군의 결과 이슬람 권이 단결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었다. 또 누레딘, 살라딘, 그리고 칼라운에 이르기까지 주요 이슬람 통치자들은 종종 지하드 (성전) 의 힘을 빌어 자신의 정복 과업을 좀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과연 십자군이 없었다면 이들의 정복 사업이 불가능했을까 ?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십자군 원정과 관계 없이 셀주크 투르크 붕괴 이후에 새로운 왕국과 제국들이 등장했을 것이고 그 사이 십자군이 끼어들었다는 게 더 옳은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 특히 셀주크 투르크의 붕괴라는 매우 적절한 시점에 그들이 왔기에 1차 십자군 원정이 성공하고 십자군 국가가 들어설 수 있었다.
당시 서유럽의 문명이나 학문 수준이 중동의 아랍권보다 더 높지는 못했기 때문에 이들이 팔레스타인에 국가를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문화적 유산이 당대나 후세에 이슬람 문화권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십자군의 영향은 대개 당대 무슬림들에게 부정적이었고 사실 후세에도 그다지 긍정적인 측면은 없어 보인다.
예외라고 한다면 이들 역시 무역 파트너로써 이득을 취할 수는 있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동서 교류가 촉진되므로써 중간에 있는 이들도 무역에 의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다만 이슬람 문명에 있어 십자군의 긍정적인 영향이 부정적인 영향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꽤 의문이다. 더구나 이슬람 문명은 십자군이 생기기도 훨씬 전에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십자군 전쟁의 결과 이슬람 문명이 더 발달하게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이상에서 십자군 운동이 동서 교류 촉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서구 문명의 발달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당대에만 국한해서 보면 십자군 원정은 부정적인 측면이 많았지만 그 유산은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부정적인 유산도 역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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